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정원재씨의 아들 정준교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73] 조남진 기자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정원재씨의 아들 정준교씨(42)는 형과 함께 아버지의 조경회사를 운영 중이다. 아버지는 세월호에 오르기 직전까지 일 얘기만 하셨다고, 그는 말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2014년 4월16일은 아버지의 60번째 생일이었다.“아버지 생신이 4월16일이에요. 그래서 그날 맞춰서 친구들과 회갑 여행을 떠나신 거예요. 여객선 터미널에서 배웅할 때 떡도 맞춰서 드렸어요. 저희는 조경업을 하는데 4월이 제일 바쁠 때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 전날까지도 안 가신다는 것을 그냥 가시라고 설득해서 보냈거든요. 솔직히 좀 떠밀려 가신 테러 대응훈련을 지켜보던 할아버지의 한마디 [포토IN] 조남진 기자 한·미 연합훈련인 ‘자유의 방패’ 훈련 마지막날인 3월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경의중앙선 가좌역 광장에서 테러 대응훈련이 진행되었다. 훈련 중임을 알리는 형광색 완장을 두른 예비군들이 삼삼오오 모여 훈련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공포탄이 발사되면서 훈련이 시작되자 총을 든 거동 수상자가 지하철 출입구로 도망쳤고, 일부 시민들이 소리를 지르며 전철역 방향으로 뛰어 들어갔다. 소방차와 구조대가 순서에 맞춰 총격 부상자를 이송한 뒤 폭발물 처리반이 의심물질을 확인하고 처리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경계근무를 희생자 최승호씨의 동생 최승구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60] 조남진 기자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최승호씨의 동생 최승구씨(51)는 실내 인테리어 일을 하면서 난을 키운다. 세월호 참사 보름 전이던 3월 말일에 ‘4월에 제주도로 일하러 갈 것’이라던 형님의 말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돌아가신 형님은 1964년생 다섯째고, 저는 일곱째랍니다. 형님하고 아홉 살 차이가 나다 보니까 학교 다닐 때 용돈 달라고 쫓아다니던 기억이 나요. 형님은 충남 서산시 운산이라는 곳에서 자동차 정비 일을 10년 넘게 했어요. 그리고 대구로 가서 일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명절에나 만나는 사이가 되었어요. 어느 날 세월호 특조위에서 활동한 오지원 변호사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58] 조남진 기자 대전지법과 수원지법에서 판사를 지낸 오지원 변호사(47)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피해자지원점검 과장과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사무처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참사를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의 웬만한 문제들이 다 드러난다고 말했다. 지금은 법무법인 ‘법과 치유’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수습된 아이들이 안산으로 올라오면서 분향소가 차려졌는데 망설이다가 찾아갔어요. 그때의 장면은 영원히 못 잊을 것 같아요. 교복을 입은 채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과 영정 사진이 너무 안 어울리고 낯설었어요. 그런데 질서 유지하는 분이 사람이 많으니까 ‘팽목바람길’의 안병호 공동대표와 임정자 사무국장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57] 조남진 기자 세월호 팽목 기억관을 출발해 팽목 기억관으로 돌아오는 ‘팽목바람길’은 사람이 걷는 길이다. 66차 걷기 행사가 이어지고 있는 이 길은 아동문학가인 임정자 사무국장(58)과 지역 주민, 뜻있는 동료들이 2018년 1월2일 함께 낫을 들고 뚫었다. 진도대교에서 시작해 세방낙조 전망대 쪽으로 근사한 길을 낼 계획도 세웠지만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팽목바람길로 방향을 틀었다. 잊지 않기 위해 팽목바람길을 찾기 시작했던 안병호씨(46)는 지금은 공동운영위원장으로 이 길을 함께 지켜가고 있다.“광화문 집회의 ‘세월호 연장전’에 참여했던 연극인 이종승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55] 조남진 기자 공연예술인노동조합 이종승 위원장(50)은 연극배우다. 세월호가 침몰한 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촛불을 들고 단식에 동참했다. 세월호 추모 활동 과정에서 개인의 목소리보다는 연대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고, 추모를 위해 모였던 수많은 공연예술인의 힘을 모아 2017년 공연예술인노동조합 창립을 이끌었다.“제가 대학원 등록금 벌려고 잠깐 꽃게잡이 배를 탔는데 거기가 팽목항 바로 옆 서망항이었어요. 그래서 팽목항 근처를 잘 알아요. 꽃게를 따라 위에서부터 쭉 내려오면서 조업하던 데였어요. 어떻게 그 큰 배가 쉽게 가라앉았는지, 왜 못 구 희생자 김순금씨의 아들 배상수 부위원장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54] 조남진 기자 세월호 일반인유가족협의회 배상수 부위원장(48)의 어머니 고 김순금씨는 그날 환갑 기념으로 초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떠나던 길이었다. 배 부위원장은 지난 10년 세월 동안 일반인 유족들을 쫓아다니고 부탁하러 다니다 추모를 다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무슨 정신에서인지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출근을 했어요. 회사 현장에서 일하던 도중에 ‘동생에게 연락해보라’는 전갈을 받고 나서 동생과 통화를 했어요. 동생은 어머니가 타신 배가 사고 난 것 같다는 거예요. 진도로 출발하기 전에 TV에서 전원 구조라는 보도가 나와 아무 생 진도 세월호 활동가 김남용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51] 조남진 기자 진도에 거주하는 세월호 활동가 김남용씨(52)는 세월호 기억관을 ‘생활의 일부’라고 했다. 단원고 2학년 8반 우재 군의 아빠 고영환씨가 팽목항을 떠난 후에도 그는 이곳을 지키고 있다. 아픔이 너무 컸던 공간이기 때문에 기억관을 찾는 사람들이 위안을 얻고 가는 장소가 되길 희망한다고 했다.“12시 즈음 점심을 먹는데 전원 구조라고 TV 자막이 나왔어요. 배가 좌초되고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물에 떠 있다가 구조됐나 보다 생각했지요. 그런데 오후가 되면서 뉴스 멘트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 날 팽목항에 왔을 때는 아 희생자 신경순씨의 아들 김영주 부위원장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50] 조남진 기자 세월호 일반인유가족협의회 김영주 부위원장(49)의 어머니 신경순씨는 자전거 동호회원들과 함께 제주로 가던 세월호에 탑승했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김 부위원장은 사고 사흘째 되던 날 팽목항에서 어머니를 마주했다.“세월호 침몰 당일 저녁에 어머니 친구분께 전화가 왔어요. 자전거 동호회에서 제주도를 가신다고 했는데 그 배를 탔다는 거예요. 사실 저는 어머니께서 그 배를 탔다는 것 자체를 몰랐어요. 그냥 ‘엄마 잘 갔다 올게’ 하시길래 인사만 했거든요. 저한테 일일이 다 말씀을 안 하셨으니까요. 어머니는 일평생 자식들 키우는 데 전념하셨던 희생자 전종현씨의 아들 전태호 위원장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8] 조남진 기자 전태호씨(47)는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로 아버지 전종현씨를 잃었다. 2015년부터 세월호 일반인유가족협의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진실을 찾는 일을 해오고 있다.“업무 때문에 당진으로 내려가다 어머니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아버지께서 제주도 가면서 탄 배가 섰다고 하시더라고요. ‘쿵’ 소리가 나면서 배가 섰는데 구조하러 온다고 했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대요. 걱정되니까 회사 일정 빼고 진도로 내려가면서 여기저기 연락을 했더니 서망항으로 가라는 거예요. 11시쯤 도착했는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시 여기저기 연락을 해보니 팽목마을 임남곤 이장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7] 조남진 기자 70~80대 노인이 대부분인 팽목마을에서 임남곤 이장(57)은 젊은 세대에 속한다. 마을 노인들과 세월호 유가족 사이에 마찰이 생기거나 하면 처리는 그의 몫이었다. 그는 “서로 입장 바꿔서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라며 상황을 정리해왔다고 했다. 팽목항 세월호 기억관에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면 누구나 임남곤 이장을 찾는다.“용인에 사는 형수한테 사고 소식을 처음 들었어요. 팽목 근방에서 선박 사고가 났다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TV를 보니 긴급 뉴스라며 선박이 침몰 중이라는 속보가 뜨더라고요. 지인이랑 점심을 먹는데 또 전원 구조 존엄과안전위원장으로 활동한 박진 국가인권위 사무총장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2] 조남진 기자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였던 박진씨(53)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뒤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존엄과안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참사 초기,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워낙 큰 재난이었기 때문에 시민단체들이 뭘 해야 할지 정리가 잘 안됐어요. 그래도 무력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순 없어서, 참사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인권의 기준이 무엇이다라는 성명서를 인권단체들이 냈어요. 처음에는 가족들 만나는 것도 많이 힘들었어요. 아무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으시던 때라서 그냥 곁에 있는 정도로만 활동했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의원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39] 조남진 기자 세월호 참사 당시 박주민 의원(51)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였다. 참사 이후 그는 ‘세월호 변호사’로 불렸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직후 청와대 인근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집회신고를 직접 내고 촛불을 든 것이 세월호와 함께한 인연의 시작이다. 20대 총선에서 서울 은평갑 지역구에 출마했을 때 세월호 가족들이 찾아와 선거운동을 도왔을 만큼 세월호 가족들과 유대가 강하다.“처음에는 대한변협(대한변호사협회) 차원에서 지원팀이 꾸려졌어요. 대한변협 변호사 중에 민변에도 적을 두고 계신 분이 계셨는데 ‘두세 명 4·16재단 상임이사 박래군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35] 조남진 기자 세월호 1주기 당시 인권활동가 박래군씨(63)는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을 맡고 있었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권을 무력화하려는 시행령 폐기 촉구 집회를 열었는데, 그 일로 투옥되었다.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을 하며 치른 다섯 번째 옥고였다. 지금 그는 4·16재단 상임이사로 세월호와 함께하고 있다.“세월호는 대각성의 계기점이었다고 생각해요. 돌이켜보니까 한국 사회가 생명이나 안전의 중요한 가치를 뒷전으로 밀어놓고 경쟁과 효율, 돈만 좇았거든요. 그런 사회에 대한 각성의 계기점이었다고 봐요. 그리고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 대해 공 거리의 시인, 송경동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33] 조남진 기자 송경동 시인(57)은 세월호 추모시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를 썼다. 거리의 시인, 투사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늘 약자들의 곁에서 마이크를 잡는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만민공동회’ ‘문화예술인 연장전’ 활동 등으로 7건의 재판을 받았다.“저는 지금도 물이 무서워요. 공포스럽고... 왜냐하면 바다에서 물이 밀려오는데 피하지도 못하고 수장되어야 했던 그 사람들의 고통이 어떤 거였을까 생각하면, 그냥 샤워하면서 흘러내리는 물만 봐도 고통스럽고 무서워요. 세월호에서의 안타까운 죽음들이 내질렀을 어떤 고통과 비명 같은 게 느껴져서 지금도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 제안했던 용혜인 의원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29] 조남진 기자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33)은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안산에서 성장했다. 세월호 참사 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정부의 책임을 묻기 위해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을 제안했다. 행진 도중 연행된 그는 6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다.“당시 대학생이었고, 4월16일이 중간고사 전 주였어요. 학생회 회의실에서 수업시간을 기다리다 세월호 속보를 봤어요. 처음에 ‘전원 구조’라는 속보를 보고 안심하고 수업을 들으러 갔죠. 제가 안산에서 오래 살아서 단원고를 잘 알아요. 교복이 예뻐서 친구들이 많이 가려고 했거든요 이태원 참사 유족들, 눈물의 삭발 [시선] 조남진 기자 1월18일 오후 1시께. 보라색 옷을 입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서로를 위로하던 유가족들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국민의힘은 윤석열 정부가 조사대상이 되고 책임이 밝혀질까 봐 두려운 것이냐. 국민의힘은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결정으로 국민의 처절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라고 경고했다.이날 오전 국민의힘은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취임 후 첫 의원총회에서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에게 거부권(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하기로 결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에서 빨래하세요 [포토IN] 조남진 기자 “기름 묻은 건 애벌빨래를 한번 해줘야 해요.” 2023년 12월27일 오전 경남 거제시 연초면 오비리에 있는 노동자 작업복 세탁소 ‘블루클리닝’에서 작업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선소 하청회사에서 수거해온 박스가 열리자 쇳가루가 묻거나 기름 범벅이 된 작업복들이 먼지를 날리며 쏟아져 나왔다.작업복을 주인에게 정확히 보내주기 위해 작업자들이 이름과 수량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런 다음 기름에 오염된 옷가지는 따로 골라내 일일이 솔로 비벼서 기름얼룩을 제거했다.초대형 세탁기로 옮겨진 작업복들은 70분 동안 세탁한다. 힘찬 물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 [2023 올해의 사진] 사진 조남진·글 최진영(소설가) 어릴 때는 ‘놀이’의 일부였다. 청소년 시기에는 ‘공부하고 외울 것’이었다. 어른이 된 뒤에야 ‘일어나서는 안 될 인재(人災)’임을 비로소 절감했다. 거주지에 폭탄을 투하하면서, 사람을 죽이면서 승리와 정의를 외치는 잔인한 행위. 이념이나 신념 때문에 전쟁할 리 없다. 돈 때문에, 더 많이 갖기 위해 학살한다. 전쟁이 없었다면 일상의 무수한 기쁨과 행복을 누렸을 아이들이, 평범한 사람들이 지금도 무참히 죽어간다. 단숨에 산산조각 나는 삶.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원통한 죽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소중하다. 그 어떤 존재도 전쟁을 어떤 안전한 세상 [2023 올해의 사진] 사진 조남진·글 김지연(소설가) 어떤 한국 남성들이 각종 매체에 은밀하게 숨겨진 사인(한국 남성의 성기가 아주 작다고 조롱한다는 집게손가락 이미지)이 있다며 그것을 만든 사람을 찾아내 해고하기 위해 힘을 쏟고, 기업과 정부기관이 그들의 요구에 신속하게 굴복할 때에, 어떤 한국 여성들은 진짜로 죽는다. 죽으면 안 되는 이유로, 죽어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다.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좋은 점으로 안전한 밤거리를 꼽는다. 물론 한국의 밤거리는 안전한 편이긴 하다. 그럼에도 어떤 한국 여성들은 혼자 밤길을 걸을 때 누군가 뒤따라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한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