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후~폭풍 정희상 기자 ‘빈집의 경고(제632호)’ 커버스토리 기사가 디지털 버전으로 독자들을 만났다. 디지털 프로젝트 페이지 ‘소리 없이 번지는 도시의 질병, 빈집’(house.sisain.co.kr)이 오픈했다. 〈시사IN〉 페이스북 계정(facebook. com/sisain)을 비롯해 다양한 SNS 채널에서 독자들을 만난다.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 실태를 고발하고 공론화한 임은정 울산지검 부장검사를 다룬 장일호 기자의 ‘그가 검찰 안에서 싸우는 이유’에 독자들의 반응이 가장 뜨거웠다. “유관순 열사의 재림” “여장부 검사다” “진정한 용기에 국민이 응 “박정희는 죽이고 박근혜는 은폐했다” 정희상 기자 1979년 10월18일 오후 6시께, 경남 마산시 봉암동에서 목수 일을 하던 유치준씨(당시 51세)는 평소처럼 퇴근길을 따라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산호동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를 만났다. 시위대는 “유신헌법 철폐하라” “독재 타도하자” “언론자유 보장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유치준씨는 집으로 가는 길이 경찰에 막히자 자연스레 시위대에 합류했다.이날 저녁 경찰은 강제진압에 나섰다. 분노한 시위대는 공화당 마산지구당사와 파출소에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마산경찰서장은 39사단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밤 11시 장갑차 4대가 우키시마호 진실 쫓는 21세기 독립군 정희상 기자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규명회 전재진 대표(63)는 주변에서 ‘21세기 독립군’으로 불린다. 1993년부터 지금까지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규명이라는 한우물만 팠다.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우키시마호〉를 제작한 김진홍 감독은 “그가 없었다면 영화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우키시마호 생존자와 부상자들은 현재 대부분 사망했다. 그들의 생전 모습과 육성 증언이 스크린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은 전씨의 기록 덕분이다.25년 전 전씨는 당시 8㎜ 캠코더를 들고 우키시마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생존자를 찾아 전 74년 동안 가라앉은 수천 명의 죽음 정희상 기자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께,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 항구 300여m 지점에 조선인 강제징용자와 가족 등 수천명을 태운 우키시마호가 천천히 멈춰 섰다. 이틀 전 아오모리현 오미나토 항구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이 배는 해방 후 첫 귀국선이었다. 승선자 대부분은 오미나토 해군 시설부 군무원 또는 노무자 신분으로 비행장과 철도공사장, 하역 작업장 등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이었다.“육지가 보인다.” 경남 거창의 한 동네에서 나란히 일제에 징용당했다가 이 배를 탄 유경수씨(당시 28세)가 갑판에 먼저 나와서 아래 선실에 있던 후 기자들의 시선 - 김제 가족간첩단 조작 사건 정희상 기자 이 주의 의미 충만조국 법무부 장관은 최근 국가배상 판결이 내려진 김제 가족간첩단 조작 사건에 대해 “피해자들의 권리 회복과 과거 정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조기에 재판 절차를 종결하라”고 지시했다. 1982년 최을호씨가 북한에 나포됐다가 돌아온 뒤 조카인 최낙전·최낙교씨를 포섭해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최씨 일가족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근안에게 고문당했고, 가족 간첩단으로 날조됐다. 최낙교씨는 검찰 조사 도중 구치소에서 숨졌고 최을호씨는 사형이 집행됐다. 징역 15년을 선고 조선인 대학살 그때 그 사진들 정희상 기자 정성길씨(77·대구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는 기록사진 연구가다. 8·15 광복절, 정씨는 40여 년간 수집해온 간토대지진(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관련 사진 자료를 들고 〈시사IN〉 편집국을 찾았다. 정씨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관련 사진을 수집하기 시작한 때는 1974년이다. 독일에 출장을 간 그는 베를린 도서관에 소장된 희귀 기록사진을 발견했다. 구한말 조선의 풍물사진과 일제가 저지른 만행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프랑스·영국으로 사진 수집 범위를 넓혔다.당시 조선과 일본에 파견된 유럽 각국 선교사 또는 군 장교의 카메라 강제징용과 원폭 피해자 유족의 끝나지 않은 싸움 정희상 기자 “승소했다고 한국에 있는 일본 전범기업 자산을 강제 매각할 생각은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과거사에 대한 아베의 진정 어린 사과다.” 강제징용 피해자 14명이 낸 소송의 박상복 원고단 단장(74)이 말했다. 그의 부친 고 박남순씨는 일본 히로시마의 미쓰비시중공업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다. 1945년 8월6일, 미국이 투하한 원자폭탄에 피폭됐다. 아버지는 목숨만 부지한 채 귀국해 피폭 후유증을 겪었다. 평생 신경성 질환에 시달렸다. 피해자 모임 집계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말기(1943~1944년) 경기도 수원·평택 일대에 인권운동가에서 ‘IT 혁명’ 전도사로 정희상 기자 김재오 전도사(54). 한국인들에게 집중 피해를 당한 초창기 중국 조선족과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는 전설적 이름이다. 김씨는 1990년대 초 여러 해 동안 중국 옌볜에서 한국인으로부터 사기 피해를 당한 조선족 동포 1만여 가구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실태조사를 벌이고 구세주 노릇을 했다. 또 인간 이하의 비참한 삶을 강요당했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외국인노동자 피난처’를 개설했다. 피난처를 통해 드러난 1990년대 조선족과 이주노동자의 참혹한 인권유린 실태는 여론 지형을 바꿔 재외동포법 제정의 실마리가 되기도 ... 다시 친일을 생각한다 정희상 기자 정운현 선배는 초년 기자 시절 현대사 발굴 취재에 심취했던 나의 ‘멘토’였다. 〈중앙일보〉 조사자료 기자로 잔뼈가 굵은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친일파 연구자이기도 했다. 나는 1992년 민족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이 수천만 평에 달하는 ‘매국 장물’에 대한 반환소송을 몰래 전개 중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기사화했던 적이 있다. 관련 정보를 처음 입수했을 때 제일 먼저 만나러 갔던 사람이 정운현 선배였다. 앞서간 친일파 연구의 대가이자 재야 사학자였던 임종국 선생을 사표로 삼은 정운현은 평생 친일파 추적에 공을 들였다. 늘 애국지사가 홀대받 “53인의 어이없는 죽음 전두환은 사죄하라” 정희상 기자 “전두환은 자기를 경호하러 가다 죽은 생때같은 젊은이 53명에 대해 지금까지 나 몰라라 한다. 죽기 전에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 이재수씨(64)는 ‘봉황새 작전’ 참사 유족이다. 37년 전 대통령이던 전두환씨가 제주도를 순시할 당시 경호작전 중 53명이 숨졌다. 이씨는 당시 특전사 대원이던 동생 이재준 준위를 잃었다.1982년 2월6일 전두환 대통령의 제주도 연두 순시가 있었다. 전날 청와대 경호실은 경호를 위해 특전사 요원 450명을 제주도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목적지인 제주공항은 물론이고 출발지인 성남공항에도 거센 눈보라가 일본은 독일을 보고 배워라 [프리스타일] 정희상 기자 제2차 세계대전 전범 국가 일본과 독일은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서 극명히 대조된다. 한때 독일도 국가 주도의 전쟁범죄 배상엔 적극적이었지만 민간 기업의 외국인 강제노동에 대한 보상은 거부했다. 나치의 불법행위란 ‘정치적·종교적·인종적 이유나 세계관에서 비롯된 박해’에만 해당하며, 민간 기업에서의 강제노동은 ‘이미 국가 간 배상으로 마무리됐다’는 논리였다. 그랬던 독일 정부와 기업이 2000년부터 외국인 강제노역 피해자 170만명에게 총 100억 마르크를 보상하게 된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마... 기자들의 시선 정희상 기자 이 주의 청원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내년 7월 일본에서 열리는 ‘2020 도쿄 올림픽 불참’을 검토해달라는 청원이 2개나 올라왔다. 일본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가 선수단에게 후쿠시마산 농산물을 식자재로 공급할 계획이라고 밝힌 것이 계기다. 아베 정부의 당초 의도는 ‘후쿠시마 지역의 온전한 치유’를 전 세계에 부각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일본의 민간 전문가들이 발표한 보고를 보면 실제로 후쿠시마에서는 핵발전소 사고 이후 각종 질병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후세 사치히코 후쿠시마 공동진료소 원장은 2017년 한국 국회에서 기사 후~폭풍 정희상 기자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뜨거운 감자다.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 사건 검찰 수사를 다룬 제618호 커버스토리 ‘이재용 겨눈 검찰의 칼 이번에는 다르다?’ 기사에 반향이 컸다. 검찰 수사 의지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봐주기를 우려하는 의견이 많았다. “검찰은 통해도, 법원에서는 이번에도 안 먹힐 듯” “이재용은 아무것도 몰랐던 허수아비라고 하겠지” 따위로 사법부를 불신하는 댓글이 주류였다. ‘삼성의 운명 가를 회계 사기 의혹 총정리’ 기사와 ‘삼성이 하면 증거인멸도 초일류’ 기사까지 이어지면서 이번에는 반드시 삼... 독자와의 수다 정희상 기자 독자 번호:112010055이름:박용성(47)주소:경기도 안산시박용성씨는 경기도 안산시에서 화물차를 운행한다. 자동차 수직계열 하청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안산공단이 그의 일터다. 여기서 생산된 부품을 화물트럭에 실어 광명, 시흥 등의 현대기아차 공장에 전달한다. 요즘은 경기가 좋지 않아 낮에도 집에서 쉬는 날이 늘었다. 박씨와의 통화도 낮에 이뤄졌다.박씨는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시사IN〉을 구독하고 있다. 택한 이유를 묻자 신뢰성을 꼽았다. “그동안 보아오던 종이 신문들과 달리 〈시사IN〉은 논조와 심도 있는 접근 방식에서 가장 믿 “백범 김구 지지한 ‘죄’로 처형당했다” 정희상 기자 해마다 6월이면 경기도 일산에 사는 전술손씨(73)는 마산 앞바다로 향한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에 희생된 아버지 전호극 소령을 기리기 위해서다. 전호극은 1946년 2월 입대해 1948년 진해 해군통신학교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전호극은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께 진해 해군통신학교장 관사에서 가족이 보는 가운데 특무대에 붙잡혀 갔다. 이른바 ‘해상의용군 사건’으로 조사를 받은 그는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마산형무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1950년 7월 그는 군 헌병대에 끌려가 학살당했다. 군 특무대(CIC)에 체포돼 저... 치열하고 처절했던 어느 ‘돌멩이’의 삶 정희상 기자 1970년 전태일은 한자투성이 근로기준법 법전을 붙들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노동 착취에 항거해 분신했다. 인천 삼원섬유 노동자 유동우는 전태일 열사를 이어 현장을 누비며 노동법 교육에 앞장섰다. 1978년 유씨는 참혹한 노동 실상을 다룬 자전 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펴냈다. 이 책은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함께 1970년대 말 유신정권 시절 대표적인 금서였다. 반면 민주화운동을 하는 이들과 대학생 사이에서는 3대 필독서였다. ... 윤상원 열사가 죽어간 곳에서 동생은 발길을 돌렸다 광주·정희상 기자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 1980년 5월26일 전남도청 2층 외신기자 회견장에서 5·18 광주 시민군 윤상원 대변인이 남긴 말이다. 미국 〈볼티모어 선〉지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그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광주의 도청 기자회견실 응접탁자 바로 건너편에 앉아 윤상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이 젊은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다.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바로 코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은 5·18 발포 명령 거부한 한 경찰관 정희상 기자 5월17일 전남지방경찰청 앞뜰에는 ‘안병하 공원’이 조성됐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한 고 안병하 치안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안병하 치안감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치안책임을 맡은 전남경찰국장(현 전남지방경찰청장)이었다. 안병하 공원 조성식에 참석한 아들 안호재씨(60)는 “경찰의 본분을 지켰을 뿐인데 영웅이 되는 나라가 서글프다”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7월23일 강원도 양양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안병하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해... 기자들의 시선 정희상 기자 이 주의 공간 2002년 6월13일 경기도 양주에서는 효순·미선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졌다. 당시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오는 6월13일 사고 현장에는 17년 만에 국민의 정성이 담긴 효순미선 평화공원과 추모비(소녀의 꿈)가 들어선다. 이번에는 사고 현장에 서 있는 미군 추모비가 유족의 요구로 미2사단 영내로 이전된다. 효순미선 평화공원 조성위원회 박석분 집행위원장은 “공원에는 우리 국민들의 호혜 평등한 한·미 관계에 대한 염원과 자주 평화 실현의 꿈을 담아낼 것이다”라... 39년 전 광주 그날의 기록 정희상 기자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77)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지켜본 산증인이다. 당시 광주 대동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 중이던 그는, 5월18일부터 항쟁에 직접 가담해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시민군이 학살되기까지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당시 계엄 당국은 나를 전남대, 조선대 시위 주동 학생들을 의식화시킨 불온 교사로 낙인찍었다. 그래서 항쟁 지도부로 나서지 않고 시내 골목을 누비며 공수부대의 만행을 샅샅이 보고 듣고 메모했다.” 5월18일 계엄군인 공수대원들은 시내 곳곳에서 닥치는 대로 학생과 시민을 대검으로 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