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어느 의원실이던가, 보좌관 두엇과 마주앉아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천 기자, 명단 언제 받았는데?”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나왔다. “어젯밤에 돌던데요.” “진짜? 에이, 나는 아침에 받았는데. 나도 좀 주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심지어 청와대발 명단이 처음으로 나온 시점도 그날 아침이었다. 내가 청와대 핵심이 아닌 한 전날 밤에 알 방법은 전혀 없었다.
왜 그렇게 간단히 거짓말이 나왔을까. 꽤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해보니 묘한 노릇이었다. 그때의 나는 ‘국회는 절대 모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강박에 붙들려 있었다. 다 알아야 하고, 빨리 알아야 했다. 기브 앤드 테이크. 취재원인 의원과 보좌관도 정보에 굶주린 것은 마찬가지였고, 내가 줄 게 없으면 이들이 나랑 안 놀아줄 거라는 생각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그나저나 나야 그렇다 치고, 그네들은 왜 그리 별것도 아닌 정보에마저 굶주려 있는 걸까. “그야 기자들이 말 꺼내기 30초라도 전에 영감(국회의원)한테 보고를 해야 하니까.” 그럼 ‘영감’은 왜? “그야 기자가 물어봤는데 내가 모르고 있으면, 권력 핵심에서 멀어졌다고 기자들이 생각하잖아.” 으잉? 결국 어느 의원이 어느 보좌관과 그렇고 그런 관계인지 30초 먼저 알아내는 데 목숨을 거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바보 같아 보이는 게 무서워서였어? 무슨 이런 손발이 척척 맞는 바보짓이….
기자는 잘, 바르게 몰라야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요즘은 자꾸 든다. 그래야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있고, 모른다 말하기 무서워서 도망치지 않을 수 있다. 요즘 나는 국회에서 “모른다”를 입에 달고 다닌다. 좀 만만하게 취급되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이 편이 더 마음에 든다. 내가 진짜로 모르는 것투성이라는 단 하나 심각한 문제만 빼고, 모든 것이 더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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