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한향란수묵 만화가 김홍모씨(왼쪽)가 일민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옆은 동료 만화가인 부인 임소희씨.
‘참 착한 만화.’ 첫인상이 그랬다. 올해 초 출간된, 만화가 김홍모씨(36)의 〈소년탐구생활〉(길찾기 펴냄)에는 1980년대 강원도 산골에서 성장기를 보낸 아이 ‘홍모’의 풋풋한 일상이 아련하게 그려져 있다. 주인공 홍모는 책장에서 사라진 어린이 만화 잡지 〈보물섬〉을 찾아 친구 집을 전전하고, 만화 영화 〈똘이장군〉과 ‘평화의 댐’ 소동과 ‘5월 광주’의 풍문 사이에서 흥분하고, 영문 몰라 한다. 한 칸 한 칸 울고 웃는 시골 ‘깡촌’ 개구쟁이의 얼굴 표정이 생기롭다. 수묵채색 만화는 그 자체로 담백했다. 이 만화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가 최근 출간한 후속 작품은 뜻밖에도 SF만화였다. 〈항쟁군〉 1·2권(청년사 펴냄). 〈항쟁군〉은 아직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현대 식민지 조선을 배경으로 한 가상 SF 만화이다. 대학가에는 일본어 간판이 즐비하고, 광화문에 세워진 사무라이 동상은 일본도를 차고 있다. 조선혁명군과 조선독립군으로 나뉜 독립운동가들이 감시 로봇에 맞서 무장 투쟁을 벌인다. 현재 2권까지 나왔는데, 3권은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들과 공산주의 계열 혁명군들이 손잡고 ‘식민지 조선’으로 진격하는 내용을 다룰 예정이다.

〈항쟁군〉은 수묵으로 그린 SF 만화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짐작하건대 그는 수묵으로 SF 만화를 그리는 최초의 만화가로 등재될 듯하다. 김홍모씨는 이질적인 느낌을 얻고 싶었단다. “로봇을 수묵으로 그리면 시골 논밭에 로봇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투박하고, 이질적인 느낌.” 작가의 의도는 만화에 잘 살아 있다. 수묵으로 그린 가상 현실은 신선한 미적 쾌감을 주고, 한지를 여러 장 붙인 ‘장지’에 그린 원화는 ‘독립군 같은’ 거친 생명력을 보인다. 먹의 색채로 시간을 구분하기도 한다. 진한 먹빛은 현재, 갈색 톤은 과거를 표현한다.

〈항쟁군〉(아래)은 대체 역사 SF 공간을 그린다.
수묵으로 그린 독특한 SF만화, 〈항쟁군〉 수묵으로 그린 독특한 SF만화, 〈항쟁군〉

  수묵으로 그린 독특한 SF만화, 〈항쟁군〉

 

‘수묵 만화 정서’는 이 만화가가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길어올린 것이다. 중학교 때까지 살았던 강원도 전곡은 채색 수묵으로 표현하기에 적당한, 삶과 자연이 어우러진 서정적 공간이었다. 겨울이면 얼음을 깨어 보트 삼아 건넜던 한탄강은 체험의 저수지였다. 그곳에서 ‘한국의 정서’를 몸에 새겼다. 만화가였던 큰형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만화 잡지 〈보물섬〉을 끼고 살았던 김홍모는 만화가를 꿈꾸었다. “세상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싶었고, 그 통로가 만화였다.”

두 번째 작품 〈항쟁군〉에는 대학 시절 경험이 묻어 있다.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상경했고, 삼수 끝에 어렵사리 홍익대 동양화과에 진학했다. 학생운동 끝물에 들어선 대학에서 그는 남들보다 좀더 ‘쎄게’ 학생운동을 했다. 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1996년부터는 손에서 붓을 놓았다. 그리고 제적과 투옥 휴지기를 거쳐 시사만화와 만평, 인터넷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다시 붓을 잡으면서 그는 ‘한국적 정서와 형식’을 고민했다. “일본식 망가, 미국 코믹스, 유럽식 카툰처럼 ‘이것이 한국 만화다’ 하는 것이 드물다. 식민지 시기 독립군을 만화로, 우리식 만화로 표현해보자.”

그래서 떠올린 것이 ‘수묵’이었다. 기교적이고 화려한 중국의 수묵 말고, 디자인적 요소가 강한 일본의 수묵 말고, 해학적이고 서민적인 한국의 수묵을 만화에 녹여내는 작업으로,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우리식 만화’를 그려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항쟁군〉(아래)은 대체 역사 SF 공간을 그린다.
만화 작업을 하는 데 부인이자 동료 만화가인 임소희씨(31)의 도움이 컸다. 스토리 구상을 할 때부터 자문을 하고, 콘티를 잡으면 바로 보여주었다. 임소희씨는 언제나 든든한 첫 독자였다. 그래서 잡지 〈민족21〉에 만화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 체류기’를 그리는 임씨는 김홍모씨에게 이현세 만화의 ‘엄지’ 같은 존재다. 그는 부부 이상, 동료 이상의 존경을 담아 만화에 항상 주인공 ‘소희’를 등장시킨다.

 

이번 〈항쟁군〉에 아쉬운 면도 없지 않다. 가령 “우리 민족의 분노를 보여주자”라는 대사는 거칠고 생경한 느낌을 준다(김홍모씨는 “고민을 많이 했다. 가상 공간이라도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작가가 다음 작품으로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명랑 모험 만화 〈소년 탐험대〉를 그린다고 하니, 차기작에서는 조금 더 발랄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기대할 만하다. 차기작 역시 수묵 만화이고, 역시 ‘소희’가 나온다고 한다.

출간과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야릇한 환대〉 전시회에 김홍모 만화가 나와 있다. 원화를 보고 싶으면 10월14일까지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을 찾으면 된다. “이 만화책이 도시 서민의 고단한 삶에 휴식을 주는 책꽂이에, 시골 학생의 가방 속에 있으면 좋겠다. 내 만화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따뜻함을 줄 수 있으면 정말 정말 좋겠다”는 그의 바람처럼, 마음이 헛헛할 때.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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