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천막을 철거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온 뒤로도 고려대 출교생들은 농성을 지속하고 있다. 위는 천막 농성장에서 추석 명절을 나고 있는 학생들
고려대 본관은 사적 제285호이다. 그런데 세워진 지 70년도 더 지난 이 건물 정문은 요즘 굳게 닫혀 있다. 대신 굳게 닫힌 정문 앞에는 대형 천막이 설치돼 있다. 이곳에서는 지난해 4월 학교로부터 출교 처분을 당한 학생 7명이 1년5개월째 항의 농성을 벌이는 중이다.

지난 9월1일로 농성 날짜가 5백 일을 넘겼는데도 이곳에서 학교측과 학생들이 얼굴을 마주친 일은 없다. 대신 이들이 만나는 곳은 법정이다. 지난 1년간 학교는 학생을 상대로 천막 철거 소송을 벌였고, 학생은 학교를 상대로 출교 처분 무효 확인 소송을 벌였다.

1차전은 학교측 승리다. 지난 9월19일 서울중앙지법은 학생들에게 천막을 철거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9월26일까지도 천막은 그 자리에 있었다. “강제로 법 집행이 이뤄진다면 몰라도 우리 스스로 먼저 농성을 푸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출교생 강영만씨(컴퓨터교육 4년)는 말했다. 2차전 결과는 10월4일 나온다. 학생들이 제기한 출교 무효 소송 1심 선고일이 이날이다. 

17시간 교수 ‘감금’→무더기 학생 출교→사제간 법정 공방에 이르기까지, 지성의 최후 보루라는 대학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 치고는 전대미문의 엽기성을 보여준 ‘고려대 출교 사태’는 이제 대학 외부의 권위를 빌려서야 비로소 정리될 단계에 이르렀다. 재판 과정에서 불거진 그간의 주요 쟁점들을 정리해 본다.

감금’이냐, ‘대치 상황’이냐

이 부분에 대한 학교측의 입장은 명확하다. 지난해 4월5~6일 교수 7명이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고려대 본관에 17시간 동안 억류돼 있었다는 주장이다. 교수 7명은 당시 자신들을 감금한 학생 1백여 명이 △“너희들은 지금 우리를 감금하고 있다”(교무처장)라고 여러 차례 항의해도 막무가내로 자신들을 풀어주지 않았고 △물을 마시거나 화장실에 가는 행위도 제지했으며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학생들은 강제로 교수들의 인신을 구속한 적은 없다고 맞서고 있다. 외부와의 휴대전화 통화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화장실 통행을 가로막은 일도 없다는 것이다. 단,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안을 학교가 수령할 때까지 건물 밖으로 교수들을 나가지 못하게 한 채 ‘대치 상황’을 지속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배경이다. 문제의 요구안은 2005년 고려대에 통합된 보건대 2~3학년생의 투표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4월5일 고려대 일부 단과대 학생장과 보건대 학생들은 이 요구안을 들고 교무위원회가 열리던 본관 회의실을 찾아갔다. “그 전에 같은 내용의 요구안을 학생처에 몇 차례 전달했는데 계속 무시당한 적이 있어 교수들을 직접 보고 전달하려 했던 것”이라고 조재종 당시 보건대 학생회장은 법정에서 진술했다. 조씨에 따르면, 학생들은 애초에 “대표 몇 사람만 회의실에 들어가 공손하게 요구안을 전달하겠다”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런데 교수들이 이를 거절하고 회의실에서 퇴장하면서 학생들이 교수들을 가로막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학생측 변호를 맡은 이상준 변호사는 “학생들의 요구를 당장 들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요구안만 수령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교수들이 이를 권위적으로 거부하면서 학생들의 감정이 격해진 것이 이번 사태의 발단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교수들이 요구안만 수령했다면 그날 밤 ‘감금’ 내지 ‘대치 상태’는 언제라도 해소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본관에 갇혀 있던 성영신 전 학생처장은 이에 맞서 “학생들의 요구안은 학생처에서 받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라고 주장했다. 

징계 절차는 납득할 만했나

학교측은 합법적인 징계 절차를 모두 밟았다고 주장한다. 상벌위원회가 열리기 사나흘 전 징계 대상 학생들에게 일일이 상벌위원회에 참석하라는 것과 참석하지 않을 경우 소명 기회가 박탈된다는 통지를 했다는 것이다. 상벌위원회 당일(4월17일) 또한 학생들에게 충분한 소명 기회와 시간을 주었다고 학교측은 밝혔다.

이에 대한 학생들의 주장은 다르다. 먼저 소명 기회가 일인당 3~5분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교수들의 질문에 ‘예’ ‘아니요’로 답하는 ‘청문회식’ 자리였다는 것이다(인문대 ㄱ양). 고려대 학칙상 상벌위원회 결정은 단심으로 끝나게 돼 있다. 곧 재심 청구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연합뉴스출교생 7명 중 6명은 이건희 회장 명예박사 학위수여 반대 시위(사진)에 참가한 전력이 있다.
이에 지난해 5월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 40여 명은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학교 당국은 학내외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성과 합리성, 공정성에 기초해 학생 징계 절차를 다시 진행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 제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사전에 통보하지 않은 안건을 징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 또한 문제가 됐다. 1심 법정에서 성영신 전 처장은 ‘교수 감금과 관련한 건’으로 상벌위에 출두할 것을 학생들에게 명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상벌위에는 지난해 2월 입학처 점거 등도 징계 안건으로 올라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학교측이 법정에 제출한 서면에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명예박사 학위수여식 반대 폭력 시위’(2005년) 또한 징계 학생들의 전적으로 기록돼 있었다. 학생들이 ‘보복성 징계’ ‘표적 징계’를 의심하는 대목이다.

19명에 대한 징계 수위는 왜 제각각인가

문제의 사태로 징계를 받은 학생은 19명으로, 전원 고려대생이었다. 사건 당일 본관에는 보건대생 60여 명도 함께 있었다. 보건대 또한 이들을 상대로 상벌위를 개최했지만 징계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동일 사안을 놓고 본교와 병설대가 현저히 다른 수위의 징계를 내린 셈이었다.

고려대생 19명에 대한 징계 수위도 제각각이었다. 이 중 7명은 학적 자체를 말소하는 최상급 징계인 출교 처분을 받았고, 5명은 유기정학, 7명은 견책 처분을 받았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출교 처분을 당한 학생 상당수가 좌파 학생운동 단체인 ‘다함께’ 소속이라는 점이다. 학교측은 재판부에 제출한 서면에서 “(출교생) 7명이 ‘다함께’ 소속”이라며, “PD(People’s Democracy) 계열 중에서도 가장 극좌적인 단체에 속한 이들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학교 행정 일정 및 학생들의 수업권에 심각한 지장이 초래돼 왔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학교측의 주장이야말로 “본관 점거 사건을 핑계로 평소 눈엣가시 같던 진보적 학생 운동을 죽이려는 시도였음을 실토한 것”이라고 학생들은 반박한다. 고려대 ‘다함께’는 특히 2005년 이건희 회장 학위수여 반대 시위를 주도하면서 학내외의 입길에 오르내린 바 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번에 출교당한 7명 중 6명이 당시 시위에 참여했고, 또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강영만군이 이번 ‘교수 감금 사태’를 이끈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측은 강군이 △시위 주동자들과 수차례 회의를 했고 △이 과정에서 투쟁 전술을 지시하는 쪽지를 전달했다는 이유 따위를 들었다. 그러나 자신은 사건 당일 뒤늦게 소식을 듣고 본관에 도착했으며,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쪽지 또한 자신의 친필이 아니라고 강군은 부인하고 있다(강군은 과거 친필로 쓴 리포트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상준 변호사는 단지 시위 주동자들과 회의를 했다는 이유로 객관적 물증 하나 없이 강군을 배후 조종자로 지목한다는 것은 ‘엄청난 상상력의 산물’이자 고려대의 징계가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불투명하게 진행됐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학교측은 시위 가담 정도 및 상벌위원회에서 보인 소명 태도에 따라서 처분을 달리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강군 같은 경우는 특히나 소명 태도가 불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말은 다르다. 견책 처분을 받은 사범대 ㅇ군은 “나는 (상벌위에서) 반성한 적도, 사과한 적도 없다. 19명이 거의 동일한 입장을 밝혔는데도 징계 수위가 다른 것을 보고 황당했다”라고  말했다.

학생들의 소명 태도가 어떠했는지, 또 이들에게 소명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는지 밝힐 수 있는  직접적 증거는 상벌위 녹취록 또는 녹화록이다. 그러나 학교측은 상벌위 당일 녹취나 녹화는 없었다고 밝혔다. 학생들의 운명을 가를 중대한 회의의 진행 방식 치고는 지나치게 허술한 것이 아니었냐는 논란이 있을 만한 대목이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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