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롤과 게이머, 그 전환시대의 만남 문정우 기자 불신의 자발적 유예. 18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철학자이며 평론가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생각해낸 개념이다. 판타지 소설이나 SF 소설을 읽을 때 작가가 설정한 도무지 있음직하지 않은 상황을 독자가 흔쾌히 받아들여 함께 즐기는 것을 말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를 진짜 현실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이런 인간의 기이한 습성이 없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따분하지 않았을까. 어떤 이들은 이 시인을 불세출의 천재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격하게 동의하는 편이다. 불신의 자발적 유예라는 개념은 예술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의 수많은 복잡... 깨달은 당신 더 잘 사랑하리라 박현주 (번역가·에세이스트) “그대 내 안에서 그 계절을 보겠지/ 노란 잎이 한둘 남은, 혹은 다 떨어진/ 나뭇가지는 차가운 바람에 흔들리고/ 노래하던 고운 새들도 사라져 폐허가 된 마른 성가대석.”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3번은 이제 죽음을 앞둔 노인이 연인에게 전하는 노래로 유명하다. 나뭇잎이 떨어진 나뭇가지처럼, 해 지고 스러져가는 빛처럼, 마지막으로 타오르고 남은 재처럼 이제 이 글쟁이의 패기가 이쯤은 돼야 금정연 (서평가) “귀사로부터 〈휘트먼:시와 산문〉을 거절한다는 통지와 함께 원고 검토자들이 보낸 간단한 논평을 받았습니다. 꽤 근사하게 들리는 말인데요. 혹여나 원고 검토자가 더 필요하면, 저한테도 말씀해주십시오. 뭐가 되었든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으니, 여기라도 문을 두드려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1945년, 스물다섯 살의 찰스 부코스키는 원고를 거절하는 잡지 편집자의 에어컨을 살까 화성으로 이사 갈까 박태근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 연구원) 너무 덥다. 에어컨을 켜면 되지만 집에는 에어컨이 없다. 지난 주말에는 집을 탈출해 동네 카페에서 하루를 보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넘치는 데다 나보다 성급한 이도 많아 빈자리가 없었지만, 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에어컨을 쐬는 것만으로도 집에서 선풍기를 껴안고 버티는 것보다 행복했다. 그러다 카페도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 터덜터덜 걷다가, 문 모기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문정우 기자 덥다. 우리는 모두 생애 최고로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이 지구상에 사는 한 누구도 예외는 없다. 간혹 서늘한 여름이 찾아오는 해도 있을 법하건만 벌써 오랫동안 기온은 상승 일변도다. 기후변화는 이제 작전상이라도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강퍅한 기세이다. 북극과 남극, 그리고 히말라야 산맥의 만년설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게 정말 우리 잘못일까. 인터넷 검색이 삼켜버린 사전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발터 베냐민은 ‘사진’을 기술복제 시대의 대표적 산물로 호명했지만, 실제로 기술복제 시대 최초의 발명품은 ‘책’이었다. 인쇄된 ‘책’은 근대의 산물이자 동시에 근대를 만든 발명품이었으며 표준화된 최초의 상품이었다. 15세기 중엽 유럽에서 일어난 인쇄 혁명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등장하게 되었다. 〈근대 유럽의 인쇄 미디어 혁명〉을 저술한 엘리자베스 L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책 네 권 박현주 (번역가·에세이스트) 어렸을 때는 여름보다 겨울을 더 좋아했다. 겨울은 타인의 온기를 정답게 여길 수 있는 계절인 반면, 여름은 홀로 있으면 외롭고 붙어 있으면 괴로운 계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상하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변함없을 때도 삶의 온도와 습도에 따라 타인이 그립기도 하고 지긋지긋하기도 하다니. 남반구의 겨울과 북반구의 여름이 같이 흐르고 있듯이, 마음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교육 현장의 미신들 문정우 기자 함께 기자 생활을 하다가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서 교수를 하는 친구가 종종 하던 얘기가 생각난다. “네가 기자랍시고 세상을 좀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마 이 대학과 교육부라는 데서 얼마나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이곳에 어떤 기이한 고대의 괴물이 우글대는지 상상도 못할 거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친구가 과장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요 며 ‘역사의 종언’의 종언을 알리다 문정우 기자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던 아프리카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는 1991년 7월 아프리카인에 대한 보상과 그들의 본국 귀환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라는 긴 이름의 회합이 열렸다. 아프리카 지식인들이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을 성토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이 회의는 노예무역으로 뿌리가 뽑힌 숱한 생명과 금과 다이아몬드 같은 약탈 자원에 대한 적절한 모기 퇴치엔 코끼리 똥 박현주 (번역가·에세이스트) 무사히 살아가는 게 용타 싶을 정도로 나는 생활에서 무능하지만, 그중에서도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기술에서 가장 무능하다 싶다.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뭐가 어려우냐며 의아해할지도 모르지만, 회의(懷疑)가 많은 사람은 남의 충고를 그대로 믿고 실천하는 게 힘들다. 요리 블로그에서 레시피를 보더라도 괜히 내 마음대로 변형했다가 괴이한 요리를 내놓는다 여행지에서 읽는 특별한 ‘책의 맛’ 금정연 (서평가) 얼마 전 베트남에 다녀왔다. 어른 여덟 명과 아이 다섯 명이 함께한 가족 동반 여행이었다. 4월에는 친구들과 도쿄에 다녀왔다. 4월에는 아내와 함께 스페인에도 다녀왔다. 1월에는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그건 일 때문이었다. 이렇게 쓰고 있자니 대단한 여행자라도 된 기분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 내가 해외에 나간 것은 딱 한 번이었다. 하와이. 물론 신혼여행이었다 평범한 악을 거부하는 좀 별난 ‘능력자들’ 문정우 대기자 1만 년도 더 훨씬 전에 스페인 피레네 산맥의 한 동굴에서 어떤 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는 벽에 친숙한 동물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그것도 기왕이면 펄펄 살아 움직이는 듯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심 끝에 그는 바위의 튀어나온 면과 갈라진 틈을 그대로 살려보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빨강, 보라, 검 회사 생활 사용 설명서 3종 세트 박태근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 연구원)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는 심금을 울리는 제목이다. “38도는 미열, 회사를 쉬는 건 40도부터!”라며 아픈 걸 참고 출근하는 모습에서는 눈가가 뜨거워지고, “경영자 마인드로 열심히 일할 테니 경영자의 월급을 주세요”라며 차분하게 대응하는 모습에서는 가슴이 뜨거워진다.그렇지만 이 모든 말은 속으로 되뇔 뿐 입 밖으로는 꺼낼 수 없다. 반 총장이 욕먹는 게 인종차별 탓만일까 문정우 대기자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올해 말 퇴임을 앞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쓴 글을 읽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사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워서였다.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에 대해서 쓸 때 빼고는 〈이코노미스트〉가 이처럼 냉정을 잃었던 적이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적어도 근래에는 없었다.이 신문에 따르면 유엔 역사 70년 동안 등장한 사무총장 8 그때 그 교훈을 잊지 않았다면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대학생이 되기 전, 3년 동안 막노동 현장을 전전하며 살았다. 현장 일이라고 해서 늘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은 다쳤고, 한 번은 죽을 뻔했다. 일용직 잡부로 시작해 나중엔 목수 일을 했다. 집 짓는 목수가 하는 일은 철근 골조에 콘크리트를 부을 수 있도록 목재 패널로 거푸집을 만드는 것이다. 콘크리트 타설이 끝나면 양생(건조 및 굳히기) 과정을 거쳐 처지고 쪼그라드는 몸을 쓰다듬는 책 박현주 (번역가·에세이스트) 평생 몸치였지만 요새는 살려고 최소한의 운동을 한다. 내가 비루한 몸뚱이를 힘겹게 굴리는 필라테스 연습실에는 큰 거울이 붙어 있다. 선생님은 수강생들에게 격려를 계속한다. “자기 몸을 보면서 하세요!” 여기서 자신이 상상한 그대로의 몸을 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쭉 뻗었다고 생각한 무릎은 굽었고, 꼿꼿이 폈다고 생각한 어깨는 동그랗게 말려 있다. 내 몸은 글쓰기 힘들 때 써보기 좋은 문장 금정연 (서평가) 조 브레이너드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박상미의 〈나의 사적인 도시〉에서였다. 박상미가 뉴욕에 머무는 동안 보고 듣고 걸으며 느낀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브레이너드의 이름은 2007년 8월 기록에 등장한다.“조 브레이너드의 책을 사다. 〈I Remem-ber〉. 평소에 기억력이 없어 불편이 많은 나는 이 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기억 한 줄마다 나의 트럼프가 드러낸 위태로운 세상 문정우 대기자 1976년 1월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기 직전의 겨울방학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우리나라 대륙붕 시추 현장에서 소량이지만 양질의 석유를 뽑아냈다고 발표했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의 학비를 대느라 허리가 휘었던 부모님은 그렇게 되면 다른 산유국처럼 우리나라도 정부가 대학생에게 등록금은 물론이고 용돈까지 줄 게 아니냐며 기 고래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책 박태근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 연구원) 최근 멋진 책이 나왔다. 제목은 짧다. 〈고래〉다.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 〈고래〉와 제목이 같다. 이번 책은 소설이 아니라 과학 도서다. 소설 〈고래〉는 2000년대 한국 문학에서 손꼽히는 작품이라 여전히 많은 독자가 찾아 읽는다. 서점에서 ‘고래’를 검색하면 당연히 이 책이 제일 위에 나온다. 그런데 고래는 애초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 아닌가. 포유 ‘혁명’ 알아야 헛소리에 안 속지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독자 처지에서 시리즈로 되어 있는 책을 읽다가 중간에 멈추면 다음 책이 궁금해지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한번 시작했으니 끝은 봐야겠는데, 다음 권이 언제 나올지, 언제 끝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책을 기다리는 일은 선량한 독서가에게는 설레는 기다림이겠지만, 참을성 없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짜증나는 일이다. 시리즈물이 완간되길 기다리는 또 다른 이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