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석·박사들이 설립한 노동조합이 민주노총 안에만 벌써 수십 개나 된다”라는 말은 이미 석·박사 학위를 가졌거나 장차 석·박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귀에 솔깃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선진국에는 판사노조와 변호사노조가 있고, 그들도 격무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업을 벌이기도 한다”라는 말 역시 장차 판사나 변호사가 될 꿈을 꾸는 학생의 귀에 솔깃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고학력이나, 국가고시 합격 따위가 과거처럼 큰 메리트가 되지 못하는 쪽으로 우리 사회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방송사의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했던 강연이 떠오른다.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방송사 신입사원들은 대부분 명문대학교 출신일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수석을 거의 놓치지 않았던 수재이다. 그 자신만만한 신입사원들의 표정에서 자기가 곧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자기가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해하는 표정조차 보인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동결하는 것이 마치 애국적 결단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길들여진 그들은 ‘민주노총’ 하면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암 같은 존재쯤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 방송사의 노조위원장은 그 신입사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게 바로 15년 전 제 모습입니다.”
지난해 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핀란드 교장협의회의 피터 존슨 회장의 말이 떠오른다. “핀란드에서는 교장 선생도 대부분 교원노조에 가입해 있다. 나도 그렇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의 다니엘 르 가르가송 부대사도 교육방송(EBS)에 출연해 “나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교장도, 부대사도 자기가 ‘노동자’라고 인식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입사원들에게 ‘당신도 노동자’라고 말하면 자존심 상하는 얼굴이 된다. 이것을 어떻게 정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노조가 천막 치고 농성해서 얻어낸 ‘정규직’
“교육 분위기가 산만해서 죄송합니다, 나중에 신입사원들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겠습니다”라며 미안해하는 방송사 노조위원장에게 “위원장이 말한다고 그 사람들이 뭐 듣나요?”라고 심드렁하게 대꾸했을 때, 위원장이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할 말 있는 사람입니다. 회사가 처음에 비정규직으로 채용할 계획을 세웠거든요. 그걸 정규직으로 바꾸느라고 얼마나 싸웠는지 아십니까? 여의도 본사 앞 아스팔트 도로에 천막 치고 한 달 이상 농성했어요. 그렇게 해서 회사가 이 사람들을 정규직으로 뽑도록 했던 겁니다. 나는 정말 이 사람들에게 할 말 있다니까요.” 위원장은 그 말을 하다가 결국 목이 잠겼다. 그것이 바로 노동조합이 하는 일이라는 걸 신입사원들은 알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