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 아닌 보편적 호스피스 장일호 기자 미국의 비영리단체 ‘에이징 위드 디그니티(Aging with Dignity)’는 1996년 ‘다섯 가지 소원(five wishes)’이라는 제목의 생전 유언장을 만들었다. 단체 차원의 운동으로 시작된 다섯 가지 소원은 현재 미국 내 40개 주에서 법적 효력을 갖는 문서가 됐다. 적는 내용은 건강 관련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없을 때 나를 대신해 결정을 내릴 대리인을 3명까지 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밖에 심폐소생술을 비롯해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치료나 간병 방식 등을 구체적으로 적도록 되어 있다.김대균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권역호 ‘이소가야 스에지’를 기억해야 한다 김형민(SBS Biz PD) 일제강점기, 일제에 항거하는 조선인들은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불렸다. 일본말로는 ‘후테이센징’. 불령은 ‘원한과 불만을 품고서 제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뜻이니 식민지 백성 노릇을 거부하는 조선인들을 두루 일컬은 소리겠지.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비국민’, 일본말로 ‘히코쿠민’이라는 단어도 많이 쓰였어. ‘국민이 아닌 자’라는 뜻이지. 일본 제국주의의 시책에 반대하거나 그에 적극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호칭을 붙이고 불이익을 주었단다. 일제 당국이 “조선에 사는 60만 내지인(일본인) 가운데 유일한 비국민”이라며 이를 박박 동아시아의 ‘신냉전’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청소년이었던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이 전 세계에 시장 만능의 논리를 주입하고 있었다. 나에겐 그저 쪼들린 삶의 기억만 남아 있다. 군사독재를 핑계로 술독에 빠져 있던 1980년대 말미에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역사적 대사건이 벌어졌다. 그 직전인 1986년 플라자 합의와 미·일 반도체협정은 3저 호황과 반도체 산업의 급성장이라는 호재로 내 기억에 남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이 사건은 동아시아 공급망을 급진전시킨 분수령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발전도상국이 포함된 이 네트워크의 위력은 점점 더 강해졌고 미·중 데탕트에서 비롯된 중국의 가세 조선시대 화가들의 ‘인스타그램 인증샷’ 고재열 기자 “도화서 화원 김응환과 김홍도는 관동지방과 금강산을 돌아보고 이를 그려 오라.” 1788년 9월 정조가 도화서에 내린 명이다. 두 화원은 어명을 받들어 관동지방과 금강산 일대를 50여 일 동안 돌아보고 화첩을 지어 정조에게 올렸다.조선 후기 선비들 사이에서 금강산 여행은 모두가 꿈꾸는 일종의 ‘인생 여행’이었다. 유행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금강전도’를 그린 겸재 정선이다. 그의 진경산수화가 조명을 받으면서 금강산 여행도 덩달아 화제가 되었다. 정조 역시 여기서 비켜 있지 않았다. 금강산에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다. 임금이라 쉽게 가을은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해마다 가을이 되면 기분이 싱숭생숭해지곤 한다. 가을은 내게 이동과 변화의 계절이다. 서울에서 작은 이사를 일곱 번쯤, 큰 이사는 두 번을 했다. 택배로 큰 짐을 부치고 온갖 가방과 쇼핑백에 남은 짐을 담아 어깨에 둘러메고 대중교통으로 짐을 나른 것은 작은 이사고, 승합차며 트럭을 동원해야 했던 것은 큰 이사다. 큰 이사 때마다 계절이 가을이었다.10년 전 서울에 올라왔다. 한 달, 3개월 혹은 6개월, 길면 1년짜리 계약으로 기숙사와 고시원과 친구 집을 전전하다 7년 전 처음으로 내 명의로 원룸을 얻었다. 원룸은 임대주택이었고, 새로 나온 책 [새로 나온 책] 시사IN 편집국 트와일라잇 살인자들김세정 지음, 시사IN북 펴냄“살인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다.”2016년 4월 영국 링컨셔의 도시 스폴딩에서 두 모녀를 죽인 14세 동갑내기 소년과 소녀가 체포되었다. 당시 둘은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보고 있었다. 언론은 이들을 ‘트와일라잇 살인자들’이라고 불렀다. 살인은 그 사회의 모습을 반영한다. 사회가 어떤 논리와 가치관에 의해 구성되고 작동되느냐에 따라 살인의 종류와 방법도 달라진다. 강도가 행인을 죽이는 것과 미혼모가 영아를 살해하는 것은 다르다.한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영국 로펌에서 일하고 있는 저자 존엄하게 죽기 어려운 나라 장일호 기자 오래 살지만 건강하게 살지는 못한다. 보건복지부의 ‘OECD 보건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2017년 기준 82.7세다. 현재 83세인 노인이 태어난 시기인 1936년 기대수명이 42.6세였음을 감안하면 두 배 정도 늘었다. 당시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미래다. 기대수명보다 눈여겨봐야 할 건 건강수명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기대수명에서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건강을 잃은 기간을 뺀 연령을 건강수명으로 정의한다. WHO는 한국인의 건강수명을 2016년 기준 73세로 보고하고 있다.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의 격차가 10년쯤 된다. ‘콧줄’ 단 채 생의 마지막을 맞아야 하는가 송병기 (서울대학교병원 의생명연구원·인류학) “또 곡기를요? 그러다 엄니가 다시 펄펄 힘이 나서 일어나시면 그때는 큰딸이 언제까장이나 여기 곁에 남아서 뒷감당을 책임져주실라요? 그러다 아직 저렇게 기력이 허하신 양반한테 외려 해가 되시지 않을랑가 걱정이 되요마는….” 이청준의 소설 〈축제〉에서 ‘외동댁’은 늦은 밤 어머니의 곡기를 걱정하는 광주 큰시누이에게 원망스러운 듯 목청을 높인다. 노인의 아들 내외와 딸들은 며느리인 외동댁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그가 30대에 남편을 잃고 그 후로도 30년 가까이 어머니를 홀로 모셔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6년간 노인은 치매를 앓 홍콩에 채찍과 당근 꺼낸 중국 베이징·양광모 통신원 홍콩은 중국에게 ‘아픈 손가락’이다.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해 영국에 할양된 홍콩은 100여 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 처지에서 1997년 반환받기까지 설움과 고통의 시간이 응축된 곳이다. 반환 뒤 홍콩은 중국 개혁·개방의 창구였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배울 수 있는 귀중한 참고서 구실을 했다. 홍콩이 없었더라면 중국 경제는 지금처럼 발전할 수 없었다.중국 처지에서 결코 잘라낼 수 없는 이 아픈 손가락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중국의 고민은 깊다. 우선 본토의 자국민들을 상대로 한 여론전을 진행 중이다. 중국 정부나 언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노트르담 대성당 재건 파리∙이유경 통신원 지난 4월15일 일어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는 4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도 충격파가 여전하다. 수많은 프랑스 국민이 성당을 찾아 애도했고,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 등 주요 정치 인사들도 비통함을 표명했다. 현재 대성당 보수 작업은 기반 구축 단계다. 본격적인 건물 재건 공사는 2020년 돌입할 예정이다. 무너진 대성당을 다시 세우는 일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순탄치 않아 보인다. 프랑스 미술 월간지 〈눈(L’œil)〉의 에디터 장크리스토프 카스트랭은 4월24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대성당 재건은 단순히 노트르담과 그 복원만 전쟁이 남긴 풍경과 상처 박성표 (작가) 가족만큼 가깝고도 먼 존재가 있을까? 미국에 정착한 베트남 난민 티부이는 항상 의문이었다. 왜 아빠는 늘 집에 혼자 있을까? 왜 엄마는 가장 행복했던 때를 학창 시절이라고 말할까? 티부이는 진통 끝에 아들을 낳고 덜컥 겁이 난다. 부모를 한 번도 이해해본 적 없는 내가 엄마가 되다니! 그는 부모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티부이는 부모를 인터뷰하고, 베트남까지 방문했다.아버지의 가족사는 복잡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베트남에는 대기근이 찾아왔다. 아버지 쪽 가족은 오직 살기 위해 흩어져야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가 데리다는 왜, 어떻게 해체철학 하게 되었나 [독서일기] 장정일 (소설가) 자크 데리다(1930∼2004)는 자신이 쓴 다양한 글 속에 자전적인 파편을 흩뿌려 놓았지만, 글쓰기의 유희 속에 섞여 있는 자전적 파편들은 매우 불분명하고 진위를 알 수 없다. 자신을 기호로 삼아 차연(差延·différance)을 기도한 것은 데리다가 별나서가 아니다. 명성은 자신의 과거를 가공할 수 있게 해주는 권리다. 드높은 명성을 갖고서도 가공 불가능한 것은 그가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나치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가 비시 정부를 세웠던 시기, 열두 살 난 우등생이었던 데리다는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 어류학의 태두 정문기를 아시나요 김만석 (독립연구자) 아내의 할아버지는 남해공립수산실수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에 정착해 일가를 이루었다. 할아버지 자택은 영도의 남항 바로 뒤에 있었는데, 1980년대에 소금창고와 조그만 ‘점빵’을 할머니가 운영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살림살이를 꾸렸다. 할머니의 소금창고업은 1979년 한주소금이 등장하면서 제염공장과 더불어 쇠락해갔지만, 할머니 수완이 없었다면 5남매 자식들의 공부나 결혼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해방 이후 할아버지가 영도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수산검사소’에 근무했기 때문이다. 과거 정부기구에 근무한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진정한 사진 혁명 머지않았다 이상엽 (사진가) 얼마 전 눈에 띄는 IT 기사가 있었다. 삼성전자가 1억800만 화소의 모바일 이미지 센서 ‘아이소셀 브라이트 에이치엠엑스(HMX)’를 출시했다는 기사였다. 이미지 센서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을 디지털 신호로 변환하는 반도체다. 엄지손가락만 한 ‘1/1.33인치’ 크기 센서 위에 1억800만 개의 광소자가 집적되었다는 의미다. 디지털카메라의 본격 시작을 알린 2001년 캐논의 1D 카메라가 400만 화소였다. 눈부신 발전이다.그동안 이 분야에서 최고 업체는 소니였다. 소니는 이미지 센서 시장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강자였는 크레용팝 출신 유튜버 ‘웨이’ 랜디 서 (대중음악 평론가) 과장을 좀 보태면 요즘 유튜브의 영향력은 텔레비전(방송사)에 견줄 만하다. 올해 4월 앱·리테일 분석 서비스 와이즈앱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한 앱은 세대를 불문하고 유튜브였다. 텔레비전 속 스타가 유튜브로 역유입되는 일도 흔하다. 아이돌도 예외가 아니다.많은 아이돌이 유튜브를 적극 이용한다. 최근에는 엑소 멤버들이 개별 채널을 개설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튜브는 기존 팀의 홍보 채널로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이처럼 아이돌 개인이 팬들을 만나는 창구가 된다. 이들 중 일부는 아예 직업 유튜버라 불러도 될 만큼 ‘열네 살 소녀의 1994년’을 손바닥 안에 움켜쥐다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은희에게.편지를 쓰게 될 줄은 몰랐어. 처음엔 그냥 평소처럼 써보려고 했는데, 편지가 아니면 안 되겠더라. 영화 후반부, 네가 영지 선생님(김새벽)의 편지를 읽는 장면, 이어서 답장을 쓰는 장면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탓이겠지. 아… 그 장면들은 정말, 너무나 뭉클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거든.내가 오래전에 지나와버린 그해 1994년을 자신의 현재로 살아내고 있는 열네 살 은희(박지후). 너의 소문을 처음 들은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널 처음 본 사람들이 다들 같은 말을 했었지. “이 영화 진짜 진짜 스리나가르에서 들려온 어머니의 절규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인도 북부 카슈미르 계곡은 아름다운 곳이다. 잠무카슈미르 주도 스리나가르의 명물인 하우스 보트(호수에 설치한 붙박이 배)의 뱃전에 앉아 저 멀리 보이는 피르판잘 산맥과 거대한 달 호수에 비친 희끗한 설산의 자태, 수면 위에서 앞다퉈 피워내는 연꽃과 수련, 소금쟁이처럼 수면을 스치며 지나가는 작은 배 시카라를 보고 있자면, 왜 무굴의 4대 황제였던 제항기르가 이곳에 빠져 있었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수많은 나라가 독립했다. 그중 몇 나라는 자의나 타의로 분단됐다. 타의로 분단된 나라가 한반도다. Bachianas Brasileras No.5 [굽시니스트 시사만화] 굽시니스트 개정 강사법의 ‘낯섦’을 지지한다 홍덕구 (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 개정 강사법이 올해 8월 시행되면서 대학가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개정 강사법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강사의 교원 지위 확보이다. 군사정권 시대에 박탈되었던 강사의 교원 지위를 회복하고, 교원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에는 적극 공감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권리는 일단 채용이 되어야만 체감할 수 있다. 방학 중 임금 지급이라는 항목 또한 처음 의도와는 달리 약 2주일분 임금을 추가로 지급하게 된 것에 그쳤다. 대부분의 강사들 처지에서는 강사 공채의 합격·불합격 여부가 가장 중요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박사학위 없는 4 2만명 탈북 여성의 현주소 나경희 기자 이한아씨(23·가명)는 중국인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5)을 홀로 돌보는 탈북 여성이다. 탈북이 한국에 입국하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이씨는 애초 탈북할 생각이 아니었다. 이씨는 중국에서 일해 돈을 번 뒤 북한으로 되돌아갈 생각이었다.이한아씨는 열여덟 살이던 2014년 국경을 넘었다. 이씨를 중국으로 데려온 브로커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이씨를 팔아넘겼다. 그나마 이씨는 남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씨는 ‘적어도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나를 해치지는 않겠지’라는 추측만으로 자신보다 일곱 살 많은 남편을 택했다. 이듬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