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진을 ‘2만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하면 피해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2만 건 있었다’라는 거다. …2만 가지 죽음에 각각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 유명 영화배우 겸 감독 기타노 다케시(비트 다케시)가 〈슈칸 포스트〉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2만 건의 죽음에는 각각 2만 가지 소설 같은 사연이 있고 고통이 있다. 한국 교민 엄씨 남편의 죽음도 그중 하나이다. 미야기 현 해안 도시 이시노마키(石卷) 시에 사는 엄씨는 지난 3월11일  오후 쓰나미 경보 방송을 듣고 놀랐다. 주민들은 산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차가 없는 엄씨 가족은 두 발로 뛰었다. 하지만 암 투병을 하는 엄씨 남편(일본인)은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남편은 “나를 포기해라. 어차피 병으로 죽을 몸이다”라며 가족을 설득했다. 뒤에서는 엄청난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결국, 가족은 그를 두고 가기로 했다. 혹여 시신을 찾지 못할까봐 아들은 아버지를 근처 나무 아래 두고 끈으로 몸을 동여맸다. 

쓰나미가 지나가고 물이 빠진 뒤 엄씨 가족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자위대 군인들이 나무에 묶인 엄씨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만약 아들이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를 묶지 않았다면 시신은 가족과 다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시사IN 신호철이시노마키 시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한국인들(위). 센다이 영사관까지 오는 데 6일이 걸렸다.

이 이야기는 엄씨와 같은 이시노마키에서 쓰나미를 맞은 한국인 네 명이 전한 일화이다. 김영순(52)·김영분(75)·김점순(62)·서원석(69) 씨. 이 네 명의 탈출기 역시 드라마였다. 이들이 쓰나미 때 한자리에 모였던 이유는 일본 교민 김영순씨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사는 언니들과 형부가 3월11일 센다이 공항을 통해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차를 몰고 탈출하다가 근처 학교 안으로 피신했다. 물이 2층까지 차올라 4층으로 도망쳤다. 학교에서 사흘간 고립된 이들은 음식물을 전혀 섭취하지 못한 채 극한의 시간을 보냈다. 3월13일, 헬리콥터가 나타나자 김씨 자매는 창문을 열고 우산을 펴 흔들며 구조를 요청했다. “일본인은 그냥 교실에 앉아 있더라. 답답했다”라고 김점순씨는 말했다.

얼마 뒤 자위대가 학교에 왔다. 김씨 일행은 자위대 트럭을 타고 근처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상황이 더 열악했다. 마당에 세워진 간이 텐트가 병실이었다. 한국인 네 명은 김영순씨 집이 있는 마을로 데려다 달라고 군인을 졸라서 결국 이시노마키로 돌아왔다. 집은 이미 쑥대밭이 되어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우연히 근처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집 하나가 있었는데, 한국 교민의 집이었다. 그 집에 한국인 열두 명이 모여 살게 되었다. 전기·통신·교통이 끊긴 상태에서 그렇게 또 이틀을 버텼다. 3월16일 마침내 한국 정부와 연락이 닿은 김씨 일행은 영사관이 파견한 직원의 도움을 받아 악몽 같은 ‘이시노마키 여행’을 끝내고 센다이 영사관에 도착했다. 

이시노마키 한국 교민 집에서 모여 산 열두 명 중 한 명이 엄씨였다. 영사관을 통해 엄씨의 이름이나 나이 등 인적사항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복수의 사람에게 확인한 이야기라 그리 과장된 것 같지는 않다. 엄씨는 아직 이시노마키에 살고 있다.

기자명 센다이·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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