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무렵부터 건강보험의 ‘매칭 구조’에 주목한 진보적 학자와 활동가 그룹이 있었다. 이들이 보기에, 가입자가 보험료를 낸 만큼 기업과 국가도 따라서 내야 하는 ‘매칭 구조’는 건강보험 재정 확충을 고민하는 진보 진영에 주어진 선물이었다. 이로부터 아주 역설적인 하나의 운동 전략이 나왔다. 이른바 ‘1만1000원 더 내기 운동’이다.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시민회의)’는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모여 논리를 벼렸고 이제는 성과를 낼 수 있는 단계에 진입했다고 자평한다.

시민회의의 논리는 이렇다. 건강보험료를 1인당 평균 한 달에 1만1000원 더 내서 매년 도합 6조2000억원을 더 낸다. 그러면 ‘매칭 구조’에 발이 묶인 국가와 기업은 따라서 6조2000억원을 내야 한다. 재정이 커지면서 추가되는 관리비 4000억원을 뺀다 해도 12조원의 건강보험 재정이 불어나게 된다. 이 돈이 추가되면, 건강보험 보장성 90% 달성과 연간 의료비 본인 부담금 100만원 상한제가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민노당 제공민주노동당(위) 등 야당은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 긍정적이다. 하지만 속도와 방법에 이견이 있다.


이를 민간 의료보험과 비교하면 차이는 극명하다. 가입자가 민간 의료보험에 6조2000억원을 부으면, 관리운영비로만 1조6000억원이 빠져나가고 보험 재정으로 4조7000억원만 남는다고 시민회의는 계산했다. 똑같은 6조2000억원을 넣었는데도 가입자 처지에서 새로 생기는 급여 재정 규모는 12조원 대 4조7000억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여러 개를 갖고 있는 민간 의료보험 하나만 정리하면 어마어마한 효과가 난다. 인지도만 오르면 엄청난 폭발력이 있다”라고 시민회의가 자신하는 이유다.

어찌 됐든, 시민 주머니에서 돈을 더 내자는 운동이 진보 진영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여전히 낯설다. 시민회의 운영위원인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지난해 12월에 쓴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 들여다보기’라는 글에서, 건강보험료를 결정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보심의위)’에 민주노총을 대표해 교섭위원으로 참여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매년 교섭은 엇비슷하게 마무리되었다. 정부의 뜻대로 5% 안팎에서 보험료율이 인상되었고, 나는 회의 직후 사무실로 돌아와 ‘서민 허리 휘게 하는 보험료 인상 규탄한다’는 성명서를 쓰는 것으로 한 해 건강보험 사업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교섭을 마치고 나면 왠지 후련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에게 경영자총협회 교섭위원이 다가와 따뜻한 연대의 말을 전했다. 우리 꼭 보험료 인상 막읍시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지금은 건강보험 재정확충 운동의 최전선에 있는 오 실장 역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민주노총 조합원의 주머니에서 당장 나가는 돈을 줄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같은 글에서 오 실장은 “내 교섭의 가장 큰 수혜자는 기업과 민간 보험회사, 피해자는 본인부담금에 울고 있는 서민들이었다”라고 후회했다.

 

 

 

 


오 실장의 글에 등장하는 건보심의위는 건강보험 보험료를 결정하는 테이블이다. 위원장 한 명, 정부 및 공익대표 8명, 의사협회 등 의료공급자 8명, 그리고 노조·농민단체·기업대표 등 가입자대표 8명이 모여 총 25명으로 구성된다. 매년 11월 이들이 모여 보험료, 보장범위, 의료수가 등 건강보험에 관련된 사항을 투표로 정한다. 대중의 관심을 받은 적은 별로 없지만 의료계에서는 생사가 걸리다시피 한, 한 해 최대 이벤트로 꼽힌다.

시민회의는 2012년 총선·대선 두 번의 대회전 국면에서 의료 공공성 문제가 2010년 무상급식을 뛰어넘는 핵심 의제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시민회의 이상구 운영위원은 “2012년 11월이 되면, 마치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의 성향 하나하나에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듯, 이들 25명의 입에 온 국민의 눈이 쏠리는 판이 벌어질 것이다”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무상급식 논란이 벌어진 2009년 경기도의회와 2010년 서울시의회가 대중의 관심을 끌었듯, 의료 공공성을 둘러싼 다음 전투에서는 건보심의위 테이블에서 가장 중요한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의미다. 시민회의가 생각하는 쟁점은 물론 ‘1만1000원 더 내기 운동’이다(다만 해마다 건강보험 재정 상황이 달라지므로 구체적인 액수는 매년 조금씩 바뀐다). 과반수 확보가 가능할까.

‘1만1000원’ 부담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숙제

이상구 위원은 자신 있다는 태도다. 하나하나 손꼽아가며 ‘표를 센다’. “노동단체, 농민단체, 시민단체를 합쳐 가입자대표 쪽에서 4표는 나온다. 의료공급자 쪽에서도 의협은 반대해도 한의사협회나 간호사협회는 보장성 강화가 더 유리하다. 이쪽도 4표가 가능하다. 정부 몫 8명 중 기획재정부와는 달리 보건복지부 쪽 사람들은 건강보험 재정 확충에 호의적이다. 2012년 정권 말이 되면 청와대 눈치를 볼 일도 없다.” 과반수가 된다면 그대로 돌파하면 되고, 안 된다면 보수 진영에 막혀 의료 공공성 강화가 좌절됐다는 ‘공분’을 안고 선거 국면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반응은 시민회의처럼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찬 태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진보신당은 공식적으로는 ‘보장성 90%’ ‘연간 의료비 100만원 상한제’ ‘보험료 인상’을 세 축으로 하는 시민회의 안을 당론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직접 ‘현장’을 뛰는 지역 일꾼들 사이에서는 갸우뚱한 반응이 나온다. 서울지역의 한 지역위원장은 “보장성 강화를 말하면 이야기가 술술 풀리다가, ‘1만1000원’에서 딱 막힌다. 무상급식은 ‘애들 밥 먹이는 문제’였고, 직관적이었다. ‘1만1000원’은 한 계단 거쳐야 이해가 된다. 전문가들이 책상에서 만든 걸 보면 아름답지만, 현장에서 이걸 들고는 정치하기 힘들다”라고 비관적인 반응을 보였다.

민주노동당은 ‘1만1000원 인상’에 비판적인 기류가 더 강하다. 2004년 총선에서부터 무상의료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민노당으로서는 노동자·농민 주머니를 먼저 여는 시민회의식 ‘사회연대 전략’과는 노선상 거리가 적지 않다.

핵심 전력이 되어야 할 민주당의 반응도 아직은 조심스럽다. 민주당은 1월6일 정책의총에서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의 내용 일부를 당론으로 받아들였다. 역시 민노당과 마찬가지로 보장성 강화·진료비 상한은 수용하고 ‘1만1000원’은 뺐다. 2015년까지를 목표로 잡아 시점도 가장 여유 있게 봤다. 그래도 당내에서는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민주당 박선숙 의원은 “이명박 정부를 잇는 차기 정부는 거의 외환위기를 승계한 김대중 정부와 다름없는 국가부채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보편적 복지라는 방향에 동의하지만 재정 전략은 엄밀히 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역공당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시민회의 역시 ‘1만1000원’은 잠시 접어두는 분위기다. 오건호 연구실장은 “당분간 그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보장성 강화라는 큰 틀에서 합의를 만들 때다. 보수 진영이 무시 전략을 버리고 ‘그래서 돈은 어떻게 할 건데?’라고 역공을 취하면 그때가 우리의 재정 전략을 본격 꺼내들 때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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