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요조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74] 이명익 기자 가수 요조 씨(42)는 ‘잊지 않겠다’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기억에도 노력이 필요하고, 그 노력도 약해져간다는 걸 느낀다. 그래도 매일 조금씩 노력한다. 고3이던 동생을 사고로 잃은 이후, 잊지 않기 위해 새기기 시작한 타투처럼, 자신만큼이나 아픈 상처를 가진 세월호 가족들을 잊지 않기 위해 ‘연대’라는 알람을 꺼놓지 않으려 한다.“세월호 가족분들의 초청을 받아 안산 행사에 갔어요. 제가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다른 가족분이 오셔서 담당자분에게 “누구셔?“라고 묻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 요조라는 가수분이야.’ 그런데 그 질문은 누 세월호 잠수사 한재명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64] 이명익 기자 세월호 참사 이후 한재명씨(60)의 차에는 항상 수상구조 장비가 실려 있다. 민간 잠수사로 수색 작업에 참여한 그에게 세월호는 여전히 마음의 빚이다. 10년 전 세월호 참사 때 구조에 나선 그는 몸을 사리지 않았다. 몸과 마음에 후유증이 남았지만 그는 지금도 누군가의 골든타임을 지켜내고 싶어 한다. 이태원 참사 이후 그는 심장제세동기를 구매했다.“전원 구조가 오보였다는 게 알려지고서 ‘이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는 잠수사들한테 전화를 돌렸어요. ‘혹시 거기 가 계시냐? 가려고 하는데 방법을 모르겠다.’ 그러던 중에 세월호 잠수사 이상진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6] 이명익 기자 이상진씨(60)는 세월호 참사 초기 수색 작업에 참여한 민간 잠수사 중 한 사람이다. 첫 수습자도 그와 함께 뭍으로 올라왔다.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 아직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여전히 미수습자 가족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저는 인근 해역에서 배를 건지고 있었어요. 그러다 사리(밀물과 썰물 차가 최대인 시기) 때에 작업을 잠깐 멈추고 다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세월호 참사가 터진 거예요. 해상 크레인 큰 거 있잖아요. 그거 계약금도 걸어놓고 했는데 다 사고가 난 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고. 저도 그냥 보따리 싸서 그쪽으로 세월호 잠수사 백인탁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0] 이명익 기자 백인탁 잠수사(49)는 세월호 참사 때 활동한 민간 잠수사들 중 몇 안 남은 현역 잠수사다. 당시 희생자들을 직접 수습했다는 육체적·정신적 무게는 참사 10년이 지난 이후에도 오롯이 그들만의 몫으로 남아 있다.“ ‘가자’ 그 한마디뿐이었어요. 그렇게 바로 상진이 형과 보따리 싸가지고 내려갔거든요. 그때 저희 둘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그때 아내는 내가 내려가면 한 일주일 있다 오는 출장인 줄 알았대요. 제가 17일(2014년 4월)에 내려갔을 때 처음엔 배에서 기름을 빼야 한다고 했어요. 배에 올랐는데 해경에 계신 형님이 세월호 잠수사 황병주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38] 이명익 기자 황병주씨(65)는 베테랑 잠수사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이미 산업 잠수사 경력이 30년에 이르렀다. 2014년 4월20일 첫 잠수를 시작해 7월7일까지 세월호에 있었다. 이후 잠수병을 얻었는데, 해경을 상대로 낸 산재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틀에 한 번 4시간씩 혈액투석을 받고 있다.“4월20일 첫 잠수를 했는데 시야가… 정말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손을 한 번 휘저었는데 한꺼번에 여러 아이들이 잡혔어요. 그 순간 감당을 못하겠는 거예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 막 목놓아 울면서 누구한테인지 세월호 가족들과 함께한 ‘길바닥’ 박훈규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27] 이명익 기자 세월호 가족들에게 박훈규(51) 독립 PD는 낯선 이름이다. 대신 가족들은 그를 ‘길바닥 또는 '길바닥 저널리스트’로 기억한다. 수많은 언론이 있을 때부터 어떤 언론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7년을 거리 위에서 함께했다."참사가 터지고 4일 지난 뒤에 내려갔어요. 사실 처음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 섰을 때는 그분들 눈을 쳐다보지 못했어요. 언론에 대한 불신이 커질 대로 커진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현장에서 보던 상황이 TV에서 보던 것과는 너무 달랐어요. 너무 괴리가 크니까 결국 현장에 남아서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죠.처음엔 진도와 서 15년 전 그날, 망루에는 사람이 있었다 [포토IN] 이명익 기자 “사실 예전에는 용산 참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참사들은 되풀이되고, 책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어요. 15년 전 일이지만 그냥 계속 동시대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잊으면 안 되겠다 싶었고, 그때 몰랐던 걸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아들과 같이 왔어요.”찬바람이 매섭게 불던 1월20일 오후, 아들 김재윤 군(12)의 손을 꼭 잡은 신민정씨(45)는 서울 용산구 ‘남일당 터’에 국화를 내려놓았다. 그 자리에 들어선 43층 건물을 일행들이 한 번씩 올려다본 뒤 길 위의 목사 최헌국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23] 이명익 기자 최헌국씨(62)는 거리의 목사, 길 위의 목사로 불린다. 목회를 시작한 1989년부터 그의 예수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서 있었다. 최헌국 목사는 세월호 참사 문제와도 10년을 함께했다."얼마 전 환갑이었는데 저에게 아내가 묻더라구요. 이제는 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통해서 세상의 구원을 이뤄냈던 것처럼, 세월호 참사도 한국 사회가 새로운 생명안전을 일구어내는 변화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므로 세월호는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이젠 되지 않았느냐’고 쉽게 말을 해요. ‘10년이 지났으니 민간 잠수사 기록 〈로그북〉의 복진오 PD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21] 이명익 기자 기록은 기억보다 잔인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직접 수습한 민간 잠수사들의 참혹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며 ‘죽음의 각인’인 트라우마로 남았다. 몸이 망가지고 삶도 무너졌다. 복진오 PD의 영화 〈로그북〉은 세월호 참사 이후 민간 잠수사들의 마음에 남긴 항해일지와 같은 기록이다."세월호 초기에 작은 루머가 기사가 되고 어설픈 해프닝이 진실이 되며 언론이 제 역활을 못하고 있었어요. 그때 한 독립 PD 선배가 그러더라구요. ‘야 안 되겠다. 우리라도 내려가서 제대로 현장을 기록해보자.’ 그래서 무작정 내려갔어요. 힘들게 바지선에 올 우리는 쓰다 버리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포토IN] 이명익 기자 “여기 구미공장은 LG에, 평택공장은 삼성에 납품을 합니다. 구미공장에서 화재가 난 뒤 여기서 납품해야 할 물량을 평택에서 납품하려고 저희 조합원들이 올라가서 스펙 정합(LG의 납품 기준에 맞추는 작업)도 하곤 했어요. 그렇게 일을 해왔는데, 고용승계는 안 된다고 합니다. 다른 법인이라고···.”전화 통화를 하던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박정혜 수석부지회장(38)은 ‘다른 법인’이라고 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LCD 편광필름을 생산하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엔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 공장들이 멈춰 서면서 마음으로 운영하는 식당 ‘청년 밥상 문간’ [포토IN] 이명익 기자 “저희 식당은 맛집으로 알려졌으면 해요. 가성비 좋은 맛집이요. 가난하고 어려운 청년을 위한 식당으로만 알려지면 청년들이 오는 걸 부담스러워하거든요. 그냥 그들이 편하고 맛있게 먹고 갈 수 있는 문턱 낮은 식당이었으면 해요.”식탁을 닦는 이문수 신부 어깨 너머로 구수한 밥 냄새가 넘어온다. 주방에서는 솥째 김치를 볶는 냄새가 매콤하게 풍겨왔다. 오전 11시, 식당 문을 열자 어느새 자리는 만석. 각자 취향에 맞게 라면 사리를 추가하거나 고기 사리를 추가할 수 있다. 메뉴는 김치찌개 하나이지만 밥과 반찬은 무제한이다. 3000원짜리 1인 미디어 미디어몽구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5] 이명익 기자 1인 미디어 ‘미디어몽구’는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간 세월호 참사를 지켜봐온 활동가이자 기록자이며 언론인이다. 미디어몽구는 1인 미디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2005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광우병 관련 촛불집회, 2009년 용산 참사 등 사회적 현안을 영상으로 담아왔다. 그의 세월호 취재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오랫동안 세월호 가족 곁을 지켜왔던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오늘도 카메라를 든다.“세월호 참사 터지고 바로 내려가지는 못하고 사흘 뒤에 갔어요. 그때 다른 취재를 하고 있었거든요. 자가용이 없어서 대중교통으로 세월호 생존자 장애진씨 엄마 김순덕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 이명익 기자 세월호 참사 생존자 장애진씨 어머니 김순덕씨(54)는 생존자의 부모로 참사 이후 10년 내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유가족 엄마 여섯 명과 함께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에서 연극배우로 활동 중이다. 계획된 연극 10편 가운데 다섯 번째 연극인 〈연속, 극〉에 출연하고 있다. 또한 수년 전부터 서울 광화문과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피켓시위를 이어가고 있다."세월호 참사 있고, 이태원 참사 일어났을 때 모든 부모는 똑같았을 거예요. 저도 바로 전화를 했거든요. 어디 있니? 거기 있었니? 그때 애진이는 다른 곳에 있었거든요. 애진이가 잃은 이를 돌려드릴 수 없을지라도 [2023 올해의 사진] 사진 이명익·신선영·박미소, 글 정세랑(소설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언제나 경계했어야 했는데 처참히 실패했다. 하지만 책임자들은 1년이 지나도록 그 실패의 앞뒤와 구조적 원인을 살피기는커녕, 미흡한 조사를 서둘러 마무리 짓기 위한 변명과 거짓말만을 남발하는 중이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그런 말들이 아니라 참사 생존자와 유가족의 목소리다. 잃은 이를 돌려드릴 수 없고 다친 곳을 지워드릴 수 없어도 함께 듣는 것으로 그다음을 향할 수 있다. 미래의 참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진실뿐이라는 걸 깨달은 이들은 질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2023 올해의 사진] 사진 이명익·글 이동은(영화감독·그래픽노블 작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에서 소년은 교장에게 말한다.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말할 수가 없다고. 나는 행복해질 수가 없는 사람이란 걸 들키게 될 거라고. 교장은 답한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 가질 수 있다면 그건 행복이 아닐 거야.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게 행복 아닐까?”“주여! 동성 커플에게도 우리와 같은 지옥을 맛보게 하소서.” 십 년 전 한 동성 커플의 청계천 결혼식장 근처에 걸린 현수막 문구다. 아래엔 ‘한국기혼자협회’라고 쓰여 있었다.혼인은 사회적 구속력을 가진 전통적 제도다. 2015년 6월, 미국 연방 대법원 아이들에게 염치없지만 [2023 올해의 사진] 사진 이명익·글 금정연(작가) 잼버리라는 이름에서 내가 떠올리는 건 많지 않았다. 젊음, 초록색 혹은 모래색의 스카우트 유니폼, 스카프, 배지, 챙이 둥근 모자, 텐트, 모닥불, 그리고… 마시멜로? 2023년 8월 이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이제 나는 잼버리라는 이름에서 폭염과 습기와 벌레 물린 자국으로 가득한 아이들의 다리와 곰팡이 핀 달걀과 밥과 두부 두 조각이 전부이던 자원봉사자용 비건 식단과 바가지요금을 떠올린다. 나는 그게 단순한 무능함이나 무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모든 불편과 불쾌를 ‘칼라베라 카트리나’ 가면을 쓰고,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외치다 [시선] 이명익 기자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인 11월25일, '친족성폭력 생존자'들이 시민들과 함께 '제3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를 열고 서울 도심을 행진했다. '칼라베라 카트리나' 가면을 쓴 채, 종로 보신각에서 광화문으로 행진했다. 가면은 '죽음 같은 삶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참가자들은 "국가는 대답하라, 생존자가 여기 있다",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하라" "오늘 하루 우리 서로의 집이 되어주자" 같은 구호를 외쳤다.친족성폭력은 대부분의 피해자가 가정 내에서 미성년자일 때 발생한다. 가해자가 가족이기 때문에 당시의 경 작은 시골 학교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아름다운 기적’ [포토IN] 이명익 기자 “자 얘들아, 선생님을 봐야지. 선생님 손 올라갈 때 어떻게 하라고 했어, 자 다시 해보자.” 9월19일 오후 전남 곡성군 석곡중학교의 방과후 교실. 지휘봉을 든 안서은 음악 교사의 목소리가 커진다. 아이들은 숨을 한번 내뱉은 뒤 다시 선생님 손끝을 바라본다. 지휘봉이 움직이자 빠르고 강한 템포의 행진곡이 합주실을 가득 채운다. 오늘의 연습곡은 ‘대한의 기상’. 학생들 모두 음악 연주에 집중했다. 조금 전 카메라를 보며 부끄러워하던 모습들은 온데간데없다.전남 곡성군 석곡면의 석곡중학교는 작은 시골 학교이다. 곡성역에서도 차를 타고 세계 청소년은 이 잼버리를 어떻게 기억할까? [포토IN] 부안·이명익 기자 “낮에도 더운데 밤에도 더워요. 씻는 것도 힘들고요. 샤워장에 물이 안 빠져서 사람들 씻던 물이 여기까지 차요.” 까맣게 탄 다리를 살짝 들어 올린 박서현 양(가명·16)은 발목 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8월2일 오후 전북 부안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대회장. 기자들에게 공개된 델타 구역 편의점 앞에서 만난 박서현 양은 연방 땀을 닦아냈다. 친구들과 잠시나마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잼버리장에 하나밖에 없는 편의점. 그것도 참가자들로 들어찬 셔틀버스를 한 대 보내고 나서야 겨우 그다음 버스에 몸을 싣고 올 수 있었다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두 동성 부부 [시선] 이명익 기자 "이것 봐. 이게 임산부 뱃지야." 분홍색 뱃지를 든 김규진씨(31)가 배우자 김세연씨(34)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김규진씨가 임산부 뱃지를 들자, 그를 둘러쌓은 사람들 사이에서 "와" 하며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 이제 부케 던지러 가자."7월1일 오후 폭염주의보가 내린 서울 을지로 명동성당 앞. 또 다른 동성 부부인 10년 차 커플 킴과 백팩도 함께 나섰다. "하나, 둘, 셋"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 두 부부의 부케가 서울퀴어문화축제의 하늘을 날아올랐다.9월 출산을 앞둔 김규진씨와 배우자 김세연씨는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리기 하루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