스티브 하우스 씨의 ‘고엽제 매립’ 폭로 이후 전직 주한 미군을 중심으로 유사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

〈시사IN〉은 그중에서도 댈러스 스넬 씨(59·미국 몬태나 주 거주)의 제보에 주목했다. 1970년대 춘천 ‘캠프 페이지’와 서울 용산기지에서 복무했다는 스넬 씨는 당시 제초제 또는 고엽제로 추정되는 물질을 매립했음은 물론이고 핵무기의 방사능 유출로 추정되는 사고도 겪은 일이 있다고 주장했다. 2005년 미군이 한국 정부에 반환한 캠프 페이지는 미군 핵무기가 있었던 곳으로, 반환 당시 국방부와 환경부가 방사능 오염 조사를 벌인 바 있다.

현재 백혈병으로 투병 중인 스넬 씨를 김영미 편집위원이 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그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고, 숨이 가쁜지 이따금 말을 끊었다.

 

ⓒ댈러스 스넬 제공미국 몬태나 주에 거주하는 댈러스 스넬 씨. 주한 미군에 근무하며 춘천 캠프 페이지에 고엽제를 묻었다고 주장하는 그는 현재 백혈병을 앓고 있다.

 


한국에서 복무한 것이 언제인가?
주한 미군으로 두 번 복무했다. 1972~1973년 춘천 캠프 페이지, 1978~1979년 용산에서였다. 캠프 페이지에서는 기술병과 운전병으로 복무했고, 용산에서는 예방의학부대(PMU:Pre-ventive Medicine Unit) 실험실에서 실험 자재 등을 나르던 군용 차량을 운전했다.

캠프 페이지에서 핵무기와 관련한 방사능 유출 사고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1972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찌는 듯한 무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날이었다. 그날 점심을 먹고 쉬는데 갑자기 전 부대에 사이렌이 울렸다. 캠프 페이지에 있던 나와 내 동료들은 처음엔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 사병과 헌병 등이 3중으로 경비하는 어니스트 존 핵미사일 보관소에 모였다. 우리는 그 장소를 닉네임으로 메탈룸(metal room)이라고 불렀다. 헬기 등이 보관된 격납고나 탄약고와는 다른 장소이다. 이 메탈룸이 열리면서 부대원 20~30여 명이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핵탄두가 장착된 어니스트 존 미사일을 등지고 디펜스 자세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0~30여 명이 미사일을 등지고 빙 둘러쌌다. 나중에 미사일 탄두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헬기가 수송하러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캠프 페이지에 핵무기가 있었다는 것을 근무 당시 알았나?
우리 부대에 핵미사일이 있다는 것은 그때 캠프 페이지에 있던 모든 병사가 알고 있었다. 핵미사일 탄두에서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히 방사능 따위가 누출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나와 동료들은 위험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른 일반 미사일처럼 핵미사일 또한 터지기 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도 어디까지나 폭탄이 터져서 문제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우리 부대원들은 지시에 따라 그 핵탄두를 상자에 담는 작업을 했다.

작업 당시 방사능 감지기 등 안전장비를 착용한 상태였나?
그냥 마스크 하나 쓰고 했다. 장갑이나 방사능 감지 장치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고장 난 탄두가 상자에 담기고 나니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고, 우리 부대원 중 몇십 명이 이 상자를 들고 헬기장으로 뛰었다. 당시 내 상관이 빨리 뛰라고 고함을 치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는 명령을 따르는 병사일 뿐이었다. 당시 누구도 핵탄두에 대한 위험성을 알려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사고가 어떻게 났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헬기가 그것을 어디로 옮겼는지 아는가?
춘천시 남쪽 15마일(약 24㎞)쯤 떨어진 어딘가에 폐기되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하지만 정확한 장소는 모른다. 나도 그날 궁금해서 여러 번 상관에게 물어보았으나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다. 캠프 페이지에 근무한 사람들이 만든 페이스북 그룹에도 1972년 그날의 사고를 기억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증언이 올라 있다(이 페이스북에 개설된 캠프 페이지 그룹에서, 한 제대 군인은 “나도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바로 헬기까지 운반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라고 밝혔다).

 

 

 

 

ⓒ댈러스 스넬 제공1972~1973년 스넬 씨가 캠프 페이지에서 드럼통을 묻고 있는 부대원들을 직접 촬영했다(위). 스넬 씨는 이곳에 고엽제나 제초제 등을 묻었다고 주장했다.

 

 


백혈병을 앓은 것은 언제부터인가?
내가 심각하게 몸의 이상을 느낀 것은 2002년부터다. 1980년 전역한 뒤 미국으로 돌아와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중 배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됐는데, 신장결석이 100여 개나 발견됐다. 그 뒤 꺼내도 꺼내도 (결석이) 자꾸 생겼다. 의사들이 말하기를 백혈구가 잘 작동되지 않으면 이렇게 많은 양의 신장결석이 생긴다고 했다. 2002년부터 무려 3년간 각종 검사를 받았고, 2005년 결국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지금은 병이 심해져서 운전도 하기 어렵다. 내 가족 그 누구도 백혈병 병력이 없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 96세인데 매우 정정하다.

한국에서 복무한 경험 때문에 백혈병이 발병했다고 보는가?
백혈병 판정 직후 의료진과 면접을 했는데 그때 질문이 이상했다. 그들은 나에게 “고엽제에 노출되었느냐? 어떤 작업을 했느냐”라고 물었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1972년 그 사건과 군 차고지 옆 공터에 묻었던 이름 모를 드럼통이다.

캠프 페이지에 드럼통을 묻었다는 건가?
운전병으로 일하면서 제초제와 방충제를 부대 안 곳곳에 직접 손으로 뿌리곤 했는데, 가끔은 알 수 없는 드럼통을 부대 안 공터에 파묻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드럼통 바닥과 위에 있는 뚜껑을 제거하고 땅에 묻으면 마치 큰 구멍처럼 된다. 그 구멍에 돌을 반쯤 채우고 알 수 없는 물질을 쏟아 부었다. 그러면 구멍이 마치 하수구 같은 역할을 하면서 알 수 없는 물질들이 땅속 깊이 스며들었다. ‘취급주의’ 표시가 뚜렷한 고엽제(Agent Orange), 제초제 같은 약품들이었다. 당시 우리는 그것들이 인체에 유해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작업을 마치면 우리는 차고지 옆에 마련된 수돗가에서 차와 장비에 묻었던 약품들을 모두 물로 씻어냈다. 그때 오염된 물이 춘천시내 쪽으로 모두 흘러갔다. 아마 그 물을 춘천시민들이 마셨을 거다.

이런 사실들을 보훈청에 알렸나?
한국에서의 복무 경험 때문에 발병했다는 확신이 들자 의료 기록을 들고 보훈처를 찾아가 이 사실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공식적인 부인’뿐이었다. 나는 인터넷상으로라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서 내 경험을 공유하고 또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함께 일했던 동료 중 나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음을 알게 됐다. 1972년 핵무기 사고 당시 상자를 들고 뛰었던 동료 하나가 만성 폐쇄성 폐질환을 앓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댈러스 스넬 제공1972년 춘천 캠프 페이지 근무 당시 스넬 씨.

 


고엽제는 그렇다 쳐도 1972년 핵무기 사고와 백혈병을 연결시키는 근거가 무엇인가?
군 병원에서 백혈병 치료를 받던 중 의사에게 핵탄두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의사가 말하길, 핵으로 인한 방사선 부작용의 경우 30년이 지나야 알 수 있기에 그 당시는 당연히 몰랐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규명이 쉽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30년이라면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와 딱 들어맞는다. 그로부터 나는 나뿐만 아니라 춘천시민들의 안전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왜 그 많은 퇴역 군인들이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당시 미군의 정보 관련 부서 등에 복무한 병사들의 경우 그 부대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이나 임무에 대해서도 50년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비밀 누설금지 각서’를 쓰고 퇴역할 수 있었다. 나는 마지막 근무지가 운 좋게 별다른 군사 비밀이 없던 부대였기에 ‘비밀 누설금지 각서’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각서를 쓴 동료들은 (1972년 사고에 대해) 2022년까지 어떤 사실도 말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그때면 대부분이 하늘나라로 가고 없지 않을까? 나는 사실 아주 특별한 경우다.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 오기로라도 끝까지 원인 규명을 하고 싶었다. 아직 내 나이가 60세도 안 되었는데 이런 병에 걸린 것은 뭔가 원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끈기 있게 검사를 받았다. 보통 다른 퇴역 군인들의 경우 한두 번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다가 원인을 잘 규명할 수 없으면 그대로 병원 가기를 멈춘다. 병이 악화될 대로 악화된 뒤에야 다시 병원을 찾는데, 그때는 그냥 죽어가는 거다.

최근 보도된 스티브 하우스 씨의 고엽제 매립 증언 뉴스를 보았나?
물론 알고 있다. 나도 그 뉴스를 관심 있게 지켜봤다. 하우스 씨의 경우 그가 이제는 죽어가기에 나올 수 있는 증언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비슷한 처지니까 이런 증언이 가능한 것처럼. 죽어가야 이런 증언을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부끄럽다. 그의 증언에 덧붙일 이야기가 있다. 한국에서 내 두 번째 근무지가 서울 용산이었다. 예방의학부대(PMU)였다. 당시 군용 트럭을 운전하던 나는 지시에 따라 전국을 다니며 물과 음식을 채집하러 다녔고, 그 채집된 것으로 PMU 실험실에서 동물 실험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동물들이 한꺼번에 죽은 일이 있었고, 이 사실을 실험 결과와 함께 상부에 보고했다. 아마 그 시기가 하우스 씨가 고엽제를 매립한 때와 비슷할 거다.

 

 

 

 

 

 

캠프 페이지에 배치된 핵무기 어니스트 존 미사일.

 


전역하고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나?
없다. 가끔 구글에 들어가 춘천시내를 들여다본다. 이제는 사라진 캠프 페이지 터를 바라보며 가능하면 더 많은 것을 기억해내려고 노력한다. 아마 병이 더 심해지면 영원히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없을 거다. 하지만 내게 한국 사람들은 너무도 특별하다. 그때 나는 너무 어렸다. 갓 스무살 넘은 젊은 애가 아무것도 모르고 춘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공모자가 됐다. 이것이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다. 백혈병에 걸려 몸이 괴로우니까 30년 전 나에게 더없이 친절하고 순박했던 한국 사람들의 얼굴들이 떠오르면서 죄의식을 느낀다. 우리는 분명히 그때 아무것도 모르고 그 땅에 끔찍한 물질을 마구 버렸다. 그러면서 밭에서 인분 냄새가 난다고, 한국 사람들이 더럽다고 욕을 하곤 했다. 그랬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더 더러운 존재는 우리였다.

〈시사IN〉은 주한 미군에 스넬 씨가 말한 캠프 페이지의 고엽제 매립과 핵무기 사고 여부 등을 물었다. 주한 미군 공보실 관계자는 “(둘 다) 확인된 건 없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핵무기 사고 관련 문서가 있는지 검토해봐야겠지만 핵과 관련해서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전략)’라서 답변 자체가 곤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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