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가 가장 먼저 피는 벼랑’이라는 뜻의 꽃벼루재길은 정선아리랑의 전설이 깃든 아우라지를 출발해 나전으로 이어지는 10여㎞ 길이다. 길은 시종일관 산허리를 에돌면서 이어진다. 왼쪽으로는 끊임없는 소나무 숲, 오른쪽 벼랑 아래로는 꽤 너른 조양강이 나란히 따라 흐른다. 그 강 너머에는 친구처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42번 국도와 정선선 철로가 보인다.
꽃벼루재길은 ‘아우라지에서 나전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반대로 나전을 출발해 아우라지로 올 수도 있다. 사전 정보를 통해 내리막길이 많다는 ‘아우라지→나전’ 길을 택했다. 텅 빈 아우라지역에서 나와 5층짜리 성도아파트를 끼고 도는데, 어디에도 ‘꽃벼루재길’이라 쓰인 표지판이 안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기를 세 차례. 알려준 대로 비탈길을 지그재그로 헉헉대며 20여 분 올라가자 고갯마루에 통신탑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고개에 올라서자, 돌연 O2길로 불리는 꽃벼루재길이 나타났다.
호젓한 산길은 자전거 두세 대가 다닐 만큼 제법 넓었다. 10㎞ 먼 길, 걸음을 재촉했다. 소나무 숲 사이로 길은 물처럼 굽이굽이 아래로 연방 이어졌다. 오른쪽 100 ~200m 벼랑 아래 펼쳐진 푸른 조양강과 국도 그리고 철도의 조화가 꽤 이국적이었다. 그래서 누구는 이 길을 ‘하늘 위에서 걷는 듯한 길’이라고 묘사했었다.
그 옛날, 42번 국도와 철도가 없을 때, 여량(여량면)과 나전(북평면)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왕래했다. 그래서인지 산굽이를 돌아설 때마다 지게를 진 장돌뱅이나, 자반고등어를 손에 든 시골 노인이 나타날 듯한 환각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어른대며 나타나는 것은 솔숲과 희롱하며 노니는 나비들뿐.
길은 명상 수행 중인 절간처럼 고적했다. 간혹 어지럽게 새들이 울었지만, 굽이길을 두어 개쯤 지나면 또다시 정적이 몰려왔다. 길가의 연둣빛 움과 연분홍 꽃망울이 마음을 끌었다. 어느새 도시에서의 끌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리운 사람들과 옛 기억들이 초저녁 별처럼 떠올랐다.
5㎞쯤 걸어가자 간벌 작업을 한 흔적이 나타났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통째 누워 있었다. 그 위에 신문지를 깔고 벌렁 누워 하늘을 본다. “날 버리고 가시는 임은 가고 싶어서 가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며 정선아리랑을 읊조리는데 우물처럼 맑은 하늘, 저 위에 우주의 끝이 보이는 듯했다.
소나무의 짙푸른 송진 향에 이끌려 몸을 일으켜 주위를 기웃거렸다. 5, 6월이면 꽃을 피운다는 피나물·송이풀·얼레지 같은 야생화들이 있나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누런 검불이 온 산을 지배하는 듯했다. 외로이 누워 있는 묘 주위에 노랗고 하얀 꽃을 피운 꽃다지와 냉이가 올망졸망 보였다. 봄볕만으로도 행복한지, 꽃들은 가벼운 바람에도 헤헤거렸다.
두어 시간쯤 걷는데, 아차 싶었다. 길목에 구멍가게라도 하나쯤 있을 줄 알았는데,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목이 말랐지만, 가뭄이라 그런지 어디에도 물이 보이지 않았다. 생수 한 통쯤 챙겨올걸, 하는 후회가 막급했지만, 뒤늦은 자성이었다. 갈증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끝에서 머리끝으로 전해오는 울림과 리듬 덕에 온몸이 재조립되는 기분.
길은 또다시 이어지고, 마침내 나전리로 들어서는 다리가 나왔다. 일삼아 걸은 탓에 온몸이 후들거렸다. 그러나 기분만은 명징했다. 온몸 구석구석에 스민 꽃벼루재길의 솔 향과 피톤치드 덕이려니 싶었다.
먹을거리
정겨운 시골 백반
갈증도 갈증이지만, 아침 열한 시쯤에 출발해 오후 두 시가 넘었으므로 뱃가죽도 말라붙었다. 서둘러 나전리 골목을 다니며 식당을 찾았다. 콧등치기국수나 곤드레밥으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전리에서는 그 메뉴를 볼 수가 없다! 시골 자장면에도 그 지역의 토속 맛이 버무려 있다고 믿는 터라, 중국집으로 가자고 마음먹었다. 그 순간 저 앞에 정겹고, 왠지 반찬이 맛있을 것 같은 간판이 보였다. ‘청호식당.’ 예상은 120% 들어맞아서 시골 백반(사진)을 시키니 한 상 걸지게 나왔다. 아우라지 막걸리를 찬 삼아 먹는 밥은 꿀맛이었다. 시장이 반찬이어서일까, 청호식당의 10여 가지 반찬은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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