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복직자, 매일 지연이자만 60만원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간에 농양이 생겼다. 갑작스러운 어지러움과 오한 그리고 고열이 발생했다. 코로나19를 의심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응급실에 실려 갔지만 하필이면 주말이다. 조금 더 큰 병원으로 다시 구급차에 올랐다. 결국 중환자실에 격리 입원했고 다행히 다음 날 깨어났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 얘기다. 코로나 검사는 음성으로 나왔고 검진 결과 간에 고름이 생겼다고 했다. 한 달 전 주말은 그렇게 숨 가쁘게 지나갔다. 10년 전 담석증으로 인한 큰 수술 이후 가족들은 언제나 노심초사한다. 밤늦은 전화는 반갑지 않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지경이다. 올해는 아 아~ 아, 골리앗이여 한진중공업 깃발이여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그날은 야간 근무였다. 아침에야 퇴근했고 오후 2시쯤에는 잠을 자고 있었다. 급하게 아내가 깨웠다. 텔레비전 뉴스 자막으로 어떤 이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2003년 10월17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김주익 지회장의 죽음. 화면만 봤다. 그해는 노동자들의 자결과 죽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는 며칠 동안 근조 리본을 단 노조 간부 하나 볼 수가 없었다. 민주노총은 총파업 결의를 포함한 투쟁을 준비하면서 각 기업 노조의 의견을 듣는 중이었다. 쌍용차 또한 입장을 내야 했고 대의원들의 의견 경비실 변기 위 전자레인지에 대한 명상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처음에는 전화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되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엔 매주 목요일 천막이 다닥다닥 붙은 정겨운 장이 선다. 채소와 밑반찬 가게에는 언제나 사람이 붐볐고, 돈가스 집도 꾸준히 성업 중이다. 유아복이나 다코야키 집은 지나칠 때마다 주인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니 재미가 덜했나 보다. 화분 가게는 어른들이, 튀김과 어묵 가게는 아이들이 붐볐다.그날도 채소 몇 가지와 두부, 노란 참외 한 소쿠리를 샀다. 경비실에 참외 하나를 놓고 나오는데 경비실 바닥에 눈길이 갔다. 변기 아래 바닥에 놓인 작은 연대하고 연대하는 빛나는 사람으로 살길…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걸어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산 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이 정리해고에 맞서 85호 크레인 고공농성을 벌이던 2011년 7월이었다. ‘희망버스’라는 운동이 시작됐고 우리 또한 해고 노동자로서 어떤 일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진정성이었다. 허투루 내뱉는 말 한마디 없는 사람의 행동은 때론 무서운 법이다. 동료들을 설득하며 평택에서 부산까지 9일 동안 400㎞ 넘게 무작정 걸었다. 오십 줄이 넘어 반백이 돼버린 해고자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여름 장맛비를 뚫고 부산을 향해 걷고 모진 탄압 받으며 삼성과의 전쟁 25년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좀이 쑤셔온다. 엿가락처럼 아이 개학도 늘어지고 있다.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 못해 이제는 질겁할 노릇이다. 노란 개나리도 새하얀 목련도 집안에서 나오라며 아우성인데, 하루 대부분을 좁은 집안에 갇혀 살다시피 하고 있다. 겨우 30일도 채 되지 않았다. 오라는 데도, 가라는 곳도 사라진 사회적 단절 시절에 우리가 있을 곳은 그저 작고 비좁은 마스크 뒤뿐인가. 길게 늘어선 마스크 구매 행렬에도 실선처럼 격리의 선이 그어졌고, 접촉은 피하고 대화는 끊겼다. 영세할수록, 후미진 곳일수록, 비정규 노동에 기댄 곳일수록 어려움은 즉각 사람에게 채찍질하는 한국마사회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지난 2월24일은 코로나19가 한반도를 뒤덮고 마스크가 ‘금스크’인 나날 중 하루였다. 새벽부터 철거 용역이 들이닥쳐 분향소를 강제 철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권이 바뀌면 적어도 강제 철거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백보 양보해서 기습 철거만은 옛말일 줄 알았다. 이조차 오산이었다. 강제적이고 기습적으로 문중원 기수의 분향소가 쓰레기 치우듯 치워졌다.문중원 기수는 말을 타는 사람이었다. 작은 체구의 그는 부산경남경마공원 소속 14년 차 기수다. 두 아이의 아빠이자, 남편이다. 지난해 11월29일 마사회 비리와 갑질을 쌍용차 ‘해고 시계’ 누가, 왜 다시 돌리나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곰탕 그릇에 소금을 넣은 뒤 후추를 쳤다. 파를 넣어 색감을 맞추고 깍두기 국물로 농도를 조절했다. 마음은 급한데 손은 굼떴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하나. 한참 동안 알맹이 없는 얘기가 오고 가다가 국물이 다 식었다. 파산, 이혼, 파탄 그리고 상처. 날선 단어가 숨 쉴 틈 없이 밖으로 쏟아졌다. 듣기만 해도 숨이 찼다. 무게를 알기에 가볍게 맞장구도 칠 수 없는 격렬함이 말과 표정으로 드러나고 사라졌다. 당부를 하겠다던 처음 마음가짐은 사라지고 듣는 자리로 변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이 좌절되었을 때, 일일이 밥 한 끼라 정리해고 쓰나미에서 살아남았지만…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따끔했다. 기분 나쁜 느낌이 뒷목까지 타고 올라왔다. 손가락엔 선만 보일 뿐 아직 피는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어느 정도로 베였는지 규모의 문제다. 붉은 피가 선을 따라 점점 넓어진다. 마침내 한두 방울 바닥에 떨어지는 피를 보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지혈한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욕실 배수구에 몰려든 머리카락 뭉치를 치우려고 철망을 뜯어내려다가 이 사달이 났다.예전에도 손가락을 베인 적이 있었다는 것을 두 번째 베이고 나서 깨달았다. 그만큼 무심하게도 먼 기억이다. 그때도 이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왜 욕실 배수구 철망은 해고, 농성, 복직 그리고 일상의 회복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회사 동료들과 야유회를 다녀왔다. 복직 4년 만인데 겨우 두 번째다. 올해 복직한 동료들과는 처음 가는 짧은 여행이다. 평소와는 분명히 다른 비릿한 바닷가 냄새가, 회색빛 작업복이 아닌 평상복의 알록달록함이 좋았다. 탁 트인 바닷가에 서자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것 같았다. 숨이 달라졌다. 백사장 옆 평상 위에 앉아 회를 먹고 술도 한두 잔 마셨다. 소소하게 살아가는 얘기만 하자고 해도 자꾸 회사 얘기로 돌아가곤 했다. 공장 생활이 9할인 사람들이라 어쩔 수 없었다.“넌 그때 무섭지 않았어?” 다소 뜬금없는 형의 말에 고개를 상대 ‘노조 혐오’ 부추긴 사장님의 직장폐쇄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한 방에 끝내라.’ 화장실 벽에 붙은 작은 전단지에 눈이 갔다. 노조에서 만든 전단인 줄 알고 천천히 읽다 보니 회사가 만든 것이었다. 이른바 ‘주먹밥 이론’이라며 절차와 과정을 과감하게 건너뛰는 혁신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옆에 노조에서 붙인 ‘총파업’이란 스티커와 묘하게 어울렸다. 회사가 강조하는 어떤 메시지에 가끔 실소를 금할 수 없는데 이 경우도 그랬다.쌍용차 해고 사태 당시 매우 불쾌했던 회사의 구호 가운데 하나는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존경받는 회사’였다. 얼마나 약이 오르던지 몇 번이고 지우거나 찢어버리고 싶을 지경이 편리한 하이패스에 잘려나간 손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주말에 고향 갈 일이 생겨서 차를 몰고 출근했다. 출근길 도로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끼어들기도 많았고 이따금 요란한 경적 소리도 들렸다. 100m 경주 출발선에 선 선수처럼 신호 대기 앞에서 조바심을 내기 일쑤였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오자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해고는 살인’ ‘직접고용 실시하라’ ‘너나 가라 자회사’ ‘내가 간다 직접고용’ 등등. 손으로 쓴 작은 종이 팻말이 고속도로 안내판에 붙어 있었다. 바람이 부는 날씨였으나 찢기거나 날아가지 않았다. 요금을 내면서 물었다. “잘 돼 갑니까?”10년 전쯤 일본 여행을 한 적이 고교 시절 그 선생님을 생각하며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선생님은 쉬는 시간이면 차 안에 있었다. 점심시간에도 차 안에 머물렀다. 좌석을 젖혀놓고 책을 읽거나 교정 한가운데 있는 300년도 넘은 은행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했다. 그의 동선이 눈에 들어온 건 고등학교 2학년 5월 이맘때였다.사립재단에 속한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알 수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으나 어떤 상황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고 차 안에 홀로 있는 모습도 점점 잦았다. 2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선생님은 학교를 떠났다. 하루아침에 윤리 선생님이 바뀌었지만 정확하게 무슨 일 1인 시위마저 돈으로 사는 사회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신발 수선을 맡기러 아웃렛 매장에 가는 길이었다. 매장 근처에 주차를 하려고 주위를 돌다가 젊은 사람들이 1인 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눈에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핸드마이크를 쥐고 피켓을 들었고, 몇 발자국 떨어져 남녀 두어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피켓에는 ‘갑질 근절’ ‘비리 규탄’ 같은 구호 몇 개가 적혔을 뿐 그 내용만으로는 이들이 누군지, 어떤 이유로 1인 시위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주변에 붙어 있는 현수막 내용도 마찬가지였다.신발을 맡기고 차를 돌려 나오는데 아직도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그들을 보았다. 냉가슴 앓는 쌍용차 복직자들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2년 10개월 남았어.” 주간 근무를 마치고 회사 동료들과 이른 저녁을 먹었다. 일에 적응하느라 힘든지 입술이 상해 있었다. 10년 만에 쌍용차에 복직한 형님이 둘러앉은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차례로 동태탕을 떠주며 말을 이었다. “열심히 한다고 시간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있는 시간이라도 알차게 보내야지.” 나도 모르게 얼굴이 어두워졌나 보다. “야 그런 표정 짓지 마, 괜찮아. 복직 못하고 정년 맞은 형들도 있는데 뭘 그러냐.” 토막 난 시간이 좀처럼 이어 붙여지지 않았다. 10년 만의 복직인데 이제 3년도 채 남지 않았다니. 더 불법파견 앞에만 서면 검찰은 왜 작아지는가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언덕이 너무 가팔라 펜스를 잡고 걸었다. 회사 안을 보여주겠다는 지회장을 따라나선 길이었다. 구미공단 언덕 위에 위치한 공장은 누런 겨울 잔디만큼이나 삭막했고 오가는 이들도 드물었다. 제품 작업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서도 발이 자꾸 미끄러졌다. 오솔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은, 길 아닌 길을 걷고 있었다.경북 구미에 있는 아사히글라스는 LCD용 글라스를 생산하는 일본계 기업이다. 2005년 설립 당시 정규직 800명, 비정규직 300명이 근무했으며 매출 규모 1조원을 넘길 만큼 내실 있는 기업이었다. 외국계 투자 기업에게 한국은 나도 그 굴뚝 위에 있었다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전 기획실장)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 4시40분, 습관처럼 옷을 갈아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일요일임을 알아차린 건 문 밖에 있어야 할 신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허탈했지만 모처럼 시간을 번 것 같은 기분으로 현관문을 닫고 들어와 읽던 책을 펼쳤다. 한 장 정도 읽다 말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홈쇼핑 광고가 시선을 끌려 애쓰고 있었고 액션 영화에선 쉴 새 없이 총격전이 펼쳐졌다.바람은 점점 차가워지는데 다들 어떻게 지내나 싶어 SNS를 켜 오랜만에 새벽 시간 타임라인을 훑었다. 간헐적으로 올라오는 소식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점쟁이를 자처한 대법원과 12년 투쟁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전 기획실장) 주말 저녁, 냉장고 안을 청소했다. 마침 끓이고 있던 된장국에 고추장 반 숟가락을 넣어야 했던 터라 눈에 들어온 고추장이 반가웠다. 뚜껑 위에 박힌 제조일자는 2014년이었다. 절반 정도 남은 고추장 통에서 적당량을 덜어 된장국에 풀고 뚜껑을 닫다가 ‘산들바람’이라는 상표에 눈길이 멈췄다. ‘그랬지, 산들바람이었지.’ 혼잣말을 하고는 된장국 끓이던 불을 끈 채 식탁 앞에 앉았다. 1㎏짜리 매실고추장 통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011이 선명하게 적혀 있는 문의 전화번호가 새삼스러웠다.12년. 무척 긴 세월이다. 모질다면 피해자 입장일 상처 안에 머무르는 삶 그 울타리를 넘어서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전 기획실장) 9월14일 쌍용차 해고자 복직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2009년 6월8일 해고 이후 112개월이 지났으며 3385일이 흘렀고 8만1240시간을 보내야 했다. 불가능처럼 긴 시간이었다. 합의서는 두 장. 3385일의 투쟁을 끝내는 데 672자가 쓰였다. 2018년 연말까지 119명 해고자 가운데 60%인 72명을 복직시키고 남은 해고자는 2019년 6월30일까지 복직하도록 하는 데 합의했다.합의문이 발표되던 순간, 쌍용차 서울 대한문 분향소에는 웃음기 없는 박수와 구멍 난 침묵만 흘렀다. 긴 시간 정적이 휘감았다. 내뱉지 못하는 말들과 지금 여기에 필요한 노동 프로파일러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전 기획실장)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지나가던 시민이 건네는 말이면 감사한 일이지만 천막 농성장으로 찾아온 노동부 관료의 첫 질문이 이렇다면 정말이지 곤란하다. 그래서 되물었다. “가지고 있는 자료 먼저 보여줄 수 있나요. 어떤 자료가 축적되었는지 말이에요. 적어도 몇 년간의 언론 스크랩 정도는 있겠죠?” “저… 그게. 먼저 어떤 것이 필요한지 말씀해주셔야 저희가….” 대개 대화는 이런 식이다. 여기에 한두 마디 더 섞인다. “제가 이 일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면전에 대고 죄송하다는데 화를 내기도 어렵지만 반복되는 이런 누가 그의 목숨 줄에 칼집을 내었나 이창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전 기획실장)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더워서 가까운 카페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이마에 얼음을 대보고 뒷목에도 넣어봤지만 소용없다. 땀 닦은 수건에선 냄새가 풀풀 풍기고 옷에선 시큼한 과일 썩은 내까지 여름 농성장은 한바탕 냄새와의 전쟁이다. 몇 분만 천막에 있어도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옷가지는 내 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저녁이 되어 해가 져도, 두세 번 옷을 갈아입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바로 내 몸이 이 냄새와 강하게 연루되었다. 몸을 씻는 것이 우선이다.새벽 2시50분이면 청소차가 지나간다. 출발지는 알 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