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러시아라는 나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시구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동시대 시인 츄체프의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인데, 저자가 러시아 미술 세계에 대한 길잡이로 인용하고 있는 것은 민속학자 르보프의 말이다. “우리 러시아인들 사이에는 격렬한 삶이 있다.” 어째서 격렬한가? 러시아 역사 자체가 격렬했기 때문이다. 이 ‘격렬한 삶’과 무관한 미술, 오직 미술만을 위한 미술은 러시아 미술이 아니었다.
저자는 러시아 중세의 이콘화(종교·신화 및 그 밖의 관념 체계상 어떤 특정한 의의를 지니고 제작된 미술 양식)에서부터, 소비에트 시기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이후의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미술사 전체를 여섯 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이 중 러시아 미술만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역시 이콘화와 19세기 이동파,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등이 아닌가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특히 19세기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건 이 그림들의 일부가 최근 몇몇 아방가르드 작품과 더불어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에서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그림과 함께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그림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1872)으로도 유명한 화가 바실리 페로프의 ‘트로이카’(1866)이다. 몇 년 전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오랫동안 걸음을 멈추게 한 그림인데, 추운 겨울날 물동이를 나르는 세 아이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들의 팍팍한 삶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표정은 의외로 어둡지 않다. 저자는 이 그림에 대해서 “지금 그들은 행복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절망에 빠진 것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절망 속에서도 어린 소년 같은 순수한 마음과 러시아적인 어떤 것에서 끊임없이 희망을 부여했듯이 말이다”라고 적었다.
참고로, 국내에는 러시아 미술사를 통시적으로 다룬 조토프의 〈러시아 미술사〉(1996, 동문선), 아방가르드 미술사를 담은 캐밀러 그레이의 〈위대한 실험〉(2001, 시공사), 그리고 최초로 국내 필자가 쓴 현장감 있는 러시아 미술관 안내서인 이주헌의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2006, 학고재)이 출간돼 있다. 이진숙의 책은 이 모두를 종합한 가장 이상적인, 러시아 미술사 입문서이면서 동시에 러시아 미술로의 뿌리치기 어려운 초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