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 성매매 경험이 있는 20대 초·중반 여성들로부터 강연을 부탁받고 고민에 빠졌다. 그들은 성매매 피해 여성의 자립을 돕고자 만든 단체 ‘윙’(Wing)에서 활동하는 여성이다. 자기들이 직접 찍은 다큐멘터리 필름을 들고 필리핀의 여성단체와 교류하러 가는데 ‘글로벌 감수성’ 교육을 해달라는 것이다. 고민 끝에 강연 요청을 수락했다.

외국 땅을 밟는 게 처음인 그들은 많이 두려워했다. 단체가 자기들을 이용해서 지원기금을 더 따내려고 하는 것 아니냐며 심통을 부리는가 하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자기들이 무슨 교류를 할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필리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것 같아 못 가겠다는 여성도 있었다.

자활 프로그램이 소외감·열등감 부추기는 꼴

ⓒ뉴시스성매매 피해 여성이 ‘자활’하기까지는 장기적 도움이 필요하다. 위는 성매매 근절 퍼포먼스 모습.
낯선 나라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현주도 그런 여성 중 한 명이었다. 20대 초반에 집을 나와 여러 유흥업소를 전전했던 그녀는, 대다수 성매매 피해 여성이 그렇듯 나중에는 빚만 잔뜩 쌓였다. 업소들에서 비인간적인 취급을 견디다 못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결심하고 3년 전, 이곳 윙에 들어오게 되었다.

현주는 윙에서 여성학과 철학 등 평생 배워보지 못했던 분야를 공부했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영상물 만드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번에 필리핀으로 가져가는 영상물 중 한 편도 현주가 찍은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영상 활동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한국판 ‘희망의 인문학’이 성공한 셈이다. 윙이 다른 성매매 여성 쉼터나 교육 공간과 남다른 점은 바로 이런 것이다.  

대다수 ‘탈 성매매’ 관련 기관들은 여성에게 ‘자활’을 강조한다. 자활의 목표는 사글세든 전세든, 자기 ‘주거 공간’과 ‘일자리’를 빠르게 갖는 것이다. 6개월 정도면 상당수 여성이 일자리를 갖게 된다. 하지만 그 ‘질’에 대해서는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들 기관은 대체로 천편일률적이고 단기 프로그램밖에 운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훈련도 비즈 공예나 봉제 같은 수공업 분야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좀 나은 게 제빵 훈련 정도다.

겉보기에는 성매매 피해 여성들을 단기간에 취업시키는 괜찮은 프로그램인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우리 사회에서 한 번 주변화된 이들을 영원히 주변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분노 절제 프로그램’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 프로그램의 근본 문제점은 이들이 자기 분노를 절제할 줄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접근한다. 결국 이들로 하여금 ‘아, 나는 안 되는구나. 나는 영원히 이 사회의 낙오자구나’ 하는 자괴감만 들게 만든다. 자활 프로그램이 오히려 소외감과 열등감만 부추기는 꼴이다.

일반인들은 초·중·고교 12년, 길게 보면 대학까지 16년 동안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여유롭게’ 자기 삶의 가치관과 방향을 찾아간다. 하지만 성매매 피해 여성은 겨우 6개월 안에 이런 과정을 해치운다. 사실상 자립하기를 ‘강요’당하는 셈이다.

이들에게는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삶의 전망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인문학이나 여행처럼 긴 호흡을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처음 윙에 왔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겉으로만 돌던 현주가 영상 활동가로서 자기 정체성을 찾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자활이란 게 무슨 새마을운동처럼 뚝딱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자명 엄기호 (‘팍스로마나’ 가톨릭지식인문화운동 동아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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