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형제단(알이흐완 알무슬림)은 아랍인들 사이에서, 흔히 ‘알이흐완’(형제들)으로 불린다. 이 단체는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 있는 범이슬람 정치·사회 단체이다. 그러나 극히 보수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1928년 이집트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이슬람이 모든 문제 해결의 길’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그 때문에 이 단체는 특히 서방세계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알이흐완은 창립 초기부터 폭력을 반대해왔으며 자살 행위도 예언자 모하메드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무슬림 여성의 얼굴을 가리는 히잡(베일)의 의무적 사용도 반대한다. 자살과 폭력의 상징인 미국 9·11 테러도 비난한다. 그래서 오사마 빈 라덴은 이 단체가 이슬람의 교리를 왜곡해, 대중을 오도하고 무슬림의 의무인 성전(지하드)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1954년 민족주의 국가 이념을 선호하는 나세르와, 이슬람 국가를 이념으로 하는 무슬림형제단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알이흐완은 나세르 암살을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수천명 알이흐완이 인근 아랍 국가로 망명했으며 조직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나세르는 알이흐완이 주장해온 범아랍주의와 사회주의 색채의 정책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1964년 나세르는 국민 화해 차원에서 대사면을 단행해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을 석방했다. 이는 알이흐완의 조직 정비와 재건의 기폭제가 되었다. 사회봉사 조직을 만들어 빈민 구제, 문맹 교육, 농촌과 빈민촌에 자선병원 개설, 이슬람 교육 등에 주력했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회활동과 포교로 무슬림형제단의 인기와 세력은 급속도로 팽창했다. 특히 기술자·의사·변호사·학생 등 젊은 지식인층과 사회 중간계층의 지지를 얻었고, 농민·노동자층의 추종자들도 늘어났다. 지지 계층이 눈에 띄게 확산되자 나세르는 대사면이 선포된 지 1년도 안 되어 알이흐완 지도부를 정부 전복 혐의로 다시 체포한다. 그리고 단원 1000여 명을 국외로 추방하고 360여 명을 재판에 회부했다. 당시 체포된 이들은 사회 중간계층인 기술자·과학자·의사·변호사·학생 등으로 비교적 젊은 층이었다.

 
당시 기자는 카이로에서 국영 흑백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일부 재판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재판정에서 보인 무슬림형제단 지도부의 당당한 태도와 논리 정연한 증언은 기자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젊은 층이 주축이 된 알이흐완의 개혁운동은 강력한 추진력을 받으며 확산되었다. 이스라엘과의 6일 전쟁에서 처절하게 패배한 나세르가 1970년 심장마비로 급사한 뒤 그를 계승한 사다트 대통령은 국민 화합 차원에서 알이흐완 수천명을 석방하고 끈질긴 이슬람 개혁 세력과 화해를 모색했다. 그러나 1979년 사다트가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무슬림형제단과 군부정권 간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사다트를 계승한 무바라크 대통령과 알이흐완의 숙명적 관계는 30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알이흐완의 중간 지도부였던 젊은 세대가 지금은 알이흐완의 주축 세력이 되어 오늘날 꾸준히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노회한 무바라크와 그의 충직하고 냉혈한 ‘집사’ 부통령 술레이만과 협상 테이블에 같이 앉았던 알이흐완 최고지도자 모하메드 바디에와 그 일행은 바로 1970년대 사다트 정권과 투쟁을 벌이던 30대 후반의 젊은 지도자들이다.

기자명 김진화 해외 순회 특파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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