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저널〉 파업 기자들이 퇴직금을 모아 창간한 〈시사IN〉은 사원 주주 회사다(기자들이 주요 주주다). 비록 임금은 높지 않더라도 기자로서 일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구현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회사다. 그런데도 기자들은 ‘샐러리맨의 굴레’를 쉽게 벗지 못했다. 놀고 쉬는 데 적극적이지 못해서 연차휴가를 대부분 쓰지 않았고 바쁜 연말에 미뤄둔 연차휴가를 소진하느라 편집국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편집국장까지 나서서 ‘2주 휴가’를 적극 사용하라고 권고했지만 요령부득이었다. 남은 동료들에게 업무 과부하가 걸린다는 부담감 때문에 다들 ‘2주 휴가’ 사용을 주저했다. 잘 놀고 잘 쉬겠다는 적극적인 의지와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것을 대한민국 평균 샐러리맨의 자화상이라 보고 ‘잘 놀고 잘 쉬는 법’의 달인들, 일명 ‘놀쉬돌’을 찾아보기로 했다.
35~40세라면 직장에서 한창 일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들이 잘 놀고 잘 쉬기 위한 고민을 가장 많이 하고 있었다. 고민이 많다면 이에 대한 실천 의지도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되물었다. 잘 놀고 잘 쉬는 사례를 들려달라고. 그러자 ‘놀쉬돌’이라 불러줄 만한 사례가 쇄도했다. 세계일주 여행을 다녀온 사람, 주4일 이하로 근무하는 사람, 한 달 이상 휴가를 내본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298세대, 조기 은퇴도 불사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열심히 놀 궁리를 하는 세대, 그래서 일하고 남는 시간에 쉬는 것이 아니라 쉬기 위해 일하는 세대, 집에 투자하기보다 자신에게 투자하는 세대, 그래서 집을 산 친구보다 집을 포기하고 세계일주 떠나는 친구를 더 부러워하는 세대, 미래를 꿈꾸기보다 그 꿈을 다이어트하고 현재를 즐기는 세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일단 〈시사IN〉 동료들을 저버리고 잘 놀고 잘 쉬기 위해 사표를 쓰고 제주도로 내려간 한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였건만 의리도 없이 취재를 거부했다. 남들에게 방해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내려간 지 1년이 넘었지만 그는 뚜렷한 직업을 찾지 못했다. 아니 찾지 않았다. 더 벌 궁리를 하는 대신 덜 쓸 궁리를 했다. 겨우 몇 마디 얻어들었다. 어떻게 먹고사냐는 질문에 퉁명스럽게 답했다. “가을에 귤 땄어. 일당 4만원에 20일 동안. 길러서 먹고, 만들어서 쓰면 덜 벌어도 돼.”
제주도는 이런 놀쉬돌들의 아지트다. 바람의 섬 제주가 이들을 바람 들게 하는 데는 제주올레의 영향도 컸다. 바람처럼 올레 코스를 돌던 이들은 돌하르방이 되어 제주에 정주하곤 했다(제주도에 ‘쫄깃센터’를 세운다는 만화가 메가쇼킹 등 제주 놀쉬돌은 나중에 따로 취재할 예정이다).
놀쉬돌의 특징은 조기 은퇴다. 명예퇴직 뒤 창업하는 부모 세대와 달리 이들은 조기 은퇴 후 ‘꿈’에 취직한다. 1975년생(94학번)인 안경미씨는 경영컨설팅 일을 10년 하고 지난해에 일을 줄였다. 평소 꿈인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어서 근무시간을 일주일에 이틀 반으로 줄였다. 그는 “일하고 쉬는 시간엔 그림책학교를 다니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한 달 전부터는 사표를 내고 작업에 몰입했다”라고 말했다.
휴식 지상주의자인 이승환씨(1975년생)는 주4일만 근무한다. 수입이 줄더라도 자기계발을 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그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주4일 근무를 하니까 다시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 꿈꾸는 소년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생각이 찼다. 그래서 소설을 한 편 쓰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예 기업 문화를 바꾸는 방법도 있다. 경재찬씨(1972년생, 91학번)가 다니는 광고회사는 ‘유목 사무실’을 선언하고 주3일 출근에 도전한다. 그는 “주3일 출근을 준비 중인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관리인 것 같다. 1월 한 달간 진행하면서 보완점을 찾기로 했다. 모두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눈치인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라고 말했다.
놀쉬돌의 또 다른 특징은 여행이다. 잠시 숨을 돌릴 정도의 여행이 아니라 확실한 쉼표를 찍는 장기 여행이다. 1972년생(91학번)인 KBS 포항총국 김은주 작가도 그런 여행을 다녀왔다. 방송 일에도 물이 올랐고 박사 과정도 거의 다 끝나가면서 강의가 여기저기서 들어와 안정을 찾아가던 시점이었다. 모든 것을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이 빚어낸 근면은 많은 성취를 이끌어줬다.
불확실한 미래보다 현재에 더 충실
그러던 어느 날 김 작가는 홀연히 두 아이를 데리고 필리핀 마닐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한동안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지독한 일 중독자로 살던 삶에서 일순간에 아무 할 일도 없는 삶으로 바뀌자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몸이 멀어지니 일도 멀어졌다. 여유를 즐기고 온전히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두 달을 보내고 다시 바쁜 일상에 편입되었지만 ‘언제든 또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독제가 되었다.
바람의 딸들, 대한민국 30대 여성은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여행자로 꼽힌다. 물대포 앞에서도 유모차를 끌고 맞섰던 이들은 ‘유모차 해외여행’도 불사한다. 1972년생(91학번)인 방송작가 김세윤씨도 올해 두 아이를 데리고 한 달 동안 타이와 타이완으로 여행을 간다. 그는 “후배가 애인과 여행 가는 것을 보면서 미혼이니 가능하지 했다가 ‘까짓 거 난 왜 안 돼?’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결단했다”라고 말했다.
여행은 또 다른 여행을 부른다. 1977년생(96학번)인 직장인 박유경씨는 매년 초 연간 여행 계획을 짠다. 15일의 연차를 토막 내 3~5일 휴가 일정을 만들고 항공권과 숙박권 등을 미리 예약해둔다. 두 달에 한 번꼴로 해외여행을 가는데 철칙은 여행 준비는 철저하게 하고 여행을 가서는 최대한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성수기 때는 여행을 가지 않고 관광객이 몰리는 곳은 피한다.
대학 때 아르바이트 비용을 배낭여행에 탕진했던 그는 지금은 월급을 세계여행에 쓰고 있다. 그러나 내공이 쌓인 만큼 저비용 고효율 여행을 즐기고 여행후기 공모 등을 통해 여행 경비를 되돌려 받으며 여행상품권도 확보한다. 박씨는 “두 번에 한 번꼴로 공짜 여행을 가는 것 같다. 여행을 잘한다는 것은 많이 느끼고 오는 것이다. 그 느낌을 잘 전달하면 또 다른 여행 기회가 생긴다”라고 말했다.
놀쉬돌은 신혼여행도 바꿔놓았다. 온천 여행에서 제주도 여행을 거쳐 해외여행으로 변모해온 신혼여행이 298세대 때에 이르러 세계일주 여행으로 진화했다. 1977년생(96학번) 진은지씨는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해 세계일주 여행을 하고 왔다. 1971년생(90학번) 임경화씨는 아내에게 세계일주 여행을 시켜주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결혼 승낙을 얻었다. 기성세대가 은퇴 뒤 세계일주 여행을 계획할 때 이들은 세계일주 여행으로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1980년생(99학번)인 강수진씨도 2년 동안 세계일주 여행을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허망한 계획은 아니다. 이미 1년 동안 해외여행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계획은 이렇다. 필리핀에서 3개월 단기 영어 연수, 동남아 여행(3개월), 인도 거주와 히말라야 트레킹(6개월), 유럽 여행(3개월), 스페인 거주와 스페인어 공부(3개월), 아프리카 여행(2개월), 북미 여행(1개월), 남미 여행(3개월), 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 여행(1개월).
강씨는 배낭여행을 어깨너머로 배웠다며 “중학교 때 둘째 언니(92학번)가 한 달 넘게 중국 배낭여행을 하는 걸 보았다. 고등학교 때 셋째 언니가 역시 한 달 넘게 인도 여행을 하는 걸 보았다. 그래서 대학생은 누구나 혼자 배낭을 메고 여행을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살기보다는, ‘지금 살고 있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자’는 신조를 가진 그녀에게 여행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충실한 순간이다.
298세대 놀쉬돌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은 놀이와 휴식이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느슨한 시계가 홍대 앞 카페 문화를 일궜고 인터넷 블로그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뒤쪽에서는 대표 놀쉬돌 4명의 이야기(70쪽~73쪽 참조)를 통해 이들이 사는 모습을 더 심도 있게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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