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20kg이 담긴 상자 7개를 꺼냈다. 이 지역에서 재배해 직거래한 감자이다. ‘윙’ 소리 나는 기계에 감자를 집어넣었다. 잠시 후 노란 속을 드러낸 감자가 나타났다. 한 손에 두 알씩 집어들고 감자 써는 기계에 넣었다. 깍두기 모양으로 썰린 감자가 물이 담긴 큰 통에 풍덩풍덩 담겼다. 물에 씻긴 감자를 바가지로 건져내 건조대에 널었다. 감자가 점점 빠른 속도로 통에 담기자 정신이 없었다. 다양한 상상력을 키우는 직업을 소개한다는 기사의 목적을 잊을 지경이었다. 허리를 숙이고 감자를 옮기다보니 귓가에 “여기는 대한민국~ KBS~ 체험! 삶의 현장입니다~”라는 가수 조영남의 말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딴생각도 잠시.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감자 140kg이 채반 26개에 담겼다. 젖은 감자는 12시간 동안 건조기에 들어갔다.
“겁내면 사업 못한다, 절벽에서 뛰어라”
이 중에서 기자는 감자팩 만들기에 도전했다. 한약 추출물과 감자 가루를 섞고 쪘다. 2시간 뒤, 하얀 김 사이로 감자팩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초콜릿이 녹은 것 같았다. 천연 카카오 가루로 색감을 내서다. 끝으로 라벤더 향 등을 넣었다. 3일 정도의 숙성 기간을 거쳐 용기에 포장되어 소비자와 만난다.
엄현준 비단생 대표는 영월에서 나고 자랐다. 강원도 영월 출신으로는 처음 카이스트에 들어가 ‘축 카이스트 합격’이라는 플래카드를 동네에 걸었지만,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소설가라는 꿈과 카이스트라는 현실 사이를 방황한 끝이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두었던 야학 교사를 6년간 하다가 결혼했다. 생활고로 2년 동안 대전에서 학원 강사를 했다. 스타 강사여서 벌이는 풍족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자괴감과 함께 조직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힘겨웠다.
2000년 영월에 인터넷이 깔림과 동시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감자 직거래를 시작했다. 2000만원으로 시작한 사업 ‘e-감자’는 매년 판매 수익이 1억원씩 늘었다. 매출과 더불어 감자 판매량도 늘었지만, 재고도 늘었다. 남아서 버리는 감자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2005년 화장품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더운 날 감자팩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감자의 미백 효과와 진정 작용을 이용한 화장품을 내면 ‘지속 가능한’ 감자 산업을 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화장품의 ‘ㅎ’자도 모른다는 사실도 그의 도전 의지를 꺾진 못했다.
주로 지식을 팔던 그가 창업에 나섰을 때 걱정은 없었을까. 그는 “겁내면 못하는 게 사업이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는 심정으로 무식하게 도전하면 된다고 했다. 막상 뛰어내려보면 높이가 1m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감자 화장품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2008년 직거래 사업체를 팔았지만, 아직 감자 화장품 사업은 연 매출 1억~2억원이다. 매출이 매년 늘고 있지만 직거래 때에 비하면 상승세가 약하다. 걱정이 되긴 하지만 초조하지는 않다. 그의 꿈은 단지 성공한 화장품 CEO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자 클러스터를 만들어서 먹는 감자부터 화장품, 의약품, 테마 관광단지까지 감자로만 먹고사는 1·2·3차 산업단지를 꿈꾼다. 그는 현재도 직거래한 영월 감자를 화장품 재료로 쓰고, 영월 사람들을 비정기적으로 고용하면서 지역밀착 사업을 하는 중이다.
이 직업은
천연화장품 사업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오히려 농촌이야말로 창업하기 좋은 곳이다. 신선한 작물을 빨리 공급받을 수 있어서다. 엄현준 대표도 “흔히 공장 설립 3조건을 노동·자본·시장이라고 한다. 농촌에서 사업을 시작하면 노동·자본이 저렴한 데다, 인터넷 발달로 시장의 문턱도 많이 낮아졌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시작할까?
화장품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여성환경연대’ 등에서 운영하는 천연화장품 만들기 워크숍에 참여해보자. 초보자들도 쉽게 만들어 쓸 수 있는 보디로션·립밤 등을 가르쳐준다. 희망제작소 소기업발전소에서 창업 도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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