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으로 읽는 우리 음식 그때나 지금이나 음식 노동은 고되었다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화제가 이렇게 붙었다. ‘밥 푸며 상 놓는 모양.’ 딱 그림 그대로다. 19세기 조선에 온 외국인에게 인기가 높았던 화가 김준근의 그림이다.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 없는 19세기 말 조선 사람의 부엌이다. 막 밥을 푸고 상을 놓고 있다.부엌은 사람이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친 지난 1만 년의 일상사를 아로새긴 공간이다. 정겨운 한편 엄숙한 살림살이의 중심이다. 그릇, 접시, 잔 벌여 끼니를 차리고 상을 놓는, 사람 뺀 다른 동물은 하지 않는 고도의 문화적 행위 또한 여기서 시작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읽기’가 필요할 기어코 겨자장에 민어회를 먹으려고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쌍돛을 한껏 펼쳤다. 돌고 있는 물레는 지금 닻줄을 감는가 푸는가. 사람 반신은 족히 넘을 듯한 지름의 물레 다루기가 만만찮을 테지. 사내들은 한참 삿대를 버티고 있다. 강류와 직각을 이룬 뱃전으로 물결이 부서진다. 분주한 가운데 거룻배는 제 볼 일 본다고 고깃배에 붙어 있다. 거룻배에 실린 독 하나는 젓독, 하나는 소금독이다. 조선 후기에 점점 쓰임이 늘어난 조기젓·준치젓·밴댕이젓·새우젓 등은 고깃배에서 바로 받아 그 자리에서 소금 질러 갈무리했다. 질박한 젓독, 소금독이야말로 조선 후기 어업 부가가치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강의 미원의 원조 아지노모토의 조선 점령기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미원’의 원조 조미료인 아지노모토(味の素)는 시작부터 기세등등했다. 발매하자마자 광고를 통해 아지노모토가 제국의 영광만큼이나 영광스러운 제품이라고 윽박질렀다. 이학과 공학에 힘입은 이 제품이 제국 기술력의 상징이라고 뽐내기도 했다.1909년 세계 최초로 일본에서 발매한 뒤, 1910년 조선에 발을 디딘 이후로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전까지 줄곧 조선에서 가장 손이 큰 광고주가 아지노모토 사(社)였다. 아무렇게나 뿌려댄 것도 아니었다. 일상생활의 세목 곳곳에, 그야말로 촘촘한 계산을 하고 또 해서 아지노모토를 광고했고, 그 광고는 일본인이 기록한 뜻밖의 조선 음식 백서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기록이라는 것은 원래 그 당시 너무 당연한 일은 적지 않는다.” 중국사 연구의 거장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의 한마디다. 이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어느 시대의 당연한 일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소중한 것이다. 그것을 모르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없고, 무리하게 알려고 하면 거기에서 터무니없는 오해가 생기게 된다(〈구품관인법의 연구〉 임대희 외 옮김).”음식에서 좀 더 깊은 의미를 밝힐 단서가 될 기록은 태부족이다. 가령 기억만으로 짜장면 역사를 재구성하고 말면 끝장에 가서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그만인 말잔치만 남는다. 우리가 먹는 오징어가 꼴뚜기였다고?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평창 동계올림픽이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2월10일 북측 고위급 대표단과 문재인 대통령의 만남은 좋은 조짐이었다. 먹을거리 화제가 분위기를 더욱 화기애애하게 했다. “오징어와 낙지는 남북한이 정반대더라”라는 임종석 비서실장의 말에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그것부터 통일을 해야겠다”라고 받아 웃음이 터졌다고 한다.궁금해서 2000년에 한국에 정착한 함경도 출신 윤종철 요리사에게 문자 메시지로 물어보니 단박에 답이 왔다. “북한에선 오징어를 낙지라고 합니다. 갑오징어는 그냥 오징어라고 합네다^^.”함경도 사나이로부터 직접 설렁설렁한 맛 괄시하지 못할걸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어여차, 이거 무던하다, 이 더운데 설렁탕만 먹는 사람들도 있나.” 설렁탕 잔뜩 올린 목판을 받쳐 든 이가 한 손으로 자전거를 몰고 배달 길에 나섰다. 위태위태하던 배달 자전거는 아니나 다를까, 마침 마주 오던 ‘구루마’와 맞부딪친다. 만화 첫 칸에서 헤아려보니 열 그릇도 넘어 보이는 설렁탕 뚝배기가 그만 “깨박을 치고” 만다. 박살이 났다는 소리다. 배달부는 분풀이로 손수레를 뒤엎는다. 〈조선일보〉 1925년 8월19일자 연재만화 ‘멍텅구리’의 ‘설렁탕 배달’ 편이다.날 추우면 더 생각나는 설렁탕이지만 그때 식민지 조선의 경성 장대낚시든, 손낚시든 걸려야 할 텐데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난다. 그림 속 두 사람의 옷차림이며 방한구 따위는 오늘날과 그 모습이 다르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느라 양반다리를 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한 군데를 응시하는지는 알 만하다. 화제(畵題)를 읽으며 다시 빙긋 웃는다. ‘얼음 위에 낚시질하는 모양.’한 세기 전 얼음낚시 모습이다. 이렇게 얼음 구멍을 내고 하는 낚시를 ‘얼음치기’라고 한다. 어른 남성 둘이 다리 짧은 평상을 나란히 하고 앉아 얼음치기에 온통 집중하고 있다. 물은 꽝꽝 얼어붙었다. 평상 다리에 날을 달면 앉은뱅이 썰매 노릇도 한다. 무 ‘굽고 싶은 거리’에서 읊는 시 한 수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술잔과 젓가락 늘어놓고 온 동네 사람과 모인 자리(杯箸錯陳集四隣)/ 버섯과 고기가 정말 맛나네 (香蘑肉膊上頭珍)/ 늘그막의 식탐이 이쯤에서 다 풀리겠냐만 (老饞於此何由解)/ 푸줏간 앞에서 입맛만 다시는 사람 꼴은 되지 말아야지(不效屠門對嚼人)”-성협(成夾)의 ‘야연(野宴)’ 속 시구그림에 딸린 시 한 수에 웃음이 난다. 문득 서울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를 ‘굽고 싶은 거리’로 불러야 한다는 지인의 농담이 스친다. 길 따라 늘어선 고깃집은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고기를 굽겠다는 사람들로 늘 가득하다 추웠다 더웠다 해도 떡은 끄떡없지요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사람이 연호를 셈한 이래 격동의 한 해 아닌 해가 있었을까. 92년 전에도 지구는 격동 중이었다. 1926년 6월10일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 행렬은 시위와 동맹휴학으로 번진다. 연말에는 나석주 의사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를 습격해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한다. 게다가 당시 일본 경제는 공황의 목전에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일제는 국가보안법의 전신인 치안유지법을 빼어든다. 마르크스 사상을 공부하던 교토 제국대학, 도시샤 대학 학생들이 첫 희생양이었다. 반제국주의 운동에 대한 사법 폭력의 수위가 달라질 것임을 예고한 셈이다.그 ‘면스플레인’의 역사를 아세요?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겨울은 냉면의 계절이다. 이렇게 말하면 버럭 하실 분도 있으리라. 여름이야말로 냉면 제철 아니냐고. 아무려면 어떠랴. 나 또한 여름에는 벌컥벌컥 육수 들이켜는 맛에, 겨울에는 볼이 터지게 국수를 입에 담고 몸 부르르 떠는 맛에 냉면을 찾는다. 봄가을에는 날씨답게 담담하고 슴슴한 냉면이 각별하다.겨울 냉면이 제철이라는 이야기는 꽤 오래 전부터 나왔다.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는 냉면을 동짓달의 별미로 기록했다. “메밀 면을 무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썰어 넣은 것을 냉면이라고 한다. 평안도의 냉면이 제일이다 물같이 연하고 고기보다 맛있는 김치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입동이 지나면 ‘꼼짝할 수 없는 본격적 겨울’이 닥친다. 81년 전 신문에 따르면 김장과 솜옷 준비가 당장 큰일이다. 겨울나기 음식 문화 가운데 하나인 김장 김치는 한국인의 오랜 문화다. 삼국시대의 편린에 기대 김치 역사 3000년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매일신보〉 1936년 11월7일자는 신문 5단을 할애해 김장을 다룬다. ‘시세’는 그 중심에 있다. 이때 한반도 북부에서 서울로 공급되는 배추, 특히 평양 배추에 대한 평가가 눈에 띈다. “그중에 평양 배추가 속 잘 들고 싹싹하여 맛이 있습니다.” 속이 든다니, 속이 안 차는 배추 교양인가 ‘현대 여성의 악취미’인가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창 밖에 눈이 내린다. 의자 위에는 초콜릿이 놓여 있다. 싸늘한 기운을 이기기 어려운 계절, 밖으로 나가기보다 방 안에서 한숨 돌리고 싶은 마음에 파고든 광고. 1929년 12월19일 〈매일신보〉에 실린 ‘모리나가 밀크 초콜릿’ 광고가 이랬다. 첫 광고 문구가 말한다. “계절의 보건은 열량의 보급으로.” 초콜릿 한 조각이 찬바람 이기는 데 더할 나위 없단다. “혈행을 좋게 하고 원기를 왕성하게 하는 풍부한 열량의 원천!” 깨알 같은 설명에 따르면 광고 속 5전짜리 초콜릿의 열량은 2160Cal란다.오늘날이라면 식품 광고가 열량을 강 잘 익은 물김치 같은 꽃게장이라니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꽃게와 가오리가 물밑 마실에서 마주친 모양이다. 꽃게 눈은 뻗고, 가오리 눈은 벙긋하다. 날개와 꼬리에 감도는 떨림이 가오리의 곤두선 신경을 여실히 드러낸다. 꽃게도 마찬가지다. 지나가는 이웃인지 나 잡아먹을 놈인지, 순간 가려야 할 테지. 도화서 소속 화원 장한종(張漢宗, 1768~1815)이 남긴 〈어개화첩(魚介畫帖)〉 속 한 장면이다. 전통 시대에 물고기와 갑각류 등 수중 생물을 소재로 한 그림을 ‘어해도(魚蟹圖)’라고 한다. ‘어해도’는 다산과 출세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게 그림은 과거 시험의 1등을 뜻한다. 게의 입속에 넣는 보석을 냉장고에 얼려 죽이다니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무엇을 그렸는지 두말 필요 없다. 오른쪽 위의 화제(畵題)만 좀 어렵다. ‘타병지형(打餠之形)’, 곧 ‘떡메질 하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그 아래 붉은 낙관이 그림 그린 이를 드러낸다. 기산(箕山). 19세기 말 화가 김준근의 호다. 기산의 그림에서, 사람은 산수와 풍경의 일부가 아니다. 사람이 하는 구체적인 일과 일하는 사람의 몸짓이 그림의 초점이다.마주 선 두 사내가 너 한 번, 나 한 번 메질한다. 사내 둘만으로는 안 된다. 메질이 고루 먹도록 메질 먹는 덩이를 잘 뒤적여 메질 떨어질 자리로 재빨리 몰아주고 손을 빼야 한다. 100년 전 광고로 본 중산층 가족의 하루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100년 전 현대 신사의 하루가 이랬다. 1922년 5월 어느 날 정릉물산(井菱物産)에서 일하는 선임 사원 운야호삼(運野好三)은 전날 벌어진 회식 탓에 늦잠을 잤다. 일어나 세수하러 달려간 운야는 양치질부터 시작한다. 급한 중에도 치약은 외제 치약 콜게이트(Colgate)가 아니라 국산 라이온이다. 오해 말자. 1922년이면 아직 제국 시대 아닌가. 여기서 국산은 일본제다.출근길의 애프터셰이브는 1914년 발매된 일본 화장품 레이트푸드 (Laitfood·レートフード)다. 면도만으로 신사의 체면이 서겠는가. 아내 애자(愛子)는 오리지 임금님 타락죽에서 치즈 창난젓까지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한국인은 흰 우유만 138만4000t을 마셨다. 유제품이 들어가지 않은 빵·과자류, 빙과류는 거의 없다. 크림과 치즈 제품은 어린이의 인기 간식이다. 1902년 프랑스인이 홀스타인 종 젖소를 서울 신촌역 부근에서 사육한 이래의 엄청난 변화다.유목 문화권에서는 1년 내내 새끼 낳고 젖을 내는 암소, 암양, 암말 등을 대했다. 분만 뒤 열 달이나 젖을 내는 젖소가 오랜 세월을 거쳐 선별되다 품종까지 이루었다. 대표적인 젖소 품종인 홀스타인 육종 역사는 2000년에 이른다. 유목 문화권과 달리 한반도 우리 조상 “대한제국 궁내부 조달!” 그 시절 맥주 광고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可飮可飮可飮麥酒. 不飮麥酒者非開化之人.” 1903년 3월30일 충무로의 잡화점 구옥상전이 〈황성신문〉에 낸 광고 문안의 시작이 이렇다. “마시기 좋고, 좋고, 또 좋은 맥주. 맥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개화한 사람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대한제국 궁내부 조달, 일본제국 궁내성 조달’이라며 한국 황제와 일본 황제가 마시는 맥주임을 강조한다.오늘날이라면 인기 높은 연예인이 한 모금 꿀꺽하고 “아, 시원해!”라며 내뱉음직한 자리에 ‘개화’라든지 ‘제국’ 같은 말이 들어앉았다. 왕조의 시대 아닌가. 정치적 위력이 연예인의 매력에 맞먹 엿을 이렇게 그냥 둘 겁니까?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사내 둘이 마주보고 가락을 내느라 열심이다. 왼쪽 사내는 버티고, 오른쪽 사내는 막 힘을 쓸 참이다. 작업물에 땀 떨어질세라 두 사내는 머리끈을 동였다. 그 아래로 물건에 지저분한 것 묻지 말라고 받침대도 받쳐두었다. 받침대 위에는 우리 눈에 익숙한 물건이 보인다. 틀림없는 엿가위이다. 두 작업자 너머의 사내도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작업대인 듯 진열대인 듯 보이는 간이 탁자 앞에 선 사내는 완성한 가래엿 등을 한참 정리하고 있다. 더벅머리 아이의 허리께에 언뜻 비치는 돈주머니가 인상적이다. 인상적이라니? 그림 오른쪽 맨 위, 그 MSG는 일본 ‘제국의 맛’이었다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1905년 부산에서 〈조선일보〉가 창간된다. 오늘날의 〈조선일보〉와 아무 상관없는, 일본인 발행인과 편집인이 만든 일본어 신문이다. 이 〈조선일보〉는 곡절을 거쳐 1907년 〈부산일보〉로 완전히 몸을 바꾼다. 이 역시 광복 후 창간되어 오늘에 이른 〈부산일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본인에 의한 일본어 신문이었다.일제강점기 〈부산일보〉는 야망이 있는 신문이었다. 대구에 지사를 두고, 경성·진주·목포·울산·마산·진해·대전 등에 지국을 두더니 차차 몸집을 불려 1940년대에는 일본·만주국·중국 본토를 아울러 총 116개 지사 및 지국 조선인이 먹는 양은 일본인의 곱절이었다 고영 (음식문헌 연구자) “한국에 관한 책을 쓸 때 그리피스는 발음만이 아니라 정보에서도 완전히 일본 놈들[Japs]의 영향을 받았음.” 1954년 11월25일 이승만 대통령은 임병직 주미 한국대사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윌리엄 그리피스(1843~1928년)에 대한 분노를 이렇게 터뜨렸다. 여기 보이는 ‘한국에 관한 책’이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코리아〉(Corea, The Hermit Nation)다.미국인 그리피스는 1870년부터 1874년까지 일본에 머물며 과학 교사로 일하는 한편, 통신원으로서 미국 언론에 일본과 동아시아 소식을 전하는 글을 썼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