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파격 배치된 〈에반게리온:서(序)〉 상영 모습.
‘아!’ ‘걸작이야.’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서(序)〉 언론 시사회가 열리던 지난 1월7일 서울 용산 CGV.여느 시사회와 달리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자리가 모자라 계단에 쭈그려 앉거나 벽에 기대어 보는 기자도 적지 않았다.

12년 만의 귀환으로 일컬어지는 ‘에바(에반게리온의 애칭) 시리즈’의 첫 작품 〈에반게리온:서(序)〉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 소문은 지난해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이 작품을 폐막작으로 선정하는 파격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영은 일본 바깥에서 갖는 세계 첫 시사회가 되었고, 예매를 시작한 지 30분도 채 안되어 폐막식장의 야외 객석 5000석이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정식 개봉은 1월24일. 영화사 측은 입소문을 기대하고 ‘선행 상영’이라는 이름으로 1월19일부터 유료 시사회를 연다. 작품을 둘러싼 ‘설왕설래’가 심상치 않다. 호들갑 아닌가, 오버 아닌가라는 딴죽도 눈에 띈다. 영화사 말마따나 이미 에바가 전설 혹은 신화가 되어버린 탓이다.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총 26편으로 방영된 〈신세기 에반게리온〉 TV 시리즈를 재편집해 비디오와 DVD로 출시했지만, 1997년과 1998년 일본에서 개봉된 극장판을 한국에서는 정식으로 감상할 기회가 없었다. 최초의 극장 개봉이니 한국의 에바 팬들에게는 ‘특급 이벤트’이다. 

100개 미만 스크린으로 일본 박스오피스 ‘1위’

새삼 ‘에바’의 매력을 들추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이다. 10여 년 전부터 영화 전문지들은 일본에서 제작 발표회나 개봉을 할 때마다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관객을 흥분시켰던, 퍼즐 맞추기 혹은 숨은 그림찾기 식의 토론과 논쟁도 얼추 끝이 났다.

평자의 반응도 품평하려는 태세를 일찌감치 벗어던지고 반색 일색이다. 영화평론가 김봉석은 이번 작품에 대해 “12년 전에 불가능했던 영상과 음향을 보완하는 정도가 아니다. 자기가 창조한 인물과 세계는 이미 완벽했지만, 안노 히데아키는 〈에반게리온〉을 새로운 차원으로 다시 한 계단 끌어올렸다. 세월의 무게만큼 안노 히데아키는 성장했고, 에반게리온은 진화했다. 왜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 일류인지 보여주는 걸작의 광대한 시작을 보여준다”라는 최상급 찬사를 들려주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일본에서 〈에반게리온:서(序)〉를 개봉하면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선언문을 통해 “지금까지 에반게리온만큼 새로운 애니메이션은 없었다”라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당시 실적은 에바의 전설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영화는 블록버스터 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최초 개봉 스크린은 고작 84개. 관객은 새벽부터 극장 앞에 진을 쳤고 캐릭터 관련 상품도 순식간에 동이 났다. 100개가 되지 않는 스크린 수에도 불구하고 수백 개 스크린을 확보한 영화들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연합뉴스발매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5000석이 매진되었다.
이 작품은 과거의 향수에만 기대고 있지는 않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작품을 리빌드(Rebill)’했다고 표현했듯 기본 설정은 같지만 캐릭터와 플롯 등을 새로이 구성했다. 시각 효과는 현란해졌고, 이야기는 훨씬 친절해졌으며 주인공의 캐릭터도 더 선명해졌다. 자폐 분위기와 신비주의 등을 일정 부분 걷어내고 대중 소구력을 갖춘 셈이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주인공 못지않게 인기를 누린 캐릭터 가오루를 급작스럽게 미리 등장시키는 ‘떡밥’도 선보였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3편이 이번 작품처럼 설명이 친절할지는 미지수이다.

스크린으로 에반게리온을 볼 수 있게 된 특급 이벤트를 앞두고 한국의 에바 팬들도 ‘흥분 모드’에 돌입했다. 한국에 에바 신드롬이 몰아친 것은 1990년대 말이다. 1995년 일본에서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되자 한국에도 곧 바람이 불어닥쳤다. 당시는 PC 통신 문화가 만개하던 시기이다. 특히 애니메이션과 SF 동호인의 밀집도가 높았는데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그 터전 위에서 급속히 전파되었다. 

지난해 9월 일본에서 신극장판이 개봉되었을 때 작품을 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애니메이션 애호가 신동혁씨도, 당시 ‘어둠의 경로’를 통해 작품을 보고 함께 토론했던 ‘그때 그 멤버’이다. 회사원인 그는 일본 개봉에 맞추느라 여름 휴가를 늦춰 일본으로 향했다. 그는 감회가 새롭다. 지금처럼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유통을 생각할 수 없었기에 당시 동호인들은 일본의 텔레비전 전파가 잡히는 부산까지 달려가 작품을 ‘뜨는’ 일이 심심치 않았고,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 거친 화면에 초벌 번역한 대본을 내려받아 보면서 토론을 벌이곤 했다. 신동혁씨는 “특정 작품에 대한 애정이 12년 동안 지속되는 것을 보고 솔직히 부러웠다. 정교하고 비싼 피규어나 캐릭터 상품들이 금세 동이 나는 것을 보면서, 작품의 매력이 뜨거운 팬덤을 낳고 그 애정 덕에 작품이 생명을 이어가는 선순환을 목격하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고백했다.

ⓒFlickr프라모델 파친코 게임기 등 〈에반게리온〉 파생 상품 판매도 기록적이었다.
애니메이션 애호가인 그의 블로그(blog.naver.com/batman691)는, ‘당분간 에바에 올인!’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다. 에바와 관련된 글, 본인이 수집한 제품 정보 일체를 보기 좋게 정리해놓았다. 그는 “마흔이 코앞”이라며 쑥스러워했다.

에바가 워낙 중독성이 강한 탓에 신씨와 같은 열성 팬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근 개설된 에바 공식 카페(cafe.naver.com/eva2008)는 자기가 어떻게 에바 마니아가 되었는지, 자신에게 에바는 어떤 의미를 띠는지 고백하는 글로 속속 채워지고 있다.

미국의 〈스타워즈〉, 일본의 〈에반게리온〉

1995년 텔레비전 시리즈물로 첫선을 보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미스터리한 전개에 그노시즘(영지주의), 사이코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심리 묘사에다 생략과 비약, 암시 등으로 행간을 잔뜩 넓혀놓은 작품이다. 정보를 짜맞추고 토론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작품의 얼개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밀도가 높고 정보량이 방대했다. 그런 작품의 특징과 당시 막 퍼져가던 컴퓨터 통신 문화가 맞물리면서 에반게리온은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사회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은 “비디오 정지 화면이나 슬로 모션이 아니면 알아보기 힘든 화면 또는 복선을 잔뜩 깐 대사가 있는데, 그 부분을 재확인한 팬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단순한 감상에 그치지 않고, 교류하는 즐거움까지 줘 관객을 많이 모은 것 같다”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1996년 26부작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선풍을 일으켰던 안노 히데아키(왼쪽)가 총감독을 맡아 앞으로 총 3편의 극장판을 더 만든다.
에바에 대한 몰입은 일부 마니아만의 특이 취향은 아니었다. 국회도서관 자료를 검색해보면 1990년대 말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에반게리온 시리즈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거나,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은 석사 논문이 30여 편에 이른다. 에반게리온 서사의 특징에 관한 연구, 에반게리온의 사회적 영향력에 관한 연구, 심지어 사용된 음악에 관한 연구 따위가 그것이다.

자크 데리다를 원용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해체적 특성을 연구한 석사학위 논문까지 나왔다(〈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나타난 해체적 특성에 관한 연구〉, 임소향, 홍익대 2003). 논문에서 저자는 ‘거대 로봇 에니메이션의 공식과도 같았던, 나는 선(善)이고 적은 곧 악(惡)으로 삼는 구도를 따르지 않는 파격을 선보였다’라고 품평했다. 형이상학적인 이원론적 세계관의 해체뿐 아니라 알레고리의 배치, 패스티시적 연출 등 포스트모던한 작품으로서 면모를 꼼꼼히 분석해 눈길을 끈다.

 ‘가이낙스가 연이은 흥행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이미 검증된 안전한 레퍼토리를 다시 팔기 시작했다’는 삐딱한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충성도 높은 레퍼토리는, 작품을 품평의 대상을 넘어선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과거 미국의 〈스타워즈〉 시리즈가 그랬듯, 에바 시리즈는 일본에서 이미 사회현상이 되었다. 한국에서야 그 정도의 파괴력을 갖기 힘들겠지만, 밤을 새우며 작품에 열광했던 에바 팬들을 위한 성찬으로는 손색이 없을 것이다.

에바의 행로

1995년 10월 TV도쿄에서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방영 시작.
1996년 3월 총 26회로 TV 애니메이션 종영.
1997년 3월 〈신세기 에반게리온:데쓰 앤 리버스〉 일본 개봉.
1997년 7월 〈신세기 에반게리온: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일본 개봉.
2007년 9월 〈에반게리온:서(序)〉 일본 개봉.
2008년 〈에반게리온:파(破)〉 개봉 예정(3?4부 개봉 시기는 미정).

숫자로 본 에바 열풍
시리즈 총 매출액 약 15억 달러.
CD/비디오 총 매출량 1000만 개 이상.
극장판(1997~1998) 2편 박스오피스 수익 4500만 달러.
파친코 게임 ‘CR 신세기 에반게리온, 세컨드 임팩트’ 총 2만3600개 점포 23만 대 보급.
프라모델 키트(반다이) 152만 세트 이상 판매
PC/PS2 출시 게임 소프트웨어 판매 100만 개 돌파. (자료 제공:태원엔터테인먼트/무비앤아이)

 

기자명 노순동 기자 다른기사 보기 lazysoon@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