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독한 혼란.’ 김 아무개씨(41)에게는 게임이 그랬다. 저도 모르는 사이 감정이 움트듯, 시나브로 온라인 게임에 빠져들었다. 호기심의 끝은 사랑의 열병보다 지독했다. 2009년 9월, 그는 생업이던 택시 운전도 접고 부인 김씨(26)와 수원의 집 근처 PC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부부가 키우던 게임 속 캐릭터가 커가는 사이, 태어난 지 3개월 된 딸은 집에서 두 달간 방치되다 굶어죽었다.

패륜 부모라며 세상이 떠들썩했다. 지난해 3월 뒤늦게 검거된 부부는 유기치사 혐의로 1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둘째를 임신 중이던 아내는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남편은 복역 중이다. 둘은 얼마 전 다시 부모가 되었다. 둘째를 출산한 아내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남편을 면회하러 온다. 면회실에서 만난 김씨는 그때 일은 기억조차 하기 싫다며 취재를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죽지 못해 사노라고 푸념했다. 매일 하던 게임이 생각나지는 않을까. “사람이라면, 게임 생각이 나겠어요?” 김씨가 진저리를 쳤다.

ⓒ이우일 그림

지난해 12월5일, 서울 잠원동에서는 미국 명문대를 중퇴한 박 아무개씨(24)가 밤새 격투 게임을 하다 새벽녘 집을 나선 뒤 처음 보는 행인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 게임에 빠진 한 20대 엄마는 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두 살 난 아들을 목 졸라 살해했다. 12월27일에는 울산의 한 PC방에서 12시간 동안 게임을 즐기던 대학생이 사망했다. 20~30대 성인 게임 중독자가 연루된 살인·사망 사고가 한 달 사이 세 건이다. 가상 세계에서 난무하는 죽음이 현실이 되었다.

인터넷 중독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김현수 사는기쁨신경정신과 원장은 요즘 20~30대 게임 중독 환자가 부쩍 늘었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게임중독 환자 80여 명을 진료 중이다. 하루 한두 명씩, 한 달 평균 30여 명이 새로 병원을 찾는다. 이 중 성인이 3분의 1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남성이 90% 이상이다. 대학 부적응 상태에 있는 휴학생·복학생, 그리고 취업이 어려운 불완전 고용 상태의 청년들이 가족 손에 이끌려 상담을 하러 온다.

20~30대, 게임 접한 기간이 가장 긴 세대

청년 게임 중독자들의 특성 중 하나는 이들 대부분이 초등학교 때부터 게임을 시작해, 게임을 접한 기간이 생애에서 가장 긴 세대라는 점이다. 1996년 4월, 국내 최초로 인터넷 그래픽 게임인 〈바람의 나라〉가 서비스됐다. 1998년부터는 〈스타크래프트〉와 〈리니지〉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과 롤플레잉(일종의 역할 게임) 게임 붐이 일었다. 때맞추어 PC방도 우후죽순 늘었다. 가출과 현금 거래 등 문제가 심각해지자 PC방 청소년 출입 제한 조처가 떨어졌다. 온라인 게임 ‘폐인’이 처음 양성된 1990년대에 초등학생이던 아이들이 이제 30줄을 넘어섰다.

김정수씨(31·가명)도 게임 산업의 발전과 성장을 같이해왔다. 김씨가 중학생일 때 스타크래프트가 나왔다. 이때부터 여가의 대부분을 채운 것이 컴퓨터 게임이었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게임과의 동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카트라이더〉 〈서든어텍〉 같은 게임을 했다. FPS게임(1인칭 슈팅게임)인 서든어텍은 2007년, 미국 버지니아 대학에서 무차별 총기 난사를 일으킨 조승희가 즐겨 한 게임으로 유명하다. 사건 당시 김씨도 그 게임을 즐겼다. 유저들은 실제 사상자와 조승희의 죽음을 두고 ‘32킬, 1데쓰(32명 죽이고 게이머 자신도 한 번 죽었다는 의미)’라는 게임 용어를 썼다. 〈리니지2〉와 〈월드오브워크래프트(WOW)〉같은 롤플레잉 게임으로 ‘갈아탄’ 건 본격적으로 구직 활동을 벌일 때였다.

공무원 시험 등 취업을 준비하던 2~3년 동안 그는 MMORPG(다중접속 롤플레잉 온라인게임)에 빠져들었다. MMORPG는 적게는 몇 명, 많게는 수십 명의 플레이어가 같은 가상 공간에서 마법사·성자 등 역할을 분담해 즐기는 게임이다. 스토리텔링이 있고 소속감이 뚜렷해 몰입이 쉬운 게임으로 꼽힌다.

김씨가 즐겨 하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의 가상 세계는 그 자체로 완성된 하나의 사회였다. PC방에서 30시간 넘게 꼼짝도 안 하고 게임만 하는 날이 지속되었다. 남들이 보면 모니터만 쳐다보는 것 같지만 그는 그 안에서 일종의 사회 활동을 한다. 친구와 약속을 잡듯, 게임 안에서 동료들과 약속을 잡는다. 예컨대 ‘주말에 리치왕을 잡으러 가자’고 합의하면, 유저 수십 명이 각자의 역할대로 정말 그 시간에 모여 힘센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전략을 짜고 공격한다. 전종수 정보화진흥원 지식구축단장은 “온라인 게임은 가상 공동체인 동시에 커뮤니케이션 장소이며, 만남의 장소다.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씨의 게임 속 길드(공동체)는 오프라인 모임으로도 이어졌다.

게임에 몰입할수록 클릭이 유연한 마우스나 키보드로 장비를 바꾸는 횟수도 늘어갔다. 취업 시장에서 번번이 낙방해도, 이곳에서만은 그를 대우해주었다. 지난해 가까스로 일반 회사에 취직한 그는 여전히 퇴근해 돌아와서 몇 시간씩 게임을 하다 잠이 든다. 스스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지기 직전에 걸쳐 있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고영삼 인터넷중독예방센터 전 팀장은 김씨처럼 현실 세계에서 좌절을 경험한 사람이 게임 중독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강조했다. 도피처로 가상 공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에 빠져 지내던 고용성씨(24·가명)는 어느 날 샤워를 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거북목증후군으로 목이 구부정했다. 허리 디스크 증세가 있어서 몸은 비뚤어졌고 마른 팔다리는 부러질 것 같았다. 충혈된 눈과 무릎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을 한 사내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하루 몇 시간씩 게임을 한 결과였다.

“아군이 승리하였습니다.” 고씨가 즐겨 하는 슈팅 게임이 끝날 때 이 문구가 자주 떴다. 뛰어난 전투력으로 다른 플레이어에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체육대를 목표로 3수 생활을 하던 그는 실기 시험을 앞두고 무릎인대가 늘어져 대입에 실패했다. 좌절과 함께 게임 세계에 몰두했다. 천식과 무릎인대 이상으로 입대 전 신체검사에서 4급 판정을 받았다. 군에서는 M16으로 쏜 20발 중 6발만 목표물을 맞혔다. 게임 속 전투 영웅은 현실에서 낙제 군인이었다. 지금은 시간제한제 등 자체 규칙을 만들어 부단히 노력한 결과 게임 중독에서 벗어났지만, 게임 뒤의 허망함을 생각하노라면 아직도 후회가 막심하다.


성인 중독자에게 흔한 특징 중 하나는 가족과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방에 틀어박혀 몇 시간씩 게임에 몰입하는 중독자는 대개 집안의 골칫거리다. 게임 중독자 관련 사건 사고가 주로 가족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기혼자의 경우 게임에 대한 지나친 몰입은 가정파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오미현씨(35·가명)는 게임 중독 남편 때문에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 회사에서 오면 게임에 몰두하길 넉 달, 급기야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 실직자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는 아예 PC방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갓난아기가 보채도 나 몰라라 게임에 파묻혀 지내는 날이 지속됐다. 원래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였지만 부부는 대화를 잃었다. 답답한 심정에 자주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글을 남겼더니 비슷한 사연이 줄을 이었다. 평범한 가장들의 가장 손쉬운 도피처는 현란한 가상 세계였다.

성인, 청소년보다 통제 더 어려워

게임 중독을 상담하는 현장에서는 청소년에 비해 성인을 통제하기가 더 어렵다고 한다. 일단 상담소를 찾아오는 경우도 드물다. 심각한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교나 부모 등의 도움을 받는 청소년과 달리 조력자를 얻기도 쉽지 않다. 서보경 인터넷중독예방센터 상담원은 “중독 탈출의 의지가 있다면 인터넷 사용 일지를 작성하는 게 중요하다. 일주일간 사용 패턴을 기록하고 인지하는 데서 치료가 시작된다”라고 조언한다.

김현수 원장은 현재 뇌영상 의학에서 마약 중독과 게임 중독의 차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담배·마약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따라서 다른 생물학적 중독과 마찬가지로 게임 중독도 예방과 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특히 현재 청년 중독 세대는 남은 인생에서도 게임이 차지할 비중이 크기 때문에 앞으로도 관련 범죄의 증가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심각하지만, 성인 게임 중독자에 대한 실태 파악이나 대책은 턱없이 부족하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일정 시간 게임 사이트를 차단하는 ‘셧 다운제’가 정책적으로 논의되는 대책의 전부다. 정부부처 간 이해관계도 엇갈린다. 여성가족부는 청소년 보호를 내세워 게임 이용을 규제하려 하지만, 문화관광부는 게임 산업 활성화를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행정안전부가 전국에 7개 인터넷중독예방 상담센터를 마련하고 92개 협력기관과 연동해 상담실을 운영 중이지만, 주로 청소년 기관과 연계해 있어 성인을 아우르기에는 무리다.

중독자들 사이에서는 게임 회사에 대한 원망도 많다. 얼마 전 잠원동 살인 사건을 저지른 박씨가 빠져 있던 게임으로 알려진 〈블레이블루〉의 제작사 아크시스템웍스는 이례적으로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수정 교수(경기대 범죄심리학과)는 “사과에서 그칠 게 아니다. 정부가 문화 콘텐츠 개발비용으로 게임 산업을 지원하고 있는데, 그것으로 국민이 목숨을 잃는다면 당연히 제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정부의 개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종수 단장은 “일방적 규제로 가면 게임이 아니라 채팅, 음란물 등 다른 온라인 콘텐츠로 중독이 전이될 수 있다”라며 “일단 게임 중독자들끼리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중독을 치유할 수 있는 커뮤니티 기반을 구축하는 게 시급하다”라고 진단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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