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는 의미의 사자성어. 그런데 이 ‘성동격서 전략’은 전쟁뿐 아니라 ‘떼돈 벌기’에도 사용된다. 방법은 이렇다. 예컨대 냉장고 회사에 ‘공개적으로’ 투자하는 한편, 이 회사 냉장고 값을 둘러싼 도박장(파생상품 시장)에서는 오히려 ‘가격 폭락’ 쪽에 ‘몰래’ 베팅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평판 좋은 당신이 투자하는 만큼 그 회사를 신뢰하고 냉장고의 ‘가격 폭등’에 돈을 건다.

도박에선 다른 카드에 베팅하는 ‘꾼’이 많을수록 큰돈을 벌 수 있는 법. 예상대로 냉장고 가격이 폭락하면 당신은 웃으며 거액의 판돈을 챙길 수 있다. 200억원을 투자한 냉장고 회사의 주식은 휴지 조각이 되었지만, 도박판에서는 1000억원을 건지지 않았는가. 동쪽에서는 냉장고 회사 주식을 사고, 서쪽에서는 냉장고 가격 폭락에 베팅해 성공한 것이다.

ⓒ시사IN 조남진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이 추진하는 외환은행 합병에 맞서 외환은행 직원들은 ‘결사 반대’라는 슬로건을 사무실에 붙인 채 일하고 있다.

이런 수법으로 떼돈 벌었다는 혐의를 받는 거대 헤지펀드가 다른 투자회사들과 함께 한국 거대 금융기관의 주요 주주가 될 전망이다. 이 헤지펀드의 이름은 ‘페리캐피털’, 한국 금융기관은 국내 4대 금융그룹 중 하나인 하나금융지주(하나지주)이다.

김승유 회장의 ‘오락가락’ 행보

헤지펀드는 ‘금융계의 식인 상어’라 불리는 업태다. 엄청난 부자들만 투자할 수 있고, 규제는 거의 면제된다. 사모펀드도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두 업태 모두 거대한 자금을 동원해서 지극히 위험한 투기를 일삼는다. 다만 헤지펀드가 원자재·통화 등에 투자한다면, 사모펀드는 주로 기업 주식을 산다. 기업을 매입한 뒤 정리해고 등을 통해 주가를 높여 되팔고 나가는 것이다. 이런 업태들에 비해 하나지주는 안정성이 극히 중시되는 시중 은행(하나은행)을 핵심 자회사로 둔 금융 그룹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헤지펀드를 주주로 모시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승유 하나지주 회장이 어떻게 해서든 외환은행만은 인수하고야 말겠다고 굳게 결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뉴시스김승유 하나금융지주 회장.
지난해 11월25일 외환은행의 현재 오너인 해외펀드 론스타는 4조6900억원(외환은행 총주식의 51%)에 이 은행을 하나지주에 넘기기로 계약한다. 그런데 론스타에 지급할 배당금(3000억원)을 합치면 기본적 인수 자금만 5조원에 달한다. 하나지주는 자회사 하나은행· 하나대투 등의 배당금 2조2000억원, 회사채 발행 1조5000억원 등으로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1조2000억원 정도 더 필요해서 유상증자(주식을 새로 발행해서 자금을 조달)를 결심한다. 결국 하나지주는 기본 인수자금 5조원 중 55%인 2조7000억원을 외부에서 조달해야 하는 것이다.

계약한 다음 날인 지난해 11월26일, 김승유 하나지주 회장은 “사모펀드 유치는 언급한 적이 없으며 가급적이면 단순 재무적 투자자보다 전략적 투자자를 영입하려 한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재무적 투자자’는 기업 주식에 비교적 소액을 투자하고, 그 주식이 원하는 만큼 오르기만 하면 재빨리 팔아치우고 나간다. 반면 ‘전략적 투자자’는 기업을 키워 이익을 취하려 하므로 상당한 액수를 장기적으로 투자한다. 그런데 이런 ‘좋은 자금’은 유치하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김 회장은 보름여 만인 지난해 12월 중순 “조건만 맞으면 사모펀드라도 괜찮다”라고 후퇴한다. 이후 중국,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을 분주히 헤매며 좋은 투자자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1월19일 사실상 재무적 투자자만을 대상으로 자금을 조달하겠다고 말한다. 전략적 투자자를 구하기가 실로 쉽지 않았던 것이다.

땅 짚고 헤엄치는 사모·헤지 펀드들

지난 2월10일 하나지주의 공시(유상증자 결정)는 계약 이후 김승유 회장이 70일 이상 고투한 자금 유치 작전의 결실이었다. 그동안 개별 협상을 통해 하나지주의 ‘외환은행 인수 자금’에 투자하겠다는 의향을 보인 업체와 이들이 투자할 주식 수를 기록한 문건이다. 모두 36개 금융기관인데, 국내에서는 한국투자증권·미래에셋자산운용·국민연금 등 9곳이고, 해외 업체는 페리캐피털, 오크-지프 캐피털 매니지먼트, 웰링턴 매니지먼트 등 27곳인데 대다수가 사모·헤지 펀드들이다.

이처럼 기존 주주 외에 특정 업체들을 정해서 이들에게만 새로 발행할 주식을 배정하고 투자금을 받는 것을 ‘제3자 배정 유상증자’라고 한다. 여기서 ‘제3자’로 선정된 금융기관들은 기준 주가(증자 발표 이전 특정 기간의 주가 흐름으로 계산한 일종의 평균값)보다 싼값(할인가)으로 신주를 살 수 있다. 기준 주가가 1만원이고 할인율이 10%면 9000원에 매입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제3자’들이 신주가 상장(이때부터 거래 가능하다)되자마자 팔아서 이익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지주 주식의 시세는 2월24일 현재 4만4000원. 그런데 제3자들이 배정받는 가격은 4만2800원(할인율 5.5%)이다. 현 시세가 상장일인 2월28일까지 유지되면 제3자들은 1주당 1200원(4만4000~4만2800원)의 이익을 ‘곧바로’ 실현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보호예수’라는 제도가 있다. 적어도 3~6개월 동안 제3자들이 해당 주식을 매각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다. 그런데 하나지주는 “금번 유상증자로 발행되는 신주에는 보호예수가 없다”라고 공시해버렸다. ‘제3자’로 선정되기만 하면 ‘땅 짚고 헤엄치는’ 투자 특혜다. 외환은행 인수자금을 유치하겠다는 일념으로 투자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내건 것이다. 자칫 ‘제3자’들이 상장 이후 무더기 매도에 나서 하나지주 주가가 폭락하고 이 때문에 일반 주주들이 큰 손해를 봐도 어쩔 수 없다고 뒷짐을 진 셈이다. 물론 하나지주는 ‘제3자는 장기 투자를 선호하는 외국인’이라면서 스스로를 변호한다. 그렇다면 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전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지주의 제3자 중 가장 많은 주식을 배정(500만 주)받은 곳은 페리캐피털이다. 미국의 대형 헤지펀드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도 막대한 수익을 기록했다. 페리캐피털은 금융위기 2년 전인 2006년 말부터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상품들의 시세가 내려가야 수익을 낼 수 있는 파생상품들에 투자해왔다. 폭락하면 폭락할수록 거액을 벌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그 뒤부터 페리캐피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금융상품을 설계하는 ‘ACA 캐피털’이라는 회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페리캐피털이 보유한 ACA 주식은 2007년 1~2분기 180만 주에서 3분기에는 360만 주(당시 시세로 2200만 달러)로 껑충 뛴다. 이렇게 ACA의 총 주식 중 8%를 가진 대주주가 사실은 자기 회사인 ACA가 망해야 돈을 벌 수 있는 도박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냉장고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는 동시에 냉장고 가격 폭락에 베팅한 격이었다. 페리캐피털은 2008년 가을 세계 금융위기가 터져 서브프라임 관련 상품들이 대폭락하면서 무려 10억 달러에 달하는 수익을 냈다. 비록 ACA에 투자한 2200만 달러 상당의 주식은 쓰레기 조각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런 모순적 투자에는 뭔가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ACA와 관련된 다른 거대 금융기관이 있다. 골드만삭스다. 골드만삭스는 2007년 ‘아바쿠스’라는 파생 금융상품을 네덜란드 ABN암로, 독일 IBK 은행 등에 판매했는데, 이 상품을 설계한 회사가 바로 ACA다. ACA를 골드만삭스에 연결시킨 금융회사 ‘폴슨 앤드 컴퍼니’ 역시 자사가 사실상 개발자 중 하나인 아바쿠스가 폭락할 때 수익을 낼 수 있는 파생상품에 투자해 10억 달러의 ‘대박’을 맞았다. 반면 아바쿠스를 매입한 금융기관들은 수억 달러 규모의 손실을 봤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지난해 골드만삭스를 사기 혐의로 제소한 상태다. 2006~2007년 사이에 골드만삭스, 페리캐피털, 폴슨 앤드 컴퍼니는 ACA를 꼭짓점으로 교차하며, 하필 자사와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 ACA의 금융상품에 불리한 베팅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참고로 리처드 페리 페리캐피털 CEO는 골드만삭스 출신이다. 그리고 골드만삭스는 하나지주의 최대 주주(8.6% 지분 보유)이기도 하다. 페리와 골드만삭스가 하나지주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다.

ⓒ뉴시스외환은행 노조 등 금융산업노조는 하나지주의 외환은행 인수에 반대하며 총파업을 벼르고 있다.

노조 “금융 당국이 하나지주 편 든다”

이번 하나지주의 유상증자에서 페리캐피털 다음으로 많은 주식(210만 주)이 배정된 ‘오크-지프 캐피털 매니지먼트’ 역시 지난해 8월부터 법정 분쟁에 휩싸여 있다. 2008년 파산한 미국의 거대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법정 변호인이 오크-지프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당시 월스트리트에는 리먼브러더스가 망할 때 수익을 얻도록 설계된 파생 금융상품이 많았다. 그래서 일부 세력이 리먼브러더스에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오크-지프가 관련되었다는 게 변호인의 주장이다.

이제 금융위원회만 승인하면 외환은행 합병은 완료된다. 하나지주는 국민경제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는 시중은행을 두 개나 거느리게 된다. 그런데 이 거대한 금융 그룹의 상층에는 첨단 금융기법과 사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해외 투자펀드들이 자리 잡게 된다. 또한 하나지주의 재무 구조는 외환은행 합병에 따른 금융비용 때문에 현격히 나빠질 전망이다. 노조의 저항도 거세다. 외환은행 노조와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은 “대통령과 고려대 동창으로 막역한 사이인 김승유 회장 때문에 금융 당국이 하나지주 편을 들고 있는 거 아니냐”라며 총파업을 벼르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합병을 승인하기 위해 이런 상황을 과연 감수할 것인가.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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