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한향란
조병준은 조병준이다. 나이 마흔일곱의 이 남자. 그동안 한국방송개발원 연구원, 광고 프로덕션 조감독, 자유기고가, 극단 기획자, 방송 구성 작가, 대학 강사, 번역가 등 여러 직업을 거쳤지만 어느 직함도 그의 이름 앞뒤에 ‘이거다 싶게’ 붙이기 어렵다. 불성실해서가 아니다. 직업만으로 그를 온전히 드러내기가 어려워서다.

1990년, 방송개발원(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을 그만두고, ‘뭔가 있을 것 같았던’ 인도로 훌쩍 첫 배낭여행을 떠났던 즈음을 그는 “삶에 주눅 든 것 같은 시절”이었다고 표현했다. 한 달 계획으로 떠났던 여행은 석 달 반으로 길어졌다. 길에서 만난 수많은 방랑자들을 통해 그는 “사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다”라는 것을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여행가’라고 부르게 만든 첫 번째 해외 여행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여행가’라는 이름에 불편해한다. 여행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데 직업을 여행가라고 표현하다니. 그는 ‘여행 작가’라는 수식이 또한 거북살스럽다. 글을 쓰기 위한 목적으로, 취재를 위해 여행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행은 그저 기호품 같은 삶의 일부이다. 돈을 벌기 위한 여행은, 사절이다.

‘자원봉사자’는 어떤가. 조병준은 30대 시절, 10년 동안 인도와 유럽 등지를 여행했고, 다섯 번에 걸쳐 약 2년 동안은 인도 캘커타(Calcutta)에 있는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여러 책을 통해 독자들과 그 경험을 나누었고, 그 책이 씨앗이 되어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한국인들도 많이 생겨났다(어떤 이는 그의 블로그에 그 책들로 인해 인도에서 자원봉사를 했고, 그 경험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적었다). 그래서 책을 읽은 독자들은 조병준 하면 ‘자원봉사’를 떠올린다.

‘원 웨이 티켓’을 끊고 떠난 여행길이었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생각으로 떠난 여행길에서 만난 배낭족들은 인도 캘커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저 여행객들이 왜 자원봉사를 할까, 알아나보자’고 호기심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는 “그 경험은 자신의 모든 것이 튀어나오는 듯한 경험이었다”라고 말한다.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만났다.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았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 줄 거기서 알았다. 몸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한 갓난아기를 안았는데, 그 어린아이가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보고서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마음이 아픈 정도가 아니었다. 내 안의 마르크스, 혁명, 하느님, 신 등 모든 것이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곳에서의 경험이 그의 삶을 바꾸었다. 사람들 사이에 처박혀 있는 행복을 느꼈다. 자원봉사가 없는 목요일이면, 자기로 침잠하는 고요함을 느꼈다. 이 생생한 경험은 글까지 바꾸었다. 글에서 ‘관념’의 ‘관’자도 생각하지 말고, 먹물기가 쪽 빠진 글을 쓰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토록 소중한 경험을 얻었는데, 자꾸 ‘평화’나 ‘선행’ ‘자유인’의 이미지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불편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자원봉사자’라는 호명에서 스스로 벗어나고 싶어한다.

ⓒ뉴시스조병준 시인의 첫 시집 출간을 기념해 ‘그의 친구들’이 시음악극(위)을 열었다.
등단 15년 만에 첫 시집 펴내

글과 관련한 많은 일을 했고, 명함에 ‘글 쓰는 남자’라고 썼던 조병준이 아꼈던 이름이 있다. 시인. 1992년 〈세계의 문학〉에 등단한 이래, 15년이 넘도록 발표를 거의 안 했지만 시(詩)는 ‘글의 출발점이자 고향’ 같은 것이었다. 밥벌이로, 가족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산문을 계속 쓰느라 시에 매달리지 못했지만, 올해 초부터는 시에 몰입했다. 이유? “산전수전 다 겪은 배낭족이 어느 순간부터 배낭이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늙는구나. 더 늦기 전에 시에 매달리고 싶었다. 오랫동안 묵었던 것을 털어내고 싶기도 했고, 새로운 것으로 넘어가고 싶기도 했고.”

시인 조병준에게는 친구가 많다. 길에서 만난 친구들. 그가 쓴 책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에 나온 것처럼 나이 불문, 국적 불문 친구들이 많다. 연극, 영화, 문학, 여행 온갖 일을 하며서 맺은 인연들이 그를 아낀다. 이번에 그가 15년 만에 첫 시집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샨티 펴냄)을 펴낸다니, 그의 친구들이 앞장서 잔치를 열어주었다. 극단 무천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공연 기획을 함께했던 연출가 김아라씨와 젊은 예술가들이 지난 9월15일 대학로 동숭교회 앞마당에서 그가 쓴 시를 대본삼아 시음악극을 열어주었다. 음악인 이자람씨가 노래를 부르고, 젊은 예술가들이 가야금과 중국 악기 얼후를 연주했다. 여행 틈틈이 찍은 사진과 쓴 시를 엮은 사진 아포리즘 〈따뜻한 슬픔〉(샨티 펴냄)을 동시에 출간한다는 얘기를 듣고 어떤이는 사진 전시회를 열 조그만 카페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공연 개런티가 책 두 권’이 전부인 공연에 그의 친구 200여 명이 모였다. 그의 사진과 시는 ‘기대고 부빌 등 없는 슬픔들을 생각’하고, ‘차가운 세상, 차가운 인생 복판에서 서성이는 슬픔들’을 들여다보는데, 친구들은 그곳에서 따뜻함을 느낀다. 책 제목 ‘따뜻한 슬픔’처럼.

매번 스케줄이 없는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그는 ‘계획 없는 삶’을 준비한다. 그의 블로그(blog.naver.com/joon6078)에 쓴 글마냥 ‘인생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누가 아는가’. 배우로서 무대에서 느낀 열정을 그의 예술가 친구들과 다시 한번 느낄 수도 있고, 나이 마흔셋에 1년 반 동안 몸으로 느낀 ‘발레 수업’을 계속할 수도 있다. ‘몸이 겪은 것’을 글로 쓰는 작업은 여전할 것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년 3월, 네덜란드로 간다. 2000년 초 산티아고 여행길에서 만난 부부가 초청을 했다. 7년 동안 연락을 해왔는데, 한국인 딸을 입양한 노부부는 올해 5월 한국에 왔다 갔다. 그 친구의 60회 생일에 깜짝 손님으로 초청받아 간다.

글을 쓰든, 공연을 하든, 여행을 하든, 아니면 그가 힘들 때마다 찾는 인도 캘커타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빨래를 하고 있든. 그것은 그가 이 고단한 세상을, ‘조병준 식’으로 가로지르는 방식이리라. 그때도 조병준은 조병준이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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