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 김씨(47)와 동생 김경준씨(45)는 사이가 각별했다. 김경준씨 부인 이보라씨는 두 사람에 대해 “서로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연인 같은 남매였다”라고 말했다. 에리카 김씨는 “나는 엄마 같은 누나였다. 경준이는 항상 오빠 노릇을 하는 동생이었다”라고 말했다. 에리카 김씨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녀가 코넬 대학에 다닐 때 남학생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김경준씨가 1년 뒤 코넬 대학에 들어가 누나를 희롱한 남자를 두들겨 패준 적도 있다.

에리카 김씨와 이명박 대통령도 관계가 각별했다. 2007년 11월 기자와 만난 김씨는 “한때는 특별한 사이였다”라고 말했다. 첫 만남은 1994년 이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한인교회에서 간증을 하면서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BBK 문제가 불거질 때까지 약 10년간 지속되었다. 에리카 김씨의 말이다. “이명박씨는 말도 못하게 ‘짠돌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항상 밥 사주고 잘해줬다. 사건이 나서 사이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내가 한국에 나가면 이명박씨가 항상 공항으로 차를 보내 픽업해줬다. 이명박씨가 로스앤젤레스에 들어올 때에는 내가 공항에 픽업을 나갔다.”

ⓒ시사IN 주진우 안희태에리카 김씨(왼쪽)와 김경준씨(오른쪽)는 미국 한인 사회에서 성공한 인물로 유명했다. 하지만 BBK 사업으로 동반 추락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경준씨가 만난 것도, BBK를 시작한 것도 에리카 김씨 때문이었다. 지금 이 대통령은 김경준씨와 에리카 김씨를 사기꾼이라고 주장한다. 이 대통령의 주장대로 BBK 사건을 재구성해보자. 2000년 2월18일 이명박 대통령은 30억원을 출자해 김경준씨와 BBK의 지주회사 격인 LKe뱅크를 설립했다. 이 대통령이 서른네 살 교포 청년 김경준씨와 만난 지 고작 한 달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당시 김씨는 살로먼스미스바니 증권사에서 실적을 부풀리고, 다른 회사 펀드 설립에 관여했다가 쫓겨난 상태였다. 이 대통령은 김경준씨를 ‘아비트리지(차익거래)의 귀재’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회사 투자금은 모두 이 대통령 주변에서 모아주었다. 친구 부인에게서 7억원, 친형 이상은씨가 소유한 다스로부터 190억원, 지인이 대표로 있는 심텍으로부터 50억원, 절친한 대학 동기 김승유씨가 행장으로 있던 하나은행으로부터 5억원, 삼성생명으로부터 100억원을 모았다. 2001년 11월 심텍은 이 대통령과 김경준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고 돈을 되돌려 받았다. 하나은행 돈 5억원은 대통령이 직접 물어주었다.

2007년 대선의 핵으로 떠오른 김경준씨

BBK가 본격적으로 논란이 된 것은 2006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였다. 박근혜 후보 진영의 핵심인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은 “이 후보가 BBK 측으로부터 2001년 50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송금받았다. 다스가 BBK에 투자한 돈도 이 후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명박 대통령 측에서는 BBK라는 말만 나오면 펄쩍 뛰었다. “BBK와 아무 관련이 없다” “BBK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대통령에 당선한다 해도 직을 걸겠다….” 이 대통령이 주장한 김경준씨와 처음 만난 시점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대통령이 BBK 회사 명함을 사용했고, 대통령이 〈중앙일보〉 〈월간중앙〉 〈이코노미스트〉 〈일요신문〉 등에 BBK를 세웠다고 홍보한 것이 드러났다. 당시 한나라당 한 의원은 “이 후보가 그때그때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하다보니 일이 꼬이고 판이 커져버렸다”라고 말했다. 대선은 점점 BBK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BBK 의혹은 대선의 마지막 변수로 떠올랐다.

1994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에리카 김씨(왼쪽)를 만났다. 둘의 첫 만남이었다.

대선을 한 달 앞둔 11월16일 김경준씨가 귀국했다. 강제 송환이었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김경준씨는 “이면계약서가 이명박 후보가 BBK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에리카 김씨도 입을 열었다. “내 동생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이명박씨도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 뒤 이면계약서에 찍힌 도장의 진위가 BBK 폭탄의 뇌관으로 떠올랐다. 이명박 후보 측은 “김경준씨가 인감도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문서 위조가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은 “한글 계약서에 찍힌 도장은 이 후보의 것이 아니다. 100% 위조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계약서에 찍힌 도장이 2000년 LKe뱅크 회사 관련 서류에서 무더기로 발견됐다. 검찰도 계약서 도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BBK와 이 대통령의 연루 의혹이 증폭되는 상황이었다.

“검찰이 이명박을 무서워해요”

그런데 갑자기 계약서가 통째로 위조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기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며 BBK 사건을 취재하고 있었다. 에리카 김씨를 수차례 만나 인터뷰까지 한 상태였다. 현지 시간 12월3일 밤 에리카 김씨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급히 사무실로 와달라고 했다. 에리카 김씨는 한글 이면계약서의 도장이 이명박 후보의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검찰이 김경준씨와의 거래를 통해 수사의 물꼬를 돌렸다고 주장했다. 에리카 김씨는 “검사들은 이명박씨가 어차피 대통령이 될 사람이어서 수사가 안 되니 기소할 수 없다고 동생을 설득했다. 이명박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면 동생에게 3년을 구형해 집행유예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며 동생이 진술을 번복하도록 했다”라고 말했다. 김경준씨 아내인 이보라씨는 “검찰은 남편 혼자 이면계약서를 위조했고 훔친 도장을 찍었다고 거짓말을 하라고 협박했다”라고 말했다.김경준씨가 진술을 번복하자 수사가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자가 “믿을 수 없다. 검찰이 그럴 이유가 없다”라고 반문하자 에리카 김씨는 메모지 한 장을 건넸다. 김경준씨가 검찰 수사를 받던 11월23일 검찰청 조사실에서 장모에게 써준 메모였다. “지금 한국 검찰청이 이명박을 많이 무서워하고 있어요. …저에게 이명박 쪽이 풀리게 하면 3년으로 맞춰주겠대요. 그렇지 않으면 7~10년.” 이 메모지 아래에는 김경준씨 장모가 “내 생각에는 3년이 낫지 않을까?”라고 쓴 대목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경준씨가 함께 등장하는 eBank-Korea 홍보 책자.
기자가 다시 믿을 수 없다고 하자, 에리카 김씨는 메모를 뒷받침하는 녹음 테이프를 건넸다. 테이프에는 김경준씨가 에리카 김씨에게 검찰의 제안을 상의하는 내용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 사실 확인 절차를 거쳐 이 메모는 2007년12월4일 〈시사IN〉 인터넷 판에 보도되었다. 에리카 김씨는 검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본 후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었다. 에리카 김씨는 “검찰이 편파 수사를 하고 있다는 내용을 구체적인 증거와 자료를 가지고 밝히겠다. 아울러 이명박씨와 나의 사적이고 특별한 관계까지 이야기하겠다”라고 말했다.

12월5일 검찰은 BBK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BBK와 이명박 후보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완벽한 무혐의 처분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사용한 BBK 명함과 언론 인터뷰 등에 대해 김홍일 당시 서울지검 3차장검사(현 대검 중수부장)는 “객관적으로 BBK가 김경준 소유이고, 이 후보가 무관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더 이상 수사할 필요가 없어서 확인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검찰 스스로 한계를 인정한 것은 다스 관련 의혹 수사였다. 검찰은 친형 이상은씨가 190억원을 BBK에 투자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은 다스의 대주주인 이상은씨를 직접 조사하지 않았다. 이명박 후보도 조사하지 않았다.

검찰은 김경준씨 메모에 관해서는 ‘저열한 정치극’이라며 격하게 반박했다. 김홍일 3차장검사는 “김씨가 ‘혐의 사실을 인정하면 풀어줄 수 있느냐’고 물어봤고, 한국은 미국과 달리 그런 제도가 없다고 설명한 뒤 거절했다”라고 말했다. 김 차장검사는 “중요한 조사는 다 녹음·녹화했다”라고 말했다. 김씨가 먼저 ‘플리바게닝(사전 형량 조정)’을 요구했다는 부분을 공개할지 검토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검찰은 끝내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시사IN〉이 보도한 김경준씨의 메모.

기자회견을 하겠다는 에리카 김씨를 12월5일 검찰은 횡령 사건의 공범으로, 범죄인 인도 청구 절차를 밟아 국내로 송환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에리카 김씨는 기자회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보다 동생이 검사들에게 시달리는 것이 무섭고 두렵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글을 삐뚤빼뚤 쓰는 것처럼 경준이는 한국에서는 초등학생이다. 검찰이 이러자고 하면 이러고, 저러자고 하면 저러는 어린애다. 메모가 나와서 자존심을 다친 검찰에게 당할 경준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특검 “대통령 수사 때 예상 답변 갖고 가”

BBK 사건을 수사한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 소속 검사 10명은 김경준씨 메모를 보도한 〈시사IN〉과 기자를 상대로 6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에리카 김씨는 “사실 보도가 명예훼손이 되는가. 검찰이 언론을 고소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라고 말했다.

김경준씨의 메모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이 “BBK라는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라고 말하는 동영상 화면도 공개됐다. BBK 사건은 특검으로 갔다. 김경준씨는 특검 수사에서 검찰의 결론을 모두 뒤집겠다고 했다. 김씨의 장인 이두호씨는 “특히 검찰이 회유·협박한 부분에 대해서는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면서라도 밝히겠다. 메모가 공개된 이후 미국에 있는 사람을 소환하겠다고 위협하는 검찰의 행위도 특검 수사의 대상이 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통령보다 힘이 센’ 대통령 당선자를 수사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 특검은 수사 결과 발표를 나흘 앞두고 이 대통령을 조사했다. 꼬리곰탕을 먹으면서 이뤄진 실제 조사 시간은 1시간 남짓이었다고 한다. 문강배 특검보는 “당선자가 바쁜 점을 감안해 질문 사항과 예상 답변을 미리 컴퓨터에 쳐서 가지고 갔기 때문에 그 시간만으로 충분히 조사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예상 답변을 미리 만들어놓은 수사’는 검사들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BBK를 설립했다”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이 담긴 동영상.

특검 이후에도 김경준씨는 이명박 대통령과 동업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더욱 그를 옥죄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문무일 부장검사)는 2008년 3월26일 김씨가 수감된 서울구치소 외국인 사동 독방을 압수수색했다. 기획입국설 등 추가 기소할 부분과 관련된 물증을 찾기 위해서라는 이유에서였다. 재소자의 감방 압수수색은 매우 드문 일이다. 서울구치소 한 관계자는 “김씨는 압수수색에 격렬하게 저항했다”라고 말했다. 4월3일 김씨는 사문서 위조 등 혐의로 추가 기소된다. 결국 4월17일 1심에서 그는 징역 10년에 벌금 150억원을 선고받는다. 2008년 6월 재판에 나온 김씨는 “이명박 대통령께 끼친 피해에 대해 한없이 죄송하게 생각한다”라는 글을 읽었다. 이즈음부터 에리카 김씨는 기자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2009년 5월 김경준씨에게 징역 8년, 벌금 100억원 형이 확정되었다.

지난해 11월 김경준씨는 “다스는 이명박 대통령 소유다”라고 주장하는 육필 서류를 미국 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다스는 이명박 대통령이 실소유주이므로 이명박 대통령이 이 재판에 출석해야 한다.”

지난 2월25일 에리카 김씨가 입국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입국한 지 하루 뒤였다. 검찰은 에리카 김씨를 BBK 사건의 공범이자, BBK가 이명박 대통령의 회사인 것처럼 허위 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기소했다가 김씨가 미국에 머물며 입국하지 않자 기소를 중지한 상태였다. 2월25일 입국 직후 검찰에 출두한 김씨는 법적 절차를 빨리 마무리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BBK 사건은 모두 동생이 주도한 일이다”라고 검찰에서 진술했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BBK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김홍일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

김씨가 왜 지금 입국했는지를 두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 BBK 수사 검사는 “에리카가 왜 들어왔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나에게 좀 알려달라” 하고 말했다. 김경준씨 변호를 맡았던 홍선식 변호사는 “변호사로서는 모르겠다. 정치적으로는 꼭 털고 가야 하는 문제가 맞다. 가족 입장에서는 김경준씨를 미국으로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이 클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한상률 전 청장과 김씨가 동시 입국한 것을 놓고 기획 입국이 아니냐는 공방이 가열되고 있다. 한 검찰 고위 관계자는 “검찰과 조율이 돼서 들어온 것은 분명하다. 에리카 김이 BBK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해주면서 동생을 구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 한나라당 의원은 “김경준이 투항한 마당에 검찰이 에리카 김을 잡아둘 이유가 없다. 에리카 김의 이야기가 세간의 입에 오르는 것이 대통령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김씨를 붙잡아두기도 어려운 형편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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