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불법 정치자금 9억7000여 만원을 받았다는 혐의를 두고 검찰과 한 전 총리 쪽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사건의 핵심 인물은 한만호씨(50·전 한신건영 대표)이다. 한씨는 지난해 4~11월 총 73차례 검찰 조사를 받으며 일관되게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주었다고 진술했다. 뇌물이나 정치자금 관련 사건은 보통 현금으로 돈이 전해져 ‘물증’이 없는 경우가 많다. 법원에서는 돈을 건넨 사람의 진실이 합리적인지, 객관적 일관성을 유지하는지, 진술로 얻게 되는 이해관계·협박이나 회유 등이 있는지를 따져 증거 능력을 판단한다. 이번 재판 역시 돈을 건넨 한씨의 ‘입’에 따라 한 전 총리의 유·무죄가 갈릴 처지였다.

검찰이 겪는 ‘아이러니’

지난해 12월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 김우진) 심리로 열린 2차 공판에 나온 한씨가 진술을 바꿨다. 그는 “사건 제보자 남 아무개씨가 찾아와 서울시장 이야기를 거론하며 ‘지금 협조하지 않으면 더 힘들어질 수 있다’고 겁박했고, 수감 후 억울하게 빼앗긴 회사를 되찾을 욕심에” 검찰 수사에서 말을 지어냈다고 했다. 그는 한 전 총리에게 건넸다고 주장한 9억원 중 △3억원은 한 전 총리의 측근인 김 아무개씨(2004~2008년 한 전 총리 지역구 사무실 보좌관)에게 빌려주고 △1억3000만원은 자신이 쓰고 △미화와 현금을 섞은 5억원 정도는 박 아무개 전 한신건영 부사장과 김 아무개 전 ㅎ교회 장로에게 주었다고 말했다.

ⓒ시사IN 안희태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지지자들과 함께 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검찰로서는 ‘곽영욱의 악몽’이 재연될 판이었다. 곽 전 대한통운 사장은 지난해 한 전 총리에게 뇌물 5만 달러를 직접 주었다고 검찰 수사에서 진술했다가 법정에서 의자에 두고 왔다고 말을 바꿨다. 재판부는 “곽씨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라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검찰은 이 선고 하루 전날 한신건영을 압수수색하며 ‘별건’ 수사에 나섰다. ‘정치 검찰’ 이라는 후폭풍이 거셌다.

한씨 진술 번복으로 당황한 검찰은 한씨의 위증 혐의 수사에 나섰다. 검찰이 한씨의 부모를 만나 “진술 번복으로 당신 아들 출소가 어렵다”라고 협박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2차 공판 뒤부터 검찰은 그의 법정 진술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한씨의 말에 근거해 수사를 시작한 검찰이 한씨가 거짓말쟁이임을 증명해야 할 ‘아이러니’가 일어난 셈이다. 1월4일 3차 공판 때 구치소 면회 기록을 공개하겠다고 나선 것도 그 일환이다. 검찰은 녹취록에 한씨가 한 전 총리에게 3억원을 돌려달라고 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변호인은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집된 녹취 CD는 증거 능력이 없다”라고 반발했고, 한씨는 “구치소에 있는 동안 편지와 대화는 다 스크린(검열)되는 것을 알고 있어 검찰이 불편하지 않을 멘트를 썼다”라고 말했다.

검찰의 또 다른 ‘반전 카드’는 주변 증인의 진술이었다. 5차 공판까지 한씨를 제외한 증인 네 명(정 아무개 전 한신건영 경리부장, 박 아무개 전 한신건영 부사장, 김 아무개 전 ㅎ교회 장로, 김 아무개 전 한씨 운전기사)이 법정에 섰다. 이 중 한씨가 5억여 원을 주었다고 지목한 박씨(전 한신건영 부사장)는 “평생 1000달러 이상을 만져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고, 김씨(전 ㅎ교회 장로)도 “달러를 본 적조차 없다”라고 말했다. 또 김씨는 ㅎ교회 신축 공사와 관련해 한 전 총리를 통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소개받았고, 한씨의 사무실에서 “다른 ‘날라리 정치인’과 다르다”라며 자신을 소개한 한 전 총리를 만난 적도 있다고 증언했다.

다음 재판, 2월7일 오후에 열려

9억원을 세 차례에 걸쳐 한씨와 함께 여행용 가방에 담았다는 정 아무개씨(전 한신건영 경리부장)도 “사장님(한씨)이 ‘네가 잘해야 한다. 네가 잘해야 내가 은팔찌를 안 찬다’라고 하며, 한 전 총리에게 줄 돈이라고 했다”라며, 1차 공판에 이어 5차 공판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이들은 모두 한씨가 거짓말을 한다고 증언했다. 

 
증인들 역시 ‘객관적’인 입장은 아니다. 박씨와 김씨는 다른 명목으로 각각 1억원, 2억2000만원을 한씨로부터 받았다고 시인했다. 증인들의 말 바꾸기도 잦았다. 한신건영 경리부장인 정씨는 1차 공판에서는 한씨와 함께 세 차례에 걸쳐 돈을 여행용 가방에 담았다고 했지만, 5차 공판에서 2007년 7, 8월 두 차례 돈을 준비한 과정에 대해서는 “혼자 담았는지, 사장님과 함께 담았는지 헷갈린다”라고 말을 흐렸다. 한씨의 전 운전기사였던 김씨는 ‘2007년 4월쯤 돈 가방을 한신메트로폴리스 1001호에 두었다가 박씨와 김씨에게 줬다’라는 한씨의 주장이 거짓말이라며 “그때 오픈하지도 않았다”라고 말했지만, 변호인이 당시 1001호 물품 배송증을 제시해 되레 반박을 당했다. 또 김씨는 변호인 신문에 답하던 중 “그럼 여기가 다 추측이지 뭐 가지고 이야기하나”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검찰이 한씨의 증언 외에 내세웠던 채권 회수 목록의 증거 능력을 두고도 논란이 일었다. 채권 회수 목록에는 ‘의원 5억원’이라고 쓰여 있는데, 검찰은 이것이 한 전 총리에게 돈이 간 증거라고 내놓았다. 하지만 한만호씨는 채권 회수 목록은 “추측으로 만든 자료이고 틀린 내용이 많다”라고 주장했다. 정씨(전 한신건영 경리부장)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회사가 부도난 뒤 사장님 아는 분이 집으로 찾아와 ‘받아낼 수 있는 돈을 적어주면 정씨의 돈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설득해 작성했다”라고 말했다. 채권 회수 목록은 한신건영이 부도가 나면서 뒤늦게 만들어진 자료라는 뜻이다. 비자금 장부에 ‘한’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정씨와 한씨의 말이 엇갈렸다. “사장님이 한 전 총리에게 줄 돈이라고 했다.”(정씨) “내 이름(한만호)의 ‘한’자이다. 어느 건설업자 사장이 장부에 의원의 성을 써놓겠냐, 그렇게 무모하지 않다.”(한씨)

다섯 번 재판을 거치면서 검찰과 변호인은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검찰은 계좌 추적 자료와 추가 증인을 통해 한씨의 위증을 입증하겠다고 했다. 한 전 총리 쪽 변호인은 검찰의 증거를 탄핵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분명한 건 진실이 둘이 아닌 이상, 재판 결과에 웃는 자는 검찰과 한 전 총리 중 한쪽이라는 사실이다. 다음 재판은 2월7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법 510호에서 열린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