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 의심과 불협화음의 순환 고리를 끊어야 하며, 미국과 무슬림 간에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 6개월 뒤인 2009년 7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무슬림 세계와 화해를 다짐하며 연설한 내용이다. 55분간 행한 연설에서 특히 주목되는 대목은 “조악한 고정관념으로 무슬림을 대하는 게 맞지 않듯이, 미국도 이기적인 제국이라는 조악한 고정관념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라는 부분이다. 미국은 아랍을 넘보는 제국주의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요즘 반정부 민주화 시위로 혼란을 겪는 리비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 여부를 놓고 오바마 대통령의 고민이 깊다. 미국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 구역을 설정한 뒤, 반군과 민간인 공격에 투입된 리비아 전투기들을 파괴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럴 경우 뒤따를 값비싼 정치적 대가이다. 미국이 인도적 작전이라는 명분으로 리비아 ‘내정’에 간섭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고, 자칫하면 미국이 아랍 세계를 침공하는 제국주의라는 인상을 줘서 반미 감정을 촉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는 비행금지 구역 설정 움직임을 ‘리비아의 부와 원유를 탈취하려는 서방세계의 기도’라고 단정한 상태다. 그러나 무작정 군사 작전을 늦추다가 실기할 경우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한 르완다 사태가 리비아에서 재현될 수도 있다.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리비아 군사 개입 여부를 놓고 진퇴양난인 상황이다.

ⓒAFP오바마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으면 모든 군사 수단을 배제하지 않겠다”라고 으름장을 놨지만, 카다피는 오히려 반군을 더 몰아붙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미 3주를 넘긴 리비아 사태가 반군과 정부군 간에 내전을 벌이는 양상이 되자, 카다피 국가원수에게 권좌에서 물러나 리비아를 떠나라고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그리고 “물러나지 않으면 모든 가능한 군사 수단을 배제하지 않겠다”라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실제로 미국 국방부는 오바마의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 리비아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감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리비아의 민중 봉기를 지원하기 위해 미군이 무슬림 국가를 공격하는 데 따를 정치적 부담 때문에 미국은 직접적인 군사 작전보다는, 이에 못지않게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군사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이를테면 공해상에서 미군이 강력한 방해 전파를 쏘아올리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리비아 정부군 간에 교신을 주고받는 데 혼선이 생겨, 미군이 총 한 방 쏘지 않고도 리비아 정부군을 혼란에 빠트릴 수 있다. 리비아 반군에게 무기와 보급품을 공수하는 방법도 있다.

비행금지 구역 설정, 중국·러시아 반대할 수도

이 같은 군사 방안 가운데 가장 파급 효과가 큰 것이 비행금지 구역 설정이다. 미국 내에서도 카다피의 민간인 학살이 도를 넘은 것으로 판단하고,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오바마 대통령이 하루빨리 비행금지 구역을 선포하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대표적 인사가 오바마 대통령의 강력한 우군인 존 케리 민주당 상원의원이다. 그러나 비행금지 구역 설정에 관한 오바마 행정부의 견해는 아직 유동적이다. 윌리엄 데일리 백악관 비서실장은 NBC 방송에 출연해 “많은 사람이 비행금지 구역을 마치 비디오 게임처럼 쉽게 말한다”라면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오바마 대통령도 비행금지 구역 설정을 언급한 적은 있지만, 아직 실천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미 전임 부시 대통령에게서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물려받은 상태다. 두 전쟁 모두 무슬림 땅에 미군이 개입해 일어난 전쟁이다. 리비아까지 전선을 확대하면 미국은 무슬림 국가 3개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 직면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이집트 카이로 연설에서 미국은 이라크건 아프가니스탄이건 ‘제국주의적 야망’이 없다는 점을 애써 강조한 바 있다. 그렇지만 리비아 내전에 군사 개입을 하게 되면 그 순간 카이로 연설의 정신은 사라진다. 이 같은 오바마의 심정을 간파한 듯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도 미국이 자칫 중동의 또 다른 전쟁에 휘말릴 염려가 있고, 설령 비행금지 구역을 선포하더라도 미군 전투기가 리비아 방공망을 제일 먼저 섬멸하는 임무를 맡게 될 것이어서, 아주 위험하고 복잡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Xinhua카다피.

사실 비행금지 구역만 설정된다면 리비아 전투기의 출동 자체를 봉쇄해 작금의 무자비한 살육 행위는 막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1999년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유엔을 설득해 보스니아 상공 일대에 비행금지 구역을 설정해 보스니아군이 세르비아에서 벌이던 무슬림 살육을 중단한 바 있다. 당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78일간 비행금지 구역을 철저히 실행하는 바람에 세르비아의 지도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알바니아 소수민족에 대한 대량 살상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1991년 걸프전쟁 당시에도 미국과 동맹국이 이라크 영공에 비행금지 구역을 설정함으로써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이 북부 쿠르드족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

최근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을 사임한 앤마리 슬로터 박사도 “카다피의 민간인 살육을 방치해선 안 된다”라면서 비행금지 구역 설정에 찬성했다. 그러나 그는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유엔의 지지가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미국이 비행금지 구역안을 유엔안보리에 제출해도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의 지지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슬로터 박사는 차선책으로 먼저 리비아 과도정부가 비행금지 구역 설정을 미국에 요청하고, 아프리카 연맹과 아랍 연맹이 이런 요청에 연대 지지를 보낼 경우 미국이 행동에 나설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현재 리비아에는 반군은 있어도 임시 과도정부는 없기 때문이다.

ⓒReuter=Newsis19개월 전 오바마 대통령(왼쪽)은 이집트를 방문해 “미국은 아랍을 넘보는 제국주의 나라가 아니다”라고 공언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카다피 국가원수의 자진 퇴진을 일단 최상의 옵션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힘든 상황에서 차선책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고도 이집트와 튀니지처럼 리비아 국민이 강제로 그를 퇴진시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미국 단독으로 비행금지 구역을 선포하고 행동에 나서는 경우를 상정해볼 수 있지만 국무부와 국방부 등 유관 부처 내에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존재한다.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의 경우 비행금지 구역 설정에 찬동하지만, 실제로 작전을 맡게 될 국방부는 엄청난 전비와 군사 개입에 따른 격렬한 반미 감정의 고조를 염려해 꺼리는 것으로 알려진다.

오바마 대통령도 현재로서는 미국의 리비아 작전은 피란민 구출과 관련한 인도적 작전에 국한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리비아 내전이 장기화되어서 민간인 살육이 계속될 경우 오바마 대통령이 비행금지 구역 설정과 같은 카드를 꺼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오바마 대통령은 전임 부시 행정부 때처럼 단독 행동이 아니라, NATO 혹은 아랍 연맹이나 아프리카 연맹과 공조하면서 군사 작전에 나설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기자명 워싱턴·권웅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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