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대공분실, 인권기념관으로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다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았다. 박종철이 잔혹한 물고문으로 질식해 숨을 거둔 509호실. 방문객이 직접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은 유리벽 너머는 시간이 멈춘 듯 박제된 모습 그대로다. 낡은 철제 책상과 의자, 촌스러운 구식 담요를 가지런히 개어 올려놓은 작은 침대, 그리고 방 안쪽으로 작은 욕조와 세면대, 변기 등이 무심한 듯 나란히 배치돼 있다.얼핏 보면 옛날식 원룸이나 무미건조한 사무 공간 같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은 처음부터 고문을 작정하고 정밀하게 설계된 건물이다. 일부 경찰이 우발적으로 고문한 게 아니라 국가가 경찰에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박종철 이야기, 개봉박두 정희상 기자 1987년 6월 민주항쟁(이하 6월항쟁)의 도화선이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영화로 제작되어 관객을 만난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던 박종철 사건을 다룬 영화 〈1987〉 제작에 ‘박종철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함께했다. 그 가운데 박종철씨의 아버지 박정기씨와 형 종부씨를 빼놓을 수 없다. 사건 당시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라는 아버지의 말은 시위 학생들의 플래카드에 그대로 담겼다. 박정기씨는 이후 30여 년 동안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이끌다 최근 노환이 악화돼 요... 역사의 부름 앞에 당당했던 그해 6월 이상원 기자 1987년 6월은 유난히 낮이 길었다. 이듬해 서울올림픽을 위해 전두환 정권이 5월부터 ‘서머타임’을 시행했다. 긴 낮 동안 벌어진 사건들이 한 시대를 끝냈다. 500만명에 달하는 시민이 거리로 나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6·10 민주항쟁(6월항쟁)의 대미를 장식한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는 100만명이 참석했다. 건국 이래 최대인 이 기록은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까지 29년간 깨지지 않았다.그해 거리에 나선 500만명 중 김영삼·노무현·문재인은 대통령이 되었다(당시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여서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 ‘무사히’ 절망할 수 있었던 그 사람… 백상웅 (시인) ‘20대의 절망, 30대의 방황, 40대의 도전을 담은 진솔한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책이 있다. 1952년에 태어난 이 책의 주인공은 22세 때 “아파도 아파할 시간이 없었다”. 26세에 “최고 권력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고, 28세 때는 “청춘의 끝자락에서 고통의 문”이 열리는 것을 알았다. 29세 때는 “절망과 울분 그리고 외로움의 나날”을 겪 ‘박종철 사건’ 기록을 다시 찾아보는 이유 김은지 기자 1987년 1월14일, 선배의 소재를 대라고 강요받던 대학교 3학년 박종철이 물고문을 당하다 숨졌다. 다음 날 그의 죽음은 이렇게 알려졌다. “탁 치니 억 하고 죽더라.” 고문치사는 국가권력에 의해 축소되고 은폐되었다.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 사건이 2015년 다시 조명받는 까닭은 박상옥 대법관 때문이다.당시 수사검사로 1차 사건을 맡았던 박 대법 박종철기념사업회 “안상수 돈은 안 받아” 천관율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가 자신의 저서 인세수입을 박종철기념사업회에 기부하겠다고 말한 데 대해, 기념사업회는 “안상수 대표의 인세수입 기증을 거부한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7일 성명을 내고 “안상수 대표에 대해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분노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라고 안 대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