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만날 장소가 서울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 몇 번 출구인지 일러주었을 때, 대답 대신 왜 망설였는지 퍼뜩 떠올랐다. 허수경 시인(48)이 아무런 연고도 없던 독일로 떠난 지 어느덧 20년이 흘렀다는 사실이었다. 텔레비전·라디오 작가로 여의도에서 밥을 벌어먹던 시절, 여의도에 지하철이라는 게 없었던 그때, 그가 떠난 건 1992년 가을이었다.

타향살이 20년 동안 그가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고작 두 번째이다. 10년 전인 2001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해서 왔고, 다시 한국을 찾는 데 또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다섯 번째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과 장편소설 〈아틀란티스야, 잘 가〉를 올해 동시에 출간한 것은 긴 세월 기다려준 독자에 대한 ‘선물’인 셈이다.

시인은 2주간 한국에 머물며 낭송회와 인터뷰로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가 서는 자리마다 독자들은 자리를 빼곡히 메우며 아낌없는 우정과 환대를 보여주었다. “잊지 않고 기억해준 독자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세계의 고아로 사라졌을 겁니다.” 시집으로만 만난 젊은 시인들과도 술과 밥을 함께하는 자리를 가졌다. 꿈에서만 그리던 맛있는 음식들, 잘 차려진 밥상에 대한 그리움을 오랜만에 해소한 시간이었다.

ⓒ시사IN 윤무영
터키·시리아 등에서 발굴한 시의 언어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988년)와 〈혼자 가는 먼 집〉(1992년)을 통해 아직 앳되었던 20대 중반에 조숙과 청승으로 이미 ‘오래된 얼굴’을 하고 있던 그였다. 당시 평단은 놀라운 시인의 언어에 대해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기대와 칭찬에 기대어 머무르는 대신 떠남을 선택했다. 그래서일까. 40대 후반에 접어든 이 여성의 눈빛은 세월을 비껴선 듯 형형했다. 시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향 말(경남 진주) 억양 또한 그대로였다.

그는 독일에 체류하며 서아시아(메소포타미아) 고고학과 문헌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 독일인 지도교수와 결혼도 했다. 매년 해마다 두 달 정도는 시리아로, 터키로 발굴을 떠났다. 코스모폴리탄의 삶이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접하면서 새로운 시어를 발견하고 싶다는 것이 내면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공부가 결국은 시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가 머나먼 타국에서 정말로 발굴하고 싶었던 것은 시, 그 자체였다. 그 시간을 보내며 그는 과거를 발굴하듯, 시어 또한 발굴했다. 뜨문뜨문, 그는 독일에서도 한국으로 시편을 보내왔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2001년)와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2005년)은 독일에서 써냈다. 시를 쓰는 사이사이 번역도 하고, 산문집도 펴냈다. 그리고 발굴지에서 나온 철기나 청동기 부스러기들을 앞에 두고 모국에서 건너온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이성을 사랑하지만 이성만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으로, 그는 매일 아침 모국어로 시를 적었다.

허 시인은 신작 시집(오른쪽)과 소설(왼쪽)을 통해 시대의 냉소에 항의하는 동시에 암흑의 시대를 반추한다.
독일어를 쓰면서도 한국어로 사유할 수밖에 없는 ‘긴장’ 속에서 시인이 건져 올린 시어들은 이전에 비해 수다스럽고 새롭다. “시집을 낼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번에도 독자들이 저의 다른 모습을 봤다면 그건 정말 다행이에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에는 시적 실패를 각오하고 쓴 시가 많아요. 시라는 게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13쪽에 달하는 ‘카라쿨양의 에세이’는 물론이며, 희곡처럼 쓰인 ‘내가 쓰고 싶었던 시 제목, 의자’는 그 실험의 결과물이다.

수록된 시 54편은 응당 뜨거움을 품어야 할 것들이 차가워진 시대에 대한 시인의 항의를 품고 있다. “정치여, 정치여, 살기 좋은 세상이여, 라고 말하던 사람들 산으로 올라가다 잠기고”(‘나의 도시’), “저 멀리 용산참사의 시체가 떠내려가던 어떤 밤에 아무런 대항할 말을 찾지 못해서 울던 소경이었어”(‘열린 전철 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라고, 시인은 그 먼 곳에서 운다고 쓰지 않고 그저 함께 울었다. “울지 마,라고 누군가 희망의 말을 하면/웃기지 마,라고 누군가 침을 뱉었어”(‘비행장을 떠나면서’)라고 아파하면서도, 시인은 “인류!/사랑해/울지 마!하고”(‘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라며 “아직은 뛰고 있는 차가운 심장을 덥히기 위해” 노래한다.

시인의 마음속 풍향계는 먼 땅에서도 언제나 모국으로 향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인은 오랜만에 밟은 한국 땅, 이 지겹도록 변함없는 나라에 ‘직격탄’을 날린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무 여전해서 깜짝 놀랐어요. 특히 새 정권 들어서면서 들리는 이런저런 이야기에 심정이 복잡해요. 무엇보다 저를 힘들게 하는 건 강을…. 강을 건드리면 안 돼요. 문명이라는 게 강과 함께하잖아요. 고대문명이 그러했듯 문명이 망하는 건 강 때문이에요. 강을 막고 강 물줄기를 변화시키는 걸로 돈을 벌 생각하면 안 돼요. 사람이 짓는 것들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는지, 우리 많이 봤잖아요. 이건 철학의 문제거든요. 한번 개발해놓고 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데, 돌이킬 수 없는 부분 앞에서는 망설임이 필요해요.”

시인과 노동자에게 아부하는 세상을 꿈꾸다

시인이 이번에 시집과 함께 펴낸 장편소설 〈아틀란티스야, 잘 가〉는 우리 현대사의 한 장면을 되짚는다. 통일주체국민회의로 대통령을 뽑던 시절. 박정희와 박정희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박정희와 전두환의 시절. 시인은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에서 “아버지 분노가 눈앞을 막아요/그들이 몰려와 동료들을 개처럼 끌고 갔어요/얘야 숱한 동료들이 사라져간다/나는 쓸쓸하다 다만/무력할 뿐 무력한 세계에서/건강할 뿐”(‘우리는 같은 지붕 아래 사는가 2’)이라고 이미 그 시대를 노래한 바 있다.

소설은 그 ‘암흑의 시대’를 살았던 청소년 경실의 이야기다. 아이가 쓰는 글이 정치권력을 쥔 사람들에 의해 무엇을 써도 정치적으로 읽히는 상황, 그건 그 시대를 살았던 자신의 경험이자 많은 동료들의 경험이었다. “이미 다 지나간 줄 알았던 그때 그 참담한 시절이 아직도 발목을 잡고 있는 걸 봐요. 저는 다 지나온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한국을 보면 소위 자유가 다시 규제되고 있는 것 같아요.”

시인은 서울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고향 진주에 들러 가족과 해후했다. 그리고 지난 1월31일 다시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신작 두 권의 책날개에 이렇게 적었다. “앞으로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젊은’이라는 두 글자를 떼고 들여다보면 시인과 노동자라는 우리 시대 가장 약한 고리가 선연히 드러난다. 시인이 글을 쓰려는 그 마음, 그곳에 올돌하게 돋아나 있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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