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일(문화 평론가)대선 결과를 놓고 민주화 이전으로 역행했다, 민주화 세력에 대한 심판이다 따위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그보다 주목할 건, 갈 곳 없던 수백만 표의 존재다. 합리적 진보 세력을 기다리는 유권자의 소리 없는 성장이다.
대선 결과는 참 난감했다. 득표 차이가 531만7708표라니! 민주 국가에서 이 정도 차이로 당선하려면 ‘국민의 아버지’로 압도적 존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선거 기간 내내 도덕성 시비에 휘말려도 표의 절반이 쏠렸다. 그 후보가 내세운 정책 슬로건은 단 하나, ‘경제를 살리겠다’뿐. 그렇다면 ‘우선 내 주머니 두둑하게 해준다면 그 누가 대통령인들 어떠하리’가 인구의 절반이란 말인가.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보수 정치의 유구한 정치 환각제인 ‘경제’라는 말의 신기루에 또다시 현혹된 건 아니겠지!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있는 세계화한 자본주의에서 대통령이 나라 경제를 단박에 업그레이드하는 마술을 부린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설마 제 손으로 민주화를 이룬 시민이 ‘1987년 민주화’ 이전으로 단박에 20년을 퇴행하기로 작심한 것은 아니겠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외국 석학이 한국의 대선을 역주행으로 해석하지 않는가. 1월8일 경향신문에 실린 개번 매코맥의 칼럼은 그 까닭까지 조목조목 적고 있지 않은가. 현재의 세계 정치 지형에서 민주 국가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이라크 전쟁에 대한 거부,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 지구 생태 위기에 대한 관심이 한국 대선에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제3자가 민주주의 진화의 일반적 과정을 거시적 틀로 적용하면 이번 대선은 ‘퇴행’으로 낙착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눈은 특수한 조건에 좀더 예민한 법이다. 최장집 교수의 해석은 다르다. 그는 이번 대선의 핵심을 민주화를 내세운 참여정부의 내적 비민주성에 대한 유권자의 심판으로 본다. 자기들을 지지한 정치 세력을 대변하지 않고 신자유주의로 정책 선회를 한 것이 ‘대의’에 대한 ‘대리인’의 배신이고, 그것은 곧 독선이라는 말이다. 이번 대선은 바로 민주화를 내세운 정권의 ‘관료화’에 대한 환멸이 주된 동력이라는 것이다. 이 해석이 맞다면, 이번 대선은 퇴행이 아니라 진보라야 한다. 시민 권력의 위임이라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기본이 무시당한 데 대한 유권자의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유권자는 왜 민주노동당으로 가지 않고 한나라당으로 몰려갔을까? 민노당 역시 계파 갈등에 휩싸여 표심과 거리가 먼 권영길씨를 후보로 내세우는 정파의 독선을 보였기 때문일까?

정파 이해에만 봉사해온 ‘정치 도그마’에 대한 환멸의 표현

난 나 그림
하루아침에 한국 사회가 20년을 퇴행할 리는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이 민주주의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 민주화 세력에 대한 심판이라는 지적도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 ‘대의’라는 민주 절차를 지키지 않은 정권은 참여정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서 나타난 분노는 그 무엇을 외치든 실질적 삶의 민주화와 무관하게 현실 정치에서 정파적 이해에만 봉사해온 ‘정치 도그마’ 그 자체에 대한 누적된 환멸의 표현으로 봐야 한다. 그러니 정치 경력이 일천한 건설업자가 정치판의 말놀이에 찌들지 않은 일꾼으로 보이고, 도덕성 시비조차 정치꾼의 게임으로 무시당하지 않았을까?

이번 선거에서 중요한 건 이명박이 아니다. 더디지만 실질적인 민주화를 밀고 나갈 합리적 진보 세력을 기다리는, 갈 곳 없는 수백만 표의 존재다. 얌전한 말의 진심에 지혜롭게 화답할 귀 밝은 유권자의 조용한 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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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남재일 (문화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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