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0일은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730일, 딱 2년째 되는 날이다. 용산참사 2주기 범국민추모위원회(추모위)는 1월17일 참사 현장인 서울 용산구 남일당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용산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유족과 철거민 외에도 그동안 용산을 기록해왔고, 영원히 잊지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도 함께 했다. 남일당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용산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직접 보니 미친 세상이더군요”

배지희씨(40)는 용산 참사의 주요 기록자 중 한 명이다. 참사 이후 용산 문제가 조기에 해결될 조짐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용산에서 멀어져 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날이던 2009년 5월29일, 용산에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문정현․이강서 신부와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 등 10여 명만이 미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때 경찰 용역이 용산참사 현장에 들이닥쳤다. 유일하게 사진기를 들고 있던 배씨는 농성 천막 철거를 몸으로 막던 문정현 신부가 경찰 용역에 끌려 나가는 장면을 담았다. 이 사진은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용산으로 쏠리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배지희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날 용산참사 현장에서는 문정현 신부(가운데 하늘색 옷) 등 현장을 지키던 10여명이 경찰에 끌려갔다. 그 장면을 찍은 배지희씨의 사진

배씨는 경기도 일산 아기사진 전문 스튜디오에서 근무하는 사진편집자다. 2009년 1월 중순, 휴직한 뒤 산티아고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용산 참사가 터졌다. 사안의 심각성을 알게 된 건 참사 3일 뒤인 1월23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미사에서다. “친구인 수녀님이 한 번 나와 보라고 하더라고요. 제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세상은 이렇게 치열한 것임을.” 물론 배씨도 모르는 건 아니다. 2002년 이혼한 뒤 의도적으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을 뿐이다. 지방에서 몇 년 간 숨어 있다가, 2005년 서울로 올라와서는 돈을 벌기 위해 일만 하며 지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 때도 분노하지 않던 그였지만 용산참사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전 제가 직접 보고 들은 게 아니면 잘 안 믿거든요.” 배씨가 사진기를 들고 용산을 찾기 시작한 이유다. “가서 직접 보니 이건 미친 세상이더군요. 남편이 키우기 때문에 함께 살진 않지만 사랑하는 제 딸이 살아갈 세상인데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씨는 아기를 찍던 사진기로 경찰이 용산 철거민을 폭행하는 장면,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경찰에 끌려가는 장면들을 찍었다. 경찰에 쫓기고 밀려 카메라와 함께 굴렀다. 다음 아고라에 ‘퉁퉁풍선’이라는 닉네임으로 그날그날의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누군가가 엉뚱한 소리를 할 때 사진 들이밀고 말하려고요. 이게 그 날 그 자리의 진실이라고. 당신도 진실을 보려면 용산으로 와야 한다고.”

그는 그래서 여전히 촛불을 든다. “제가 촛불을 들고자 길에 나섰을 때, 그 자리에 누군가 이미 있었어요. 그 빛을 보고 저도 길을 잃지 않았던 거죠. 누군가 다시 진실을 위해 촛불을 들고자 했을 때, 저도 빛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용산참사 유족의 '대모'

김덕희씨(51)에게 용산은 ‘제2의 집’이다. 지난 2년간, 용산 한강로 2가에서 보낸 시간이 집 다음으로 많다. 2009년 1월 20일, 용산 참사가 발생하자 2008년 광화문을 비추던 ‘광우병 촛불’들이 용산으로 몰려왔지만, 길지 않았다. 그러나 김씨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용산 남일당 건물 앞에서 불을 밝혔다. “처음에 언론을 통해 용산 참사를 접했을 땐 현장 분위기가 험악할 줄 알았어요. 막상 와서 유가족․철거민과 같이 미사 드리고, 밥도 먹고 하다 보니 다 같은 이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경희하루도 빠짐없이 남일당에서 촛불을 밝힌 김덕희씨(왼쪽). 그는 용산에서 숨진 故 윤용헌씨의 아내 유영숙(51)씨의 ‘대모’를 맡기로 했다.

용산미사에 몇 번 와 본 사람이라면 골목 입구에 서서 미사 안내지와 양초를 나눠주던 김씨를 기억할 것이다. 김씨가 사는 곳은 김포다. 저녁 7시에 시작되는 용산 미사 안내를 도우려면 집에서 오후 3시쯤엔 나와야 한다. 남편과 두 자녀의 저녁식사를 챙겨 주지 못하기 일쑤다. 미사 뒷정리까지 돕고 나면 집에 도착하는 시각은 밤 10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일주일 중 6일이 이런 생활이었다. “식구들이 제 뜻을 존중해주지 않았다면, 매일 미사를 드리기 힘들었겠죠.”  

오랜 시간 유족을 만나다보니 뜻밖의 인연도 생겼다. 2010년 9월, 故 윤용헌씨의 아내 유영숙(51)씨의 ‘대모’를 맡게 된 것.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대모는 영적인 어머니를 의미한다. 김씨와 유씨는 동갑내기 친구이기도 하다. 김씨는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엄마처럼 유씨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용산 문제는 아직 해결된 게 아니죠. 적절한 보상, 희생자 명예회복, 책임자 처벌이 이뤄질 때까지 우리가 용산을 잊지 말아야 해요.”

기자명 김경희 인턴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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