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사랑한 문화재 이야기 황룡사 터에서 고고학이 일어섰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당시, 드넓은 경주평야 한가운데에 건축되었던 거대한 사찰이다. 규모로나 위계에서 신라 제일의 절이었다. 진흥왕은 당초(재위 14년째인 553년) 그 자리에 새로운 대궐을 지으려 했다. 돌연 황룡이 출현하는 바람에 대궐을 사찰로 바꿔 건설했다. 세월이 흘러 선덕여왕 시대(재위 12년째인 643년)에 승려 자장율사가 황룡사에 구층 목탑을 세우자고 제안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나라 유학 시절 자장 앞에 출현한 신인(神人)이 ‘황룡사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거나 조공하게 되어 왕업이 태평... 연못에서 물을 빼자 신라가 드러났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신라시대 천년 왕성 월성의 동쪽에 자리 잡은 안압지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 건설한 연못이다. 당시에는 월지(月池)라 불렀다. 안압지 주변에는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가 거주하는 공간인 동궁이 있었다. 군신이 함께 연회를 즐겼을 임해전도 있었다. 신라가 고려에 흡수되어 왕국의 영화가 사라진 뒤 안압지는 황량한 연못으로 방치되어왔다. 못을 둘러싼 테두리도 세월의 더께에 묻혀 온데간데없었다. 1971년 경주관광개발종합계획이 수립되던 당시 안압지는 주요 개발 대상 유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 박정희가 물었다 “금관이 나올까?”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금관을 매우 좋아했다. 경주관광종합개발 실무단 측이 박 전 대통령의 이런 성향을 자극해서 고분 발굴 작업을 좀 더 용이하게 만들기도 했다.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한창 수립 중이던 1971년 6월 말~7월 초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경주 개발 실무단의 일원인 정재훈 당시 문화재관리국 사무관이 청와대 상황실에서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가 강조한 부문은 ‘고분 발굴’이었다. 고분 관련 인력은 물론 고고학 전문가 자체가 희귀했고 발굴 노하우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매우 ‘담대한’ 계획이었다. 또한 정재훈은... ‘황남대총 파라’고 한 간 큰 사람은?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황남대총은 경주시의 신라 시대 고분 가운데 가장 큰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 한반도를 통틀어 최대 고분이기도 하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뻗은 두 개의 봉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너비가 동서 80m, 남북 120m에 달한다. 높이는 남쪽 봉분이 23m, 북쪽 봉분은 24m다. 적석목곽분은, 시신과 장신구 등을 넣은 나무 덧널 위에 돌을 쌓은 다음 흙으로 덮은 형태의 무덤을 이르는 명칭이다. ‘돌무지 덧널무덤’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마총 역시 적석목곽분이다. 워낙 거대한 고분이었기 때문에, 관련 기술이 미숙했던 1970년대 초... 낮은 포복으로 기자들이 기어왔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경주관광개발계획이 시행 중이던 1970년대 중반, 발굴단원들만큼이나 바쁘고 긴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기자들이었다. 당시 〈한국일보〉 우병익 기자(현재 83세)는 다른 언론사 기자들과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특종 경쟁을 벌였다. 특히 〈조선일보〉의 경주 주재 기자와는 사생결단 수준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터였지. (박정희) 정권은 정국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데 고고학 발굴을 이용했고, 언론은 언론대로 문화재 특종 경쟁에 휩싸였다. 그러다 보니 오보(誤報)도 엄청나게 쏟아졌어.” 당시 〈한국일보〉는 문화재 취재 부문에서 다른... ‘나오지 말았어야 할 유물’을 수습하는 방법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시사IN〉 제476호에서 1973년 8월 경주의 발굴단이 천마총 내부의 목곽에서 무덤 주인의 ‘장니(障泥)’를 발견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장니란, 말의 발굽에서 튀는 흙을 막기 위해 안장 밑으로 늘어뜨려 놓은 판이다. 당연히 좌우 한 쌍으로 이루어졌다. 좌우의 장니에는 각각 천마도가 그려져 있었다. 좌우로 한 쌍인 장니 두 세트가 아래위로 포개졌으니, 발굴단은 모두 네 점의 천마도를 발굴해야 했다. 발굴단은 먼저 가장 위에 있던 천마도 장니를 “숨죽여” 걷어내 수납함에 넣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한숨을 돌렸지만, 천마도 ... 나와서는 안 될 유물 천마도가 나와버렸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청와대가 천마도(天馬圖)엔 통 관심을 안 보였나요?” 천마총 발굴 당시 조사보조원이었던 윤근일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과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에게 물었다. 두 사람의 대답은 비슷했다. 최 교수는 “에이, 그 사람들이야 번쩍번쩍한 걸 좋아하잖아? 금관 말고는 관심이 없었어. 천마도는 솔직히 학자들이나 좋아하고 관심을 보였지, (청와대가) 금붙이 아닌 건 관심도 없었어”라고 말했다. 좀 뜻밖이었다. 천마도 발굴이야말로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의 가치를 지닌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천마총 발굴은 1973년 4월6일, 위령제를 올리... “무덤 파는 게 기분 좋은 건 아니지만”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천마총 발굴조사단 단장은 그 유명한 문화재관리국 김정기 실장이었다. 단원들도 모두 특이한 경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사실상 부단장 격이었던 김동현 문화재전문위원은, 경주와 서울을 오가야 했던 김정기 단장을 대신해 현장에 상주하는 책임을 졌다. 김동현은 이후 김정기 소장과 장경호 소장에 이어 제3대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맡게 되는 참으로 드라마틱한 인물이다. 경주 개발 초창기에는 김정기 단장을 보좌하다가, 중반기의 황룡사 터 발굴 당시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을 물려받는다. 김동현은 한양대 건축공학과에서 고건축(古建築)을 전공했... “금관 빨리 파라, 각하께 갖고 가게”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1973년 7월인가 금관이 나왔을 때 신문에 나니깐 청와대에서 가져오라 그러더라고. 김정기 박사한테 가져갈 수 있느냐 물으니, 필요한 조사와 기록을 다 마친 뒤에 들어내어 가져갈 수 있다고 해요. 저녁에 출발했어요. 자동차 사정이 좋지 않은 시대여서 차를 두 대 가져갔어요. 금관 실은 차 한 대, 호송차 한 대. 금관 실은 차가 대구쯤 오다 고장 났어요. 뒤에 오던 차에 (옮겨) 싣고 청와대에 들어가니 (오전) 8시가 안 되었어. 경호실 사람들도 출근하지 않았어. 들어가도 괜찮다고 해서 안에 들어가니 대통령 혼자 앉아 계셔요... 경주 복원 지휘한 한국 고고학의 아버지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지난해 8월26일 저녁 7시30분 서울 은평구 신사동의 한 주택에서 한 노인이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향년 85세. 그는 ‘한국 문화재 부문의 박정희’라고 불려 마땅한 인물이었다. 철권통치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어쩌면 평범한 고고학도요 고건축학자에 지나지 않을 그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노골적으로 챙길 정도였다. 그도 이 같은 박정희의 ‘애정’에 충분히 보응했다. 이 고고학도이자 고건축학도는, 10·26 이후에도 박정희를 회고할 때마다 ‘각하’라는 호칭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창산(昌山) 김정기다. 박정희만큼 논란이 많은 한국... 박정희에게 경주는 특별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활성 단층대 위에 놓인 경주는 요즘 계속된 지진으로 불안한 상황이다. 관광객도 크게 줄어든 것 같다. 온통 학생들로 들썩이던 수학여행의 계절인데도 불국사나 석굴암, 대릉원, 첨성대 등의 주변이 한산하다. 음식점 주인들은 한숨만 쉬고 숙박업소마다 빈 객실이 넘쳐난다. 경주를 한국의 대표 관광도시로 키우려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재의 광경을 보면 어떤 심정일까?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 일정은 KBS 당진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이었다. 그런데 이틀 전인 10월24일에 경주 보문관광단... 박정희의 황당 지시 “왕성 터에 호텔 지으라”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1979년 1월6일, 당시 석간이던 〈동아일보〉 1면에는 ‘부산·경주에서 신정 연휴 보내’라는 제목으로 1단짜리 박정희 대통령 동정 기사가 실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두 영애(令愛) 그리고 영식(令息) 지만 생도 등 가족과 함께 부산과 경주에서 신정 연휴를 보낸 뒤 5일 오후 상경했다.” 박정희의 신정 연휴 행적도 구체적으로 보도되었다. “박 대통령은 경주에서 황룡사터 발굴 현장 분황사 석탑 등 고적을 둘러보고 보문관광단지 현장도 살펴봤다.” 그의 동선과 관련된 사진도 게재되어 있다. ‘경주코오롱호텔 쇼핑센터에 들러 기념품을 ... 어이쿠! 이거 다시 덮어야겠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박근혜 정부가 과감히 파헤치고 있는 신라의 천년 왕궁 월성을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반달 모양의 지형이다. 그래서 ‘달 월(月)’자를 붙여 월성(月城)이라 부른 것이다. 이미 신라 시대부터 그렇게 불렀다. 다만 보름달이 아니라 반달에 가까우므로, 조선 시대 이래 일각에서는 반월성으로 부르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이듬해부터 실행에 들어간 바 있다. 월성도 이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월성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해 건물터를 노출시킨 다음, 1976년부터 ‘복원이 가능하면 복원한... 천년의 비밀 찾기 ‘속도전’이 정답일까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지금 경주는 파헤쳐지고 있다. ‘천년 왕성(王城)’이라는 월성(月城)도 마찬가지다. 기록적이라는 무더위 와중에서도 삽질은 멈출 기미가 없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시행하는 월성 발굴 조사 현장에 동원되는 인부만 매일 100~150명을 헤아릴 정도니, 그 발굴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월성 같은 이른바 ‘관급’ 발굴 현장에서는 하루 노임(8시간 기준)이 5만4000원이다. 인부들을 감독하는 발굴반장은 5만9000원. 굴삭기를 쓰는 데는 하루 40만원이 든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월성 ...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를 망가뜨리는 박근혜 정부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일제강점기 이후 경주를 지탱한 힘 중 하나가 학생들의 수학여행이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정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시작해 그 정권이 끝나는 시점까지 추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은 경주를 역사도시를 넘어 관광도시로 한 차원 높인 계기가 되었다. 이 개발계획을 통해 경주에는 비로소 보문단지가 생겨났다. 국제회의도 두 ‘박통’이 추진한 경주 국책사업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박정희 시대 대한민국 수도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겨냥한 대한민국 ‘정신의 수도’는 경주였다. 그의 집권기에 남북한은 그야말로 사투에 가까운 정통성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역사 부문에서는, 북한이 고구려를 앞세운 데 비해 남한은 ‘신라 중심주의’로 부를 만한 사관을 시종일관 견지했다. 이런 사관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이 한민족이 하나로 되는 발판을 대통령이 경주 개발에 적극적인 이유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경주는 지금 온통 발굴 현장이다. 경주 시내 남쪽 월성(신라의 천년 수도 월성이 있었던 곳)처럼 훼손 위험 등으로 인해 예전에는 감히 발굴하지 못했던 곳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다. 신라 왕성(王城)의 구조를 확인한다며 굴삭기를 동원해 시루떡 떠내듯이 표토(表土)를 걷어내는 중이다. 성벽 바깥을 두른 도랑 겸 방어 시설인 해자(垓字) 구역 역시 발굴 과정에 충무공을 사랑한 아버지와 딸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유교 윤리 측면에서 볼 때, 왕조 국가와 근대 국민국가는 그 중심 가치가 판이하다. 왕조 국가의 중심 가치가 효라면, 근대 국민국가의 그것은 충이었다. 물론 이전의 왕조 국가들이 ‘효’ 못지않게 ‘충’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가치는 표리를 이루면서 사이좋게 지내기보다 수시로 격렬하게 충돌하곤 했다. 또한 이럴 때마다 언제나 효가 승리 광화문 현판이 ‘박정희 글씨’였다고?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광화문은 조선왕조 법궁(法宮:임금이 사는 궁궐)인 경복궁의 정문이자 남문이다. 지금 시민들이 보는 광화문은 1395년(태조 4년)에 창건된 그 모습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다시 해체·이전되는 수난을 겪었다. 1968년에 복원되긴 했으나 옛 모습과 상이한 철근 콘크리트 구조인 데다 위치도 두 박 대통령이 사랑했던 곳, 경주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집권 4년차인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문화재 현장을 최소한 세 번 찾았다. 2013년 5월4일 숭례문 복구공사 완공 기념식, 지난해 9월7일 경주 월성 발굴 현장에 참석한 데 이어 올해 3월18일 아산 현충사를 방문했다. 물론 세 차례 방문을 근거로 박근혜 대통령이 우리 문화재에 유별나게 애착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역대 한국 대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