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류학의 태두 정문기를 아시나요 김만석 (독립연구자) 아내의 할아버지는 남해공립수산실수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에 정착해 일가를 이루었다. 할아버지 자택은 영도의 남항 바로 뒤에 있었는데, 1980년대에 소금창고와 조그만 ‘점빵’을 할머니가 운영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살림살이를 꾸렸다. 할머니의 소금창고업은 1979년 한주소금이 등장하면서 제염공장과 더불어 쇠락해갔지만, 할머니 수완이 없었다면 5남매 자식들의 공부나 결혼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해방 이후 할아버지가 영도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수산검사소’에 근무했기 때문이다. 과거 정부기구에 근무한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그들의 ‘추줍은’ 손이 바다에 배를 띄웠다 김만석 (독립연구자) 1971년생 한광식의 아버지(한진성, 1927~1988)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이다. 지병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남 장성 출신인 어머니가 이북식 김치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남쪽 김치가 아니라는 사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부산 좌천동 산복도로에서 바닷바람을 받아내면서 산 것도 피란민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터이다. 그의 아버지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내려왔는지 전쟁 중에 피란을 왔는지는 불확실했다. 부산으로 피란 온 친척 어른한테 아버지가 중학생 시절 역도를 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한광식의 둘째 물고기 잡던 사내 물고기를 지키다 김만석 (독립연구자) 이윤길은 원양어선 선장이었다. 1959년 강원도 주문진에서 태어나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부모덕에 밥 굶는 일은 면하고 살았다. 가난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 원양어선을 타는 일이라고 믿은 그는 1975년 주문진수산고등학교 어업과에 입학한다. 1977년 뱃사람에게 여권이나 다름없는 ‘선원수첩’을 발급받았다. 그는 어선 면장(5급 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1979년 남아메리카 북부 수리남공화국의 새우 트롤선에 승선해 원양어선에 첫발을 들인다. 배고픔과 가난을 넘어 자유롭게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들뜨면서 말이다.배에 오 해녀 박말애는 바다로 돌아갔을까 김만석 (독립연구자) 겨울바람을 맞으며 부산 영도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 도서관에 간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영도의 수산시험장에서 우치다 게이타로가 주도해 기록한 조선의 물고기 은판사진 아카이브 책을 보기 위해서였다. 한국 어류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정문기는 〈한국어도보 (韓國漁圖譜)〉(1977)에서 우치다에게이 자료의 사용 허락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 책은 우치다의 물고기 은판사진 아카이브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다’나 ‘물고기’에 관한 지식이 식민지 학지에 의존해왔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현장’에 밀착해 조사 과정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