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현대사 ‘머구리’ 기술 고향은 일본일까 조선일까 오창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기술에도 고향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술이나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고 이야기되었다. 기술과 자본은 중립적이며 냉혹한 계산에 따라 움직이기에 우열만 있을 뿐이었다. 한·일 갈등 이후 한국산과 일본산을 나누고 국적을 구분하는 세태를 보면 냉혹한 자본만 존재하는 세상이라는 게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였는지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이번에는 한국에서 흔히 ‘머구리’라고 부르는 헬멧식 잠수기 어업 기술의 전파에 관한 이야기다. 머구리는 ‘잠수’를 의미하는 일본어 ‘潛り(모구리)’에서 유래했다. 부산과 전남 여수에 있는 ‘잠수기수산업협동조합 명태 ‘밸따기’ 하던 그녀들의 노동 김만석 (독립연구자) 올해 초 명태가 강원도 고성 인근 바다에서 잡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었다. 대구를 잡기 위해 쳐둔 그물에 명태가 걸렸던 것이다. 2008년 어획고 ‘0’을 기록하면서 한반도 동해 바다에서 명태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는데, 10년 만에 명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2014년 해양수산부가 벌인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치어 방류와 양식 사업)가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둔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명태의 귀환’이 확실시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명태는 아직 되돌아오지 못했고 올해부터는 아예 명태잡이 자체가 전면 금지되고 있 이 작은 물고기에 깃든 역사 오창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멸치에도 역사가 있다. 멸치는 현대 한국인의 일상에서 가장 친숙한 물고기 중 하나다. 너무 흔하고 일상적이어서 별다른 관심이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만 지난해 유명 음식 칼럼니스트인 황교익씨가 삶아서 말린 멸치나 멸치로 우려낸 국물이 일본에서 왔다고 언급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멸치볶음이나 멸치육수가 일본인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다소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실제로 마트나 건어물 시장에 가보면, 멸치를 크기에 따라 ‘지리멘’ ‘가이리’ ‘고바’ ‘주바’ ‘오바’로 부르기도 한다. 이 같은 용어는 일본에서 유 어류학의 태두 정문기를 아시나요 김만석 (독립연구자) 아내의 할아버지는 남해공립수산실수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에 정착해 일가를 이루었다. 할아버지 자택은 영도의 남항 바로 뒤에 있었는데, 1980년대에 소금창고와 조그만 ‘점빵’을 할머니가 운영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살림살이를 꾸렸다. 할머니의 소금창고업은 1979년 한주소금이 등장하면서 제염공장과 더불어 쇠락해갔지만, 할머니 수완이 없었다면 5남매 자식들의 공부나 결혼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해방 이후 할아버지가 영도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수산검사소’에 근무했기 때문이다. 과거 정부기구에 근무한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한 비슷한 듯 다른 여정 오창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요즘 사람들은 음식에 관심이 많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전 세계를 누비는 여행객의 SNS, 텔레비전 프로그램, 음식 관광 정보를 담은 서적 등 음식 이야기가 이렇게 풍성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물론 맛있는 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열정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도 존재했다. 이런 일상의 입맛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은근하면서 강력한 힘을 경제와 정치에 미치고 있다. 역사학자인 페르낭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너무 평범해 관심을 갖지 않는 일상의 입맛을 자본주의 발전 경로를 설명하는 중요한 변수로 고려했다. 밀·밀가루·빵의 그들의 ‘추줍은’ 손이 바다에 배를 띄웠다 김만석 (독립연구자) 1971년생 한광식의 아버지(한진성, 1927~1988)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이다. 지병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남 장성 출신인 어머니가 이북식 김치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남쪽 김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부산 좌천동 산복도로에서 바닷바람을 받아내면서 산 것도 피란민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터이다. 그의 아버지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내려왔는지 전쟁 중에 피란을 왔는지는 불확실했다. 부산으로 피란 온 친척 어른한테 아버지가 중학생 시절 역도를 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한광식의 둘째 일본 제국주의와 조선의 도미 오창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도미다. 일본인이 일상적으로 먹는 물고기, 도미로 인해 이웃 국가를 지배하려는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이다. 물고기가 세계사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이는 세계사적 맥락에서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구가 대표적이다. 어부 출신 작가인 미국의 마크 쿨란스키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향신료를 찾아 나서기 훨씬 전부터 스페인 북서부 바스크 지방의 어민들은 캐나다 서부에서 이미 대구 어업을 하고 있었다. 15세기 한자동맹(유럽 내 도시들의 자유무역 공동체)이 유럽 내 청어 물고기 잡던 사내 물고기를 지키다 김만석 (독립연구자) 이윤길은 원양어선 선장이었다. 1959년 강원도 주문진에서 태어나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부모덕에 밥 굶는 일은 면하고 살았다. 가난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 원양어선을 타는 일이라고 믿은 그는 1975년 주문진수산고등학교 어업과에 입학한다. 1977년 뱃사람에게 여권이나 다름없는 ‘선원수첩’을 발급받았다. 그는 어선 면장(5급 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1979년 남아메리카 북부 수리남공화국의 새우 트롤선에 승선해 원양어선에 첫발을 들인다. 배고픔과 가난을 넘어 자유롭게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들뜨면서 말이다.배에 오 구례 운조루 잔칫날 해산물로 들썩들썩 오창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어민은 왜 거친 바다에 뛰어들어야만 했을까. 배를 타는 사람은 어쩌다 먼바다를 건너 잘 모르는 지역까지 가게 되었을까. 바다와 인간의 관계를 규정했던 더 큰 문화를 생각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유럽의 탐험가와 상인들이 초콜릿, 커피, 차 같은 기호품을 찾아 아주 오래전부터 바닷길을 항해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현대 글로벌 자본주의의 기원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카페에 앉아 커피나 차 등을 마시는 개인적인 행위가 거대한 자본주의의 소용돌이를 만든 원동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물론 우리의 해녀 박말애는 바다로 돌아갔을까 김만석 (독립연구자) 겨울바람을 맞으며 부산 영도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 도서관에 간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영도의 수산시험장에서 우치다 게이타로가 주도해 기록한 조선의 물고기 은판사진 아카이브 책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국 어류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정문기는 〈한국어도보 (韓國漁圖譜)〉(1977)에서 우치다에게이 자료의 사용 허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 책은 우치다의 물고기 은판사진 아카이브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다’나 ‘물고기’에 관한 지식이 식민지 학지에 의존해왔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현장’에 밀착해 조사 과정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