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까지 송지호에 고니(백조)가 떠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한 터였다. 잘 하면 송지호에서 ‘야생 고니를 직접 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송지호에는 고니는 간데없고 바람만 가득했다. 그리고 그 바람 덕에 마음속 ‘찌꺼기’가 훌훌 날아갔다.
송지호는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호리와 공현진리를 잇는 7번 국도변에 펼쳐져 있는 석호(潟湖). 아득한 옛날 이 호수는 바다였다. 오랫동안 흙이 쌓이면서 자루 모양이 되었고, 어느 날 바닷물보다 민물이 더 많아지면서 석호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송지호 물길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으며, 수시로 도미와 숭어 같은 바닷물고기가 호수를 넘나든다.
본래 송지호 주위에는 ‘송지호 산소(O₂)길’이라 해서, 철새관망타워를 출발해 2.2㎞ 떨어진 왕곡마을(고성군 죽왕면)을 왕복하는 길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도상에 나타난 그 길이 내 눈에는 평범한 가르마처럼 보여서, 부러 인적이 드문 송지호 둘레길을 택했다. 다행히 철새관망타워 안내인이 “저기로 가면 된다”라고 길을 일러주었다. 6.5㎞에 달하는 송지호 둘레길은 바다와 호수가 만나는 물길 위 목교를 건너면서 시작되었다.
호숫가를 맴도는 길은 ‘바람의 길’이었다. 겨우내 심심했는지 살바람(봄철에 부는 찬바람)과 꽃바람이 끊임없이 살랑거렸고, 때때로 바다에서 짠바람과 세찬 꽁무니바람이 불어와 등을 떠밀었다. 왼쪽으로는 솔향기 숲, 오른쪽으로는 발밑에서 찰랑거리는 맑은 호수, 뒤쪽으로는 철썩이는 허허바다…. 새삼 ‘우리나라에 이런 길이 있었나’ 싶었다.
물소리·새소리·바람소리가 주는 효과
멀리 호수 한가운데서 물떼새가 유영 중이었다. 혹시 고니인가 싶어 눈동자를 부풀려보지만, 거리감 때문에 오리인지 고니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길은 호수를 끼고 굽이굽이 이어지고, 바람은 계속 따라다니며 희롱하다가 호숫가 갈대들에게 달려든다. 갈대들이 놀라 ‘스샤사사샤’ 소리를 지르고, 여행자는 굽은 길을 돌아선다. 그때 갑자기 거름 냄새 진한 널찍한 밭들이 나타났다. 꽃다지·냉이가 밭갈이 전에 수분을 해야겠다는 듯, 희고 노란 꽃들을 어지럽게 피웠다.
재미있는 점은 둘레길 어디에서나 철새관망타워가 건너다보인다는 것이다. 산굽이를 돌 때 잠깐 사라졌다가는 이내 나타나기를 몇 번. 호수 가장자리에서 철새 예닐곱 마리가 울멍줄멍 헤엄을 치다가 수면을 박차며 후르르 날아오른다. 일순간 물소리·바람소리·새소리가 시원하게 귀를 적신다. 반가워 눈여겨보니 흰 고니가 아니라 짙은 회색빛 새들이다.
철새관망타워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다다르자 호수 안쪽으로 들어서는 길이 나타난다. 300여m를 들어서자 단아한 송호정(松湖亭)이 고고하게 서 있다. 정자는 최근에 지어져서 새로울 것 없었으나, 그곳에서 굽어보는 호수는 더 넓고, 철새관망타워는 더 높았다. 다시 돌아나와 서쪽 둘레길을 에돌아가니 왕곡마을이 보이는 갈림길이 나왔다. 그곳 마을도 볼만했지만, 예전에 들른 적이 있어서 논둑길을 지름길 삼아 북쪽 길을 걸었다.
철새관망타워에서 만난 철새들
국도변에 다다르자, 문득 펼쳐지는 솔밭길. 바닥에는 솔방울이 도르르, 터널 같은 길에는 솔향기가 그윽했다. 원래 이 길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닦고 있는 ‘해파랑길’의 한 구간이다(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에서 시작해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688㎞ 해안 길을 말한다). 송지호 산소길은 해파랑길의 ‘통일 기원’ 구간으로, 북으로는 28㎞ 떨어진 화진포로 이어진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길을 2014년까지 다 이을 계획이다.
쉽게 올 수 없는 곳이어서, 내친김에 철새관망타워에 오른다. 층마다 송지호에 드나드는 다양한 철새와 물고기들의 박제 및 사진 등이 보기 좋게 걸려 있다. 덕분에 이맘때 송지호에 고니 외에 민물가마우지·청둥오리·가창오리·쇠오리·비오리·흰꼬리수리 등이 날아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밖으로 나오니 살바람이 여전히 성가셨다.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벌렸다. 몸이 요구하는 대로…. 한 달이 쾌청할 것 같았다.
먹을거리
‘전국 최고’의 막국수
동해를 따라 뻗어 있는 7번 국도변에는 고소하고 비린내 나는 식재료가 지천이다. 송지호 인근 어촌에도 싱싱한 해산물을 파는 곳이 꽤 많다. 더 멀리 위로는 싱싱한 해산물로 유명한 거진항·대진항이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남쪽으로 4㎞쯤 내려가 논밭 사이에 자리 잡은 백촌리에 들어섰다. ‘당대의 맛객’들이 최고로 치는 막국수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일 늦은 시각(오후 3시께)인데도, 어떻게들 알고 왔는지 승용차 예닐곱 대를 타고 온 여행자 열대여섯 명이 ‘백촌막국수’에서 쫀득한 식감이 일품인 편육으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세 시간 가까이 걸어 배가 출출하던 차여서 트레머리 같은 막국수(사진)가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면과 동치미를 삼킨다. 전분이나 밀가루를 전혀 쓰지 않는 면의 구수하고 담백한 맛과, 맑은 동치미의 상큼하고 시원한 향미가 여전했다. 게다가 명태를 찢어 삭힌 명태식해와 푸릇한 무청김치까지…. 한 그릇 뚝딱 먹고 나니 웃음이 후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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