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일, 미국의 오사마 빈라덴 사살 작전이 성공했다. 빈라덴은 아프가니스탄(아프간)이 아닌,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쪽으로 겨우 60여㎞ 떨어진 아보타바드 주택가에서 최후를 맞았다.

빈라덴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9·11 테러로 인해 미국의 민간인 희생이 3000여 명이었다면, 빈라덴을 체포한다는 명목으로 벌인 아프간 전쟁으로 인해 죽어나간 아프간의 무고한 시민은 3만4000여 명에 달한다. 그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미국이 애써 찾아 헤매던 빈라덴을 제거함으로써 아프간 전쟁 또한 발발 10년 만에 대전환을 맞게 되었다.

아프간 전쟁 개전 초기, 미군은 아프간 동부 토라보라를 맹렬히 공습했다. 빈라덴이 은신했다고 알려진 지역이었다. 토마호크 미사일이 훑고 지나가면 웬만한 작은 산은 흔적조차 없어진다. 필자가 방문했던 토라보라는 황폐한 산악 지역이었다. 토라보라에 정말 동굴 은신처가 있는지 주민들에게 물어봤지만 “그 동굴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물도 없고 식량도 없는 곳이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2006년, 미군 제10 산악부대의 빈라덴 수색 작전에 동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아프간의 험준한 산을 헤매다 온 기억밖에 안 난다. 아프간 사람들은 너나없이 빈라덴이 아프간 산악 지대에 은신했거나, 아프간이 아닌 다른 나라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AP Photo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이 5월2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빈라덴 사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필자가 빈라덴에 대한 이야기를 탈레반 지도자로부터 직접 들은 것은 2008년 물라 오마르를 인터뷰할 때였다. 파키스탄과 아프간 국경 지대에서 만난 오마르는 파키스탄 탈레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빈라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99년 바그람 인근 지역에서 그를 만나 회담을 했고, 그의 측근과도 잘 아는 사이이다. 빈라덴과 탈레반은 별개이면서 동지이다. 우리는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고, 신의 뜻에 따라 미국에 저항하는 지하드(성전)를 수행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빈라덴이 탈레반의 지도자는 아니다. 그가 죽거나 체포되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아버지 잃은 뒤 이슬람 원리주의에 심취

빈라덴은 1957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건설업자인 아버지 무하마드 빈라덴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키가 2m가 넘는 장신이었다고 한다(그도 어머니 유전자를 받았는지 키가 193㎝였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예멘 사람이었다. 예멘에서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로 이주해 항구 짐꾼으로 일하다가, 타고난 장사 수완을 발휘해 굴지의 건설업을 일구면서 거부가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빈라덴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남모를 아픔이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하고 재가한 것이다. 빈라덴의 친모는 딸을 여럿 낳았지만, 아들은 빈라덴이 유일했다.

ⓒAP Photo
아내 10명과 아들 50여 명을 두었던 빈라덴의 아버지는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사우디 왕실의 궁전과 이슬람 사원을 건설하면서 왕가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막대한 이윤이 오가는 공사를 따낼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독실한 이슬람 신앙심이 한몫을 했다.

그는 이슬람에서도 원리주의에 철저한 와하비즘을 신봉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와하비즘은 압둘 와하브가 창시한 일종의 이슬람 복고주의 운동으로,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이념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철저한 금욕 생활과 청렴결백을 바탕으로 엄격한 이슬람 원리주의를 지향한다. 사우디 왕가는 이런 빈라덴의 아버지를 신뢰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아버지는 빈라덴이 열 살 때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를 무척 존경하던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슬픔 그 이상이었다. 아버지 사망 후 이복형제들 사이에서 빈라덴은 더욱 외톨이가 되어갔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것은 거액의 돈과 이슬람 원리주의. 소년은 슬픔과 외로움을 아버지의 유산인 이슬람 원리주의로 채우기 시작했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심취해 있던 그는 이웃과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와 와하비즘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항상 조용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그였지만, 종교에 대해서만은 열심이었다. 미국·영국 등에 유학한 다른 형제들과 달리, 그는 항구도시 제다에 있는 명문 킹 압둘 아지즈 대학에 입학해 1981년 경제학 및 행정학 학위를 받았다. 훗날에는 토목공학 학위도 취득했다.

빈라덴은 대학에 다니는 동안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이슬람 단체 중 하나인 무슬림형제단을 알게 되고, 뛰어난 이슬람 학자인 압둘라 아잠과 무하마드 쿠트브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두 사람이 끼친 영향이 빈라덴의 영혼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압둘라 아잠은 국제 지하드 네트워크를 최초로 조직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 네트워크는 빈라덴이 훗날 알카에다나 무자헤딘 조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저명한 이슬람주의 학자인 무하마드 쿠트브는 사이드 쿠트브와 형제다. 사이드 쿠트브는 현재 지하드 운동의 교과서나 다름없는 〈사인포스트(Signpost)〉 저자로 무슬림형제단의 핵심 지도자였다. 빈라덴의 아버지가 이슬람 원리주의 씨앗을 주었다면, 대학 시절 알게 된 이 두 이슬람 학자는 그의 종교를 꽃피우게 했다. 압둘라 아잠의 지하 네트워크 조직과 쿠트브 형제의 지하드 운동은 빈라덴이 대미 항쟁을 조직하는 데 기본 형태를 제공했다.

1980년 소련군이 아프간을 침공했다. 이 사건으로 이슬람권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슬람의 시각으로 보면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들이 이슬람교 국가를 무력 점령한 셈이었다. 지금은 미국이 이슬람의 ‘공공의 적’이지만, 당시에는 소련이 최대 적이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빈라덴에게도 인생의 최대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이 침공한 1980년 1월부터 빈라덴은 아프간을 드나들며 가족들에게 무자헤딘 지원자금을 모으자고 제의했고, 파키스탄에서도 모금 활동을 벌였다. 그뿐 아니라 이 거룩한 성전에 참여할 이슬람 전사도 모집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을 비롯한 몇몇 이슬람교 국가에 무자헤딘 훈련 캠프도 세웠다. 그의 뜻대로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독실한 무슬림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소련군과 맞섰다.


ⓒAP Photo빈라덴(왼쪽에서 두 번째)이 2001년 10월 영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당시는 소련과 미국이 대치하던 냉전 시대였다. 미국도 아프간을 침공한 소련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의 CIA도 비밀리에 이 이슬람 전사들이 소련에 대항할 수 있게끔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30여 년 전 미국과 이슬람 전사들은 소련에 대항한다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그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소련에 저항하던 빈라덴은 1980년대 중반부터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이슬람권에서 아프간으로 온 전사들은 1만6000명이 넘었다. 빈라덴은 이들 사이에서 용감한 전사로 이름을 떨쳤다. 빈라덴의 한 전우는 AP통신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영웅이었다. 항상 최전선에 서서 그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다. 그는 스스로 왕궁 같은 자신의 집에서 걸어 내려와 아프가니스탄 농민, 이슬람 전사들과 함께했다. 그들과 음식을 만들고 식사하고 참호를 팠다. 그것이 바로 민중과 같이하는 ‘빈라덴의 방식’이었다”라고 말했다.

아프간에서 소련 물리친 뒤 ‘금의환향’

그는 사치를 멀리했으며 항상 민중과 함께하는 전사였다. ‘그는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을 켜지 않고, 절대 배불리 먹지 않으며, 집에서도 바닥에 그냥 누워 잔다’는 일화가 늘 따라다녔다. 그의 청렴한 생활 방식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와하비즘에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점들이 가진 것 없는 소시민에게 빈라덴을 이슬람 지도자로서 강하게 각인시킨 것이다.

1989년 마침내 소련이 10년 만에 아프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아프간 항쟁을 마치고 사우디로 돌아온 빈라덴은 영웅이 되었다. 사우디 정부도 그를 아프간 성전의 영웅으로 받들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이슬람 사원 집회에 초대되어 연설하는 스타 강사가 되었다. 그의 격정적 연설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만 25만 개 이상 팔려나갔다. 필자 또한 요르단에서 그의 연설 테이프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음질이 매우 좋지 않아서 잘 들리지도 않았는데, 옆에 있던 아랍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테이프를 듣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의 연설은 무슬림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빈라덴은 “이슬람의 가르침을 올바로 실천한다면 그 무엇도 이슬람교 국가를 이길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소련에 대항한 아프간 성전은 이교도 초강대국에 대한 이슬람의 위대한 승리라고도 했다. 사우디 왕가도 빈라덴의 연설에 감명받았던 듯하다. 그래서 빈라덴 가문의 사업체가 외국 정부와 민간 기업으로부터 많은 계약을 따낼 수 있도록 지원했다.

여기까지가 빈라덴의 전성기였다. 1991년, 미국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공격하며 걸프전을 벌이면서부터 빈라덴은 고난의 길을 걷는다. 빈라덴 처지에서 보면,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하는 것은 이슬람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이었다. 그때 사우디 정부가 이라크를 겁내다가 지레 겁을 먹고 미군의 사우디 주둔을 받아들였다. 이것을 두고 빈라덴은 크게 반발했고, 사우디 왕가를 반대하는 여론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국과 사우디 정부는 빈라덴과 원수가 되었고 이후 빈라덴은 수단으로, 다시 아프간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미국과 사우디의 추격을 받던 빈라덴과 그의 가족을 받아들인 것은 아프간의 탈레반 정부가 유일했다. 이로써 빈라덴은 아프간에서 다시 이슬람 운동의 제2막을 시작한 것이다. 아프간의 험준한 산악 지대에 사령부를 설치한 그는 지구 어느 곳과도 교신이 가능한 통신장비와 발전기, 막대한 정보량을 저장한 컴퓨터 등을 갖추었다. 대학 시절 영향을 받은 압둘라 아잠에게서 배운 대로 전 세계의 이슬람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갔다. 이 네트워크에 기반해 그는 전 세계를 지휘했다. 심지어는 발칸반도에서 학살되는 무슬림을 구원하려 이슬람 전사단을 파견할 정도였다. 이란 정보부, 파키스탄 정보부 등 여러 이슬람교 국가의 정보조직이 그를 도왔다. 이슬람권 국가의 고위 관리 가운데에도 협조자가 상당했다.

조직이 완벽히 정비되자 빈라덴은 무슬림형제단에게 배운 대로 미국을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 1998년 8월7일, 케냐 주재 미국 대사관과 탄자니아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동시에 폭탄이 터져 250명이 사망하고, 5500명이 넘는 사람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했다. 8월20일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 훈련 캠프에 크루즈 미사일 80발을 발사했다.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 공격을 받은 후 빈라덴은 오히려 더욱 대담한 공격을 이어갔다. 그리고 2001년 9·11 사건을 벌인 것이다.

미국의 ‘파트너’에서 반미주의자로

9·11 직후 미국은 아프간 탈레반 정부에게 빈라덴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탈레반 정부가 빈라덴 인도를 거부함에 따라 2001년 10월7일 아프간 공습을 개시하게 됐다는 것이 그간 미국의 공식 견해였다. 그런데 이와 달리 당시 탈레반 지도부가 빈라덴을 미국에 넘기려 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올해 초 필자는 9·11 테러 당시 아프간 탈레반 정부의 파키스탄 대사였던 압둘살람 자예프를 인터뷰했다. 자예프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정부는 빈라덴을 인계하기로 결정했다. 아프간이 만약 전쟁에 휘말린다면 너무도 큰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우리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고 별안간 공격을 해왔다.”

그에 따르면, 탈레반 정부가 빈라덴을 넘겨주기로 한 바로 그날 미국이 아프간을 공격했다. 한때 마음이 맞았던 미국의 파트너는 이로써 역사상 최고의 악명을 떨친 반미 지도자로 등극했다. 아프간 10년 전쟁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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