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데모크라시 악마도 희생양이라는 새로운 질문 이승한 (칼럼니스트)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북한을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한 거의 첫 사례다(〈시사IN〉 제509호 ‘똘이장군은 돌아오지 않는다’ 기사 참조). 물론 비슷한 시기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민족의 화해와 전쟁의 초극을 이야기하는 조정래 장편소설 〈태백산맥〉이 히트작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한국전쟁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현시점에서 북한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이전 작품들과는 사뭇 달랐다. 애초에 박정희의 독자적 핵 보유 플랜이 북한의 핵실험에 맞서기 ... 똘이장군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애국의 역사를 통치에 이용한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전쟁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 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습니다.” 6월6일 제62회 현충일 추념사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와 같이 말했다. 가만히 그 말을 곱씹다가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만들어진 지 10년이 넘어가던 반공 만화영화 〈똘이장군-제3땅굴 편〉(1978)을 틀어주던 텔레비전, 6월이면 손수 만든 차트를 들고 나와 북한의 침략 루트를 짚어 설명해가며 반공의식을 고취시켜주었던 ‘국민학교’ 교장 선생... ‘살아남은’ 게이의 연예계 생존법 이승한 (칼럼니스트) 하리수의 연예계 데뷔 이후 16년이 지났다. 그가 한국 사회에 수용되는 과정을 지켜본 수많은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들은 용기를 얻었다.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 자체가 화제가 될 것이라 판단한 기획사들 또한 ‘제2의 하리수’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을 만한 이들을 찾았다. 2005년 4인조 트랜스젠더 그룹 ‘레이디’가 데뷔했고, 2007년에는 배우 이대학이 성 확정 수술을 받고 이시연이라는 예명으로 연예계 활동을 이어갔다. SBS 〈진실게임〉에서 ‘진짜 여자를 찾아라’ 유의 특집에 출연한 바 있던 최한빛은 ... 하리수는 되는데 홍석천은 안 된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그거는 거, 안 그러게 해야지.” 자신의 아들이나 조카가 성 소수자라고 커밍아웃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YTN 〈안드로메다〉 대선 주자 인터뷰 팀의 질문에,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는 이렇게 답했다. 마치 자신의 혈육이라면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조차 자기 마음대로 참견할 수 있다는 식의 답변에 이어, 홍 후보는 하늘의 섭리를 들어 소수자 인권을 부정했다. “나는 그게, 거 생각이 좀 달라요. 그거를 소수자 인권 측면에서 보시는 분도 있지만, 그게 하늘이 정해준 것을….” 그런데 이 완고한 편견에 한 가지 조건이 달린다... 그는 왜 하필 ‘쁘아송’이었을까? 이승한 (칼럼니스트) 2000년 홍석천이 〈여성중앙〉과 한 인터뷰에서 커밍아웃을 했을 때 한국 사회가 충격에 휩싸였다는 건 딱 절반만 진실이다. 그가 1990년대 중반 MBC 청춘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을 통해 선보인 패션 디자이너 ‘쁘아송’ 캐릭터를 잘 소화하는 바람에, 그의 성 정체성을 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많았다. ‘쁘아송’은 당시 한국 사회가 남성 패션 디자이너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압축한 캐릭터였다. 체력적으로 연약하고, 말투는 사근사근하며, 감정 표현이나 몸동작이 호들갑스럽고, 여성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외국계 예명의 소유... ‘망한 나라’ 조선이 드라마가 되는 법 이승한 (칼럼니스트) 1976년 〈왕도〉나 1983년 〈개국〉 〈추동궁 마마〉 등은 당대 정권에 의해 군사 쿠데타를 미화하는 맥락으로 활용되었다(〈시사IN〉 제499호 ‘현실에서 쥔 칼자루 드라마에도 휘둘렀네’ 기사 참조).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이라는 역성혁명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박정희 소장의 5·16 군사 쿠데타와 신군부의 5·17 내란 또한 모두 어지러운 시대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엘리트 군인들이 내린 구국의 결단처럼 보이는 연상 작용을 피해가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당대 고려의 부패상을 강조하고 조선 건국의 당위... 현실에서 쥔 칼자루 드라마에도 휘둘렀네 이승한 (칼럼니스트) 파면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돌아간 삼성동 자택 인근은 연일 태극기를 흔들며 오열하는 지지자들로 붐빈다. 공화국의 심장인 수도 서울 안에, 담벼락을 향해 절을 하며 “마마를 지키지 못했다”라고 서럽게 우는 이들이 넘쳐난다. 시공을 달리하는 듯한 이 초현실적인 광경. 누군가는 이를 두고 “박티칸 시국이 따로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이들은 그리 생각할지 몰라도, 거기 모인 이들에게 삼성동 자택은 아마 바티칸이 아니라 두문동(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왕조의 충신들이 조선조에서 벼슬하지 않고 외부와 차단하며 모여 살던 ... 재벌의 속성을 악역으로 인격화하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국가와 국민에게 엄청난 직장 제공과 세금 납입으로 우리 경제를 도약시킨 세계 최고의 기업 총수를 사소한 재단 지원을 이유로 들어 구속하는 특검의 수준이 이렇게 형편이 없는 것인가?”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된 직후부터 스마트폰 메신저를 타고 장년층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한 작자 미상 메시지의 일부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삼성은 세계 일류 기업이고 우리의 주린 배를 불려줬으니 범죄 혐의가 있더라도 불구속 수사의 특혜를 줘야 하는데, 제 손으로 뭘 생산해보기는커녕 책상물림으로 법전이나 살펴보던 특검이... 사이코패스 재벌이 왠지 친숙한 이유 이승한 (칼럼니스트) 옛날이야기로 시작해보자. 2000년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가 개봉했을 때만 해도 영화에 공감하기 어렵다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젊고 잘생겼으며 학벌 좋고 돈도 잘 버는, 성공한 상류층 백인 남성 패트릭 베이트먼(크리스천 베일)이 툭하면 살인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설정 자체가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패트릭 베이트먼은 친구의 명함이 자신 것보다 더 근사하다는 이유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도끼를 휘두른다. 자기가 실패한 레스토랑 예약을 친구가 성공했다는 이유로 죽인다. 나아가서 ‘그냥’ 사람을 죽인다. 모든 걸 다 가진 청년이 뭐가... 정직한 자본가? ‘못 찾을걸요” 이승한 (칼럼니스트) 2010년 초, 배우 김명민의 팬덤은 일대 소란을 겪었다. 차기작을 고르던 김명민이 검토하고 있다는 신작의 시놉시스가 어딘가 탐탁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개발의 광풍이 전국을 휩쓸던 1970~1990년대 건설 현장을 배경으로 맨주먹으로 일어선 한 남자의 성공담”이라는 시놉시스 한 줄 요약은 어딘가 불온해 보였다. 건설회사 사장이었던 이명박을 일약 샐러리맨들의 우상으로 만들고 정계까지 입문하게 만든 KBS 〈야망의 세월〉 (1990)과 지나치게 닮아 보인 게 문제였다. 하필이면 YTN, 연합뉴스, KBS, MBC가 각각 친M... 현실에도 드라마에도 신화는 없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트렌디 드라마 속 재벌 2세 주인공이 주는 달콤한 환상으로도 시대 전체가 느끼는 불안을 감출 수는 없었다. 개인의 삶은 여전히 고용불안과 무한경쟁의 정글로 내쳐진 상태였다. 국가가 IMF 관리 체제를 극복했다고 말하며 샴페인을 터뜨리던 시절, 사람들은 서서히 나의 행복과 국가·기업의 행복이 서로 무관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내 삶은 변함없이 고통스럽고 불안한데 고통을 분담하자던 재벌들은 나날이 승승장구했다. 2000년대 중반쯤 들어서면, 트렌디 드라마 속 재벌 2세 또한 천천히 ‘실장님’이나 ‘본부장님’처럼 혈연 ... 어른을 위한 동화 속 재벌 이데올로기 이승한 (칼럼니스트) 트렌디 드라마 속 재벌 2세 서사라고 해서 시대의 불안이 반영되지 않은 건 아니다. 재벌 2세 서사가 어떤 식으로 왕위 계승 서사를 빌려왔는지 살펴보자. 제 영지에 있던(유학 중이던) 왕자(재벌 2세)가 말을 달려 왕궁으로 돌아올 때에는(귀국)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부왕(그룹의 오너)은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간신들(회사 내 주인공에게 적대적인 이사들)의 말에 자꾸만 현혹되고, 백성(직원)들은 외침에 시달리거나(적대적 M&A 시도) 먹을 게 없어 주린 배를 붙잡고 운다(정리해고 위협). 왕자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백성들의... 드라마엔 착한 재벌 현실엔 사악한 재벌 이승한 (칼럼니스트) 재벌 2세, 3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자리, 국내 굴지의 대기업 총수라는 사람들의 입에선 뻔히 예상했지만 듣고 싶지 않았던 말들이 튀어나온다. “전 모르는 채로 진행된 일입니다. 보고받은 적이 없습니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에, 그게, 모르겠습니다”. 12월6일, 박근혜 게이트 관련 국정조사 자리에 불려 나온 대기업 총수들은 뇌물 증여 혐의를 비롯한 각종 의혹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계속 무능을 연기했다. 회삿돈 수십억원이 막후 권력자의 주머니로 왔다 갔다 하는데 그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기업 회장, 무엇을 물어봐... 현실의 물길 위에 영화의 뱃길이 지난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영화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베테랑〉 〈내부자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번외편으로 영화 이야기다. 아래에서부터의 변혁에 대한 냉소는 스크린에서도 진행됐다. 물론 이 또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이들의 에너지가 응집되던 2012년 대선 전후까지만 해도 이야기가 좀 달랐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육체와 영혼의 존엄이 산산조각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청년 김근태의 삶을 그린 〈남영동 1985〉(2012)나, 임금보다 더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정치를 펼친 광대의 서사를 그린 ... 금수저들 잔치에 흙수저는 없네 이승한 (칼럼니스트) 박경수 작가 ‘권력 3부작’의 최종작인 SBS 〈펀치〉(2014~2015)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지난 회 지면에서, 대중문화 콘텐츠 속에서 정치적 냉소가 퍼져가는 과정을 살펴보며, 나는 희망을 이야기했던 작가가 불과 1년 뒤에 선보인 차기작에서는 절망의 극한을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박 작가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평범한 이웃들의 활약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로 정의가 실현된 세상을 〈추적자 더 체이서〉에서 그렸다. 하지만 악인이 되어서라도 황금의 제국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었으나 끝내 금수저들을 이기지 못하고 파멸한 흙수저... 희망을 이야기하던 작가가 그린 절망 이승한 (칼럼니스트) 사과로 시작해야겠다. 나는 작가 임성한의 작품 세계를 다룰 때, 무속과 빙의와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찬 그의 후기작들을 언급하며 현실성이 없는 황당무계한 세계로 도망가는 전개라고 비판했다. 이제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겠다. 그동안 놀림거리였던 대통령의 언어생활, 이를테면 “혼이 비정상”이라거나 “온 우주가 도와” 뒤에 ‘빨간 펜 선생님’ 최순실씨에 대한 대통령의 맹신이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개성공단 폐쇄나 북한 붕괴론, 사드 배치 등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줄 알았던 수많은 정책에 최순실씨의 ‘신통한 견... 백마 타고 나타난 초인적 가부장? 이승한 (칼럼니스트) SBS 〈신기생뎐〉(2011)의 주인공 단사란(임수향)의 불행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가부장제에서 출발한다. 생부 금어산(한진희)은 생모 한순덕(김혜선)과 하룻밤을 보낸 뒤 한순덕을 책임지지 않는다. 무책임한 양부 단철수(김주영)와 허영심 많은 계모 지화자(이숙)는 사란에게 기생이 될 것을 강권한다. 사란이 살아온 세계에서 남성·가장은 권위만 누리며 그 책임은 행사하지 않는 무기력한 폭군들이다. 그렇다면 사란의 운명은 어떤 식으로 구제되는가. 자신과 사귀네 마네를 놓고 드라마 내내 줄다리기를 했던 부잣집 도련님 아다모(성...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의 완성자 이승한 (칼럼니스트) ‘막장 드라마’라는 단어를 들을 때 누구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가? 누군가는 서영명(SBS 〈이 여자가 사는 법〉, MBC 〈밥 줘〉 등)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문영남(KBS 〈소문난 칠공주〉, SBS 〈조강지처 클럽〉)을 떠올리겠지만, 그럼에도 이 장르를 상징하는 지배적인 이름은 역시 임성한이다. 1998년 MBC 〈보고 또 보고〉로 스타 작가 반열에 들어선 뒤 2015년 MBC 〈압구정 백야〉로 은퇴를 선언하기까지 17년간 임성한은 매번 허를 찌르는 소재를 들고 와 보는 이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겹사돈(〈보고 또 보고〉),... ‘김수현 월드’의 가부장제는 단순하지 않다 이승한 (칼럼니스트) 지난 회에서 김수현 작가가 가부장제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는 동시에 체제의 개선을 요구해온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작품 속 세부 묘사를 통해 김수현의 진단과 처방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잠시 SBS 〈인생은 아름다워〉(2010)에서 묘사된 태섭(송창의)의 커밍아웃 과정을 보자. 태섭은 3대가 모여 사는 제주도 양씨 일가의 장손이다. 사진작가인 애인 경수(이상우)와 조심스레 사랑을 키워가던 어느 날 태섭은 이복동생 초롱(남규리)에게 경수와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들키게 된다. 초롱... '김수현 드라마’는 개혁적 보수? 이승한 (칼럼니스트) SBS 주말극 〈그래, 그런 거야〉(2016)가 지난 8월21일 54회로 종영했다. 당초 60부작으로 알려진 작품이었다. 방송사 측은 리우 올림픽 중계를 위한 회차 조정이라고 밝혔지만, 세간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그래, 그런 거야〉는 광고 판매율이 20%가 채 안 된 것으로 알려졌고, 회당 1억5000만원가량의 적자 폭을 남긴 것으로 추산된다. 단순히 리우 올림픽이 문제였다고 이야기하기에는 가혹한 수치였다. 단순한 흥행의 문제였다면 그래도 화제가 덜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래, 그런 거야〉를 집필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