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률 전 국세청장(58). 그가 돌아왔다. 2009년 3월15일 그는 측근들도 당황할 만큼 갑작스레 미국으로 출국했다. 검찰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수사에 본격적으로 나선 다음 날이었다. 그의 출국 이후 ‘박연차 게이트’는 폭발력을 키우더니 급기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마무리되었다.

한 전 청장은 미국 뉴욕 주 알버니 시에서 뉴욕 주립대학 공공정책학과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머물렀다고 한다. 이 학교는 이 대통령의 최측근인 백용호 청와대 정책실장(전 국세청장)의 모교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해 5월 기자가 찾아갔을 때 그는 학교에 없었다.

한 전 청장의 연구실 옆방을 쓰고 있던 에세벳 파제카스 교수는 “그(한 전 청장)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다. 그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공공정책학과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린다 씨는 “한씨가 우리 과에 연구원으로 등록된 것은 맞다. 하지만 올해 학교에 나온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뉴욕 영사관의 국세청 관계자는 “청장님이 학교에 안 나가고 작은 마을에 조용히 계신다”라고 말했다.

ⓒ뉴시스한상률 전 국세청장(위)이 절묘한 시기에 귀국했다. 이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까?
박연차 게이트가 터진 뒤 한 전 청장에 대한 의혹은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그는 귀국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함께 출국한 부인은 2009년 말 홀로 귀국해 암 수술을 받았다. 남편 대신 검찰에 불려가 그림 로비에 대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부인이 위독하다는 이야기가 나돌았을 때도 한 전 청장은 귀국하지 않았다. 선거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국면마다 ‘한상률 입국설’이 터져나왔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때도 그랬다. 하지만 들썩임은 곧 수그러들곤 했다. 한 국세청 관계자는 “한 청장은 귀국하려고 몇 번 시도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정권 실세와 위쪽(국세청)에서 그를 주저앉힌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전국을 뒤덮은 구제역 파동, 들불처럼 번진 아랍의 민주화 혁명,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국정원 스파이 사건 등이 정국을 장악하고 있을 때, 한 전 청장은 전격 귀국했다. 그는 청와대·검찰과 조율은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막힌 타이밍이다. 더구나 1월27일 ‘박연차 게이트’의 핵심 인물들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확정되었고, 전군표 전 국세청장도 감옥에서 나온 상태였다. 한 검찰 관계자는 “시간이 갈수록 한 청장의 몸값이 떨어지고 있어 모종의 딜을 한다면 귀국을 더 늦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음 정권 때 들어오면 감옥에 갈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핵폭탄 두 개를 가진 사나이’

한상률의 귀국은 정치권과 사정 당국의 최고 관심사였다.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의 비밀과, 이명박 대통령 재산의 비밀을 쥐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한 전 청장을 ‘핵폭탄 두 개를 가진 사나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로 이어진 박연차 수사는 ‘한상률의 국세청’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국세청은 노 전 대통령 측근 회사를 이 잡듯이 뒤졌다. 태광실업은 부산에 연고를 둔 재계 620위권의 신발 공장이다. 하지만 국세청은 부산청을 제쳐두고 최정예인 서울청 조사4국 요원 6~7명을 보내 6개월간 샅샅이 훑었다. 국세청 한 관계자는 “조사4국이 지방으로 움직인 것은 청장의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2009년 3월25일자 〈조선일보〉 보도다. ‘작년 11월 초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이 박연차 회장 소유의 태광실업·정산개발 등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를 민정수석실을 건너뛰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 특히 박 회장이 빼돌린 수백억원 가운데 ‘괴자금’ 50억원의 실소유주가 노무현 전 대통령일 가능성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청와대제공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MB(위)의 재산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한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다. 그 때문에 ‘한상률 게이트’는 MB 집권 후반기의 태풍이 될 수도 있다.
당시 박연차 게이트 수사 라인에 있던 한 고위 검찰 간부는 “국세청이 확보한 내용이 워낙 방대했다. 박연차 회장 비서의 메모에 담긴 리스트 등 검찰은 국세청 자료를 확인하는 작업만 했다”라고 말했다.

‘MB 파일’의 실체 드러날까?

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의 증언은 이를 뒷받침했다. 안 전 국장의 부인 홍혜경 가인갤러리 관장은 “태광실업 세무조사를 시작할 때부터 한 전 청장이 (세무조사 내용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1주일에 두 차례씩 독대 보고했다. 한 전 청장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전화로 청와대에 보고하는 장면을 안 국장이 두 차례에 걸쳐 목격했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한 친노 인사는 “한상률 전 청장이 주도한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 내용을 밝혀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얽힌 의문을 풀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번 검찰 조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재산에 대한 비밀, 이른바 ‘MB 파일’의 실체가 드러날지도 관심사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측은 국세청이 MB와 친인척의 재산과 탈세 의혹을 사찰했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국세청장 교체설이 대두되기도 했다. 대통령의 최측근 정두언 의원은 “대선 직후 한 청장에게 국세청에서 만든 MB 파일을 달라고 요구했으나 한 청장이 거부했다”라고 말했다.

MB 파일의 실체는 안원구 전 국장이 입을 열면서 구체화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안 전 국장은 “국세청이 MB 파일을 만들었다. … 2007년 대구청장으로 재직하면서 포스코건설에 대한 정기 세무조사를 실시했고, 우연히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가 이명박 대통령으로 기록된 전표를 발견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아직은 정권이 힘이 있어서 MB 파일의 실체가 세상에 나올 가능성은 적다. 수사 범위가 아니지만 검찰이 외면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한 전 청장과 관련된 의혹은 이뿐만이 아니다. ‘한 전 청장이 청장 연임을 위해 대통령 형님에게 줄 로비자금 10억원을 조성했다’ ‘인사 대가로 안원구 전 국장에게 3억원을 요구했다’ ‘박연차 회장이 천신일 회장을 통해 국세청 세무조사 로비에 나섰다’…. 이들 의혹은 하나같이 이명박 정권을 흔들 만한 파괴력이 있다.

ⓒ사진공동취재단한상률 전 국세청장은 MB의 재산과 노무현 전 대통령(오른쪽) 서거와 관련한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다. 그 때문에 ‘한상률 게이트’는 MB 집권 후반기의 태풍이 될 수도 있다.

다시 공은 검찰로 넘어갔다. 검찰은 그림 로비 의혹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2007년 한 전 청장이 차장 시절 전군표 당시 국세청장에게 인사를 대가로 고 최욱경 화백의 그림 ‘학동마을’을 상납했다는 의혹이다. 한 전 청장 관련 사항 중 폭발력이 가장 약한 사안이기도 하다.

검찰의 수사 가이드라인은 명확해 보인다. 한 전 청장 수사와 관련해 검찰 관계자는 기자들을 만나서 “기본적인 것은 다 확인이 돼 있다. 태광실업 박연차 전 회장의 사건은 형사처벌까지 다 끝났는데 볼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검찰은 박연차 게이트 수사 당시에도 한사코 한 전 청장을 직접 조사할 이유가 없다며 이메일 문답으로 조사를 끝냈다. 박연차 수사를 마감하는 자리에서 홍만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기획관은 “한 전 청장이 귀국한다고 해도 불러서 더 조사할 건 없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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