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경북대 교수·경제학)요즘은 정권 교체기인지라 염량세태(炎凉世態)가 더욱 뚜렷하다. 권력을 좇는 부나방이 도처에 출몰하는 걸 보니 어김없이 배신의 계절이 돌아온 모양이다. 선비와 지도자가 이익을 좇아 지조를 버리니….
지난해 말 〈시사IN〉은 자문위원 100명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올해의 인물’과 ‘최악의 인물’을 선정했다. 필자도 100명 중 한 사람으로서 답을 보냈는데, 여기서 좀 난처한 일이 생겼다. 즉, 필자가 노무현 대통령을 최악의 인물로 선정했다는 기사가 나간 것이다. 독자들은 ‘한때 대통령의 참모였던 사람이 이럴 수 있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배신행위라고 보고 분개한 사람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 필자의 대답이 맞바뀌어 입력되는 바람에 생긴 사건이다. 그 다음 주에 바로 정정 기사가 나갔지만 바로잡는 난은 작아서 독자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필자가 청와대에서 2년6개월간 일하면서 각종 필화, 설화에 단련된 덕분에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지만 이번 건은 좀 기묘한 경우에 속한다고 하겠다. 경위야 어쨌든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 주워 담을 수는 없고, 차제에 의리와 지조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대통령 참모가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랴

중국 진(晉)나라의 협객 예양(豫讓)은 자기를 국사(國士)로 대접해주었던 주군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면서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士爲知己者死)”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예양은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오는 협객 가운데서도 연나라의 형가(荊軻)와 더불어 중국인이 으뜸으로 꼽는 의리의 사나이다. 예양이 주군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과정은 비장한 느낌마저 준다. 예양의 죽음을 접하고 당시 뜻있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사마천은 썼는데, 예양의 의협심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바가 있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어도 인간관계에서 의리가 기본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하물며 5년 내내 사면초가였던 참여정부에 대해서, 더구나 최악의 상황에 몰려 있는 대통령에 대해서 참모가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려서야 되겠는가. 필자는 청와대를 나온 뒤 한·미 FTA와 사학법 개악에 관해서는 글과 강연을 통해 비판했지만 참여정부의 철학에 기본적으로 공감한다. 사실 참여정부는 ‘공(功)’과 ‘과(過)’가 함께 많은 정부인데, 지금은 모든 손가락이 ‘과’ 쪽을 가리키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드러난 성난 민심도 하나의 징표다. 그러나 ‘역사의 신’이 있어서 먼 훗날 참여정부의 공과(功過)를 재채점할 것이고, 참여정부의 ‘공’이 높은 점수를 받을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그 전에는 어떤 변명이나 항변도 허공을 맴돌 뿐, 돌아오는 것은 ‘아직 정신 못 차렸다’거나 ‘오만과 독선’이라는 딱지뿐이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좋겠다. 패장(敗將)은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 하지 않던가.

기회주의 처세가 칭송받는 세상

조지훈 선생은 지금도 명문으로 널리 읽히는 ‘지조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그렇다. 지조와 의리가 어찌 선비나 교양인만이 지켜야 할 덕목이리오마는 우리 사회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선비나 지도자의 자세다. 문제는 선비나 지도자라는 사람이 생각과 말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고, 이익을 좇아 지조를 버리고 시류에 영합하는 데 있다. 게다가 이런 부류의 인간일수록 처세에 능하고, 세상 물정에 밝다고 칭송받는 경향까지 있다. 아마 선진국이라면 이런 기회주의는 좀처럼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마침 요즘은 정권 교체기인지라 염량세태(炎凉世態)가 더욱 뚜렷하다. 권력을 좇는 부나방이 도처에 출몰하는 걸 보니 어김없이 배신의 계절이 돌아온 모양이다. 〈채근담〉에서 말하기를 “한때 적막할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을 남기지 말라”고 했는데, 이런 소박한 경구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그만큼 세태가 경박하기 때문이 아닐까.

※ 외부 필자의 기고는 〈시사IN〉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자명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