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지난해 12월27일 이명박 당선자(왼쪽)와 박근혜 전 대표(오른쪽)가 만났지만 불화만 커졌다.
지난해 12월27일, 대선 이후 처음으로 이명박 당선자와 박근혜 전 대표가 만났다. 그런데 자리 배치가 이상했다. 대선 과정에서 박 전 대표가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향후 국정 운영에 도움을 요구하는 자리였는데도 배려가 보이지 않았다. 이 당선자가 중앙 상석에, 박 전 대표는 옆에 앉았다. 박 전 대표의 맞은편에는 임태희 비서실장이 앉았다.

만나고 나서는 더 이상했다. 논란이 된 공천 시기와 관련해 서로 이야기가 달랐다. 박근혜 전 대표는 “공천 시기를 늦추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라고 말했지만 이명박 당선자 측에서는 이를 정면으로 부인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졸지에 혼자 김칫국을 마신 실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새해로 접어들면서 양측의 갈등은 더욱 고조되었다. KBS와 나눈 신년대담에서 이 당선자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나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등을 위해 새 정부 출범 뒤 공천을 하는 것이 맞다”라며 공천 연기를 기정사실화 했다. 이명박 당선자의 측근인 정두언 의원은 박 전 대표 측이 공천 시기에 민감한 것은 ‘피해의식’이라고 말하며 이 당선자를 거들었다.

그러자 박근혜 전 대표가 발끈했다. 박 전 대표는 평소 같지 않게 격한 말들을 쏟아냈다. 1월2일 박 전 대표는 “공천을 미루는 게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라며 문제 제기를 한 데 이어 1월3일에는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 신년하례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피해의식이라는 것은 우리 쪽이 아니라 그쪽인 것 같다. 피해의식 정도가 아니라 피해망상이다”라고 더욱 격하게 비난했다.

유승민 의원과 김무성 최고위원 등 박 전 대표의 측근도 거들었다. MBC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유 의원은 “우리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은 있다. 당협위원장 같은 분들과 함께 주장을 하고 그 뜻을 관철하겠다”라고 했다. 김 최고위원은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지난 10년간 한나라당을 지킨 동료들에 대해 물갈이라는 말로 인격 모욕을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라며 이 당선자 측을 비난했다.

그러나 이런 박 전 대표 측의 파상 공세에도 불구하고 이 당선자 측은 초지일관할 태세다. 이방호 사무총장 겸 총선기획단장 내정자는 “대통합민주신당과 ‘이회창당’이 3월 중순에야 공천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만 공천을 서두르는 것은 전략적으로 맞지 않다. 3월 초순 정도에 공천을 완료하면 충분하다”라고 말했다.

안상수 원내대표도 “만일 2월에 공천을 한다면 인수위 작업이나 새 정부 구성 작업이 제대로 될 수 있겠느냐. 2월까지 정부 구성을 마무리 짓고 각종 제도와 법령을 정비한 뒤 2월25일 새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 공천이 이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당선자 측의 좌장 격인 이재오 의원도 “이명박 브랜드로 총선을 치러야 유리하다. 이명박 뜻을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을 공천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강재섭 대표도 이 당선자 측 의견과 가깝다. 강 대표는 CBS 라디오에 출연해 “정치개혁특위가 선거구 획정을 위한 합의를 해야 한다. 어떤 지역구는 인구가 늘고 줄고 하는 것이 가닥이 잡혀야 공천 신청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말해 공천이 늦춰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박 전 대표는 이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공천 시기에 대해 박근혜 전 대표 측이 민감한 까닭은 시기가 늦춰지면 박 전 대표 측 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선거가 임박하면 공천에서 배제되더라도 손 쓸 방법이 없으므로 박 전 대표 측에서는 조기 공천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박 전 대표 측에서는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밥그릇 싸움으로만 비칠 수 있다는 염려에서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유승민 의원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상황을 계속 지켜봐야 할 것 같다. 페이스 조절이 좀 필요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박투구' 보며 미소 짓는 이회창

이명박 당선자와 박근혜 전 대표의 이런 피 튀기는 ‘이박투구(李朴鬪狗)’를 멀찌감치 지켜보면서 미소 짓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회창 전 총재다. 신당을 창당할 예정인 이 전 총재로서는 박 전 대표가 이 당선자와 결별하고 합세하는 것이 최고의 수이기 때문이다. 이 전 총재 측에서는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붙었던 ‘자민련 바람’을 내심 기대하고 있다.

이회창 전 총재의 최측근인 이흥주 특보는 “피를 나눈 형제도 나눠 갖지 못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둘은 결국 결별할 것이다.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박 전 대표 측 의원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은데, 어려울 듯하다. 승자와 패자는 하늘과 땅이 아니라 하늘과 지하 500m 갱도의 차이다”라고 말했다.

이 전 총재 측은 박근혜 전 대표가 결합하면 60~70석 달성도 가능하다고 자신한다. 자신과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 그리고 영남뿐만 아니라 충청 지역에서도 인기가 좋은 박 전 대표가 결합하면 충청권에서 바람을 일으킬 수 있고, TK에서도 선전하고, 강삼재 전 의원과 김혁규 전 지사가 있는 PK 지역에서까지 교두보를 만들어낸다는 복안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 전 총재 측의 바람일 뿐이다.

이명박·박근혜·이회창, 이 세 정치 리더가 어떻게 각축하고 어떻게 연대할지 예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선 전후로 이 셋을 둘러싼 정치 환경이 바뀌면서 그들의 관계 또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 처음 꽃놀이패를 쥔 사람은 이회창 전 총재였다. 박빙의 승부를 벌이던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가 모두 구애를 펼쳤는데, 이 전 총재는 “이렇게 지독한 경선은 처음 본다”라며 이 후보에게 유리할 수 있는 발언을 했다.

ⓒ연합뉴스이회창(왼쪽)·박근혜(오른쪽) 씨의 연대 여부가 관심을 모은다.
러나 경선이 끝나고 이명박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로 결정된 뒤에는 이 전 총재가 이 후보와 거리두기를 했다. 이 후보가 찾아오기로 한 날 배탈을 핑계로 만남을 피했다. 그리고 선거에 임박해서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독자 출마를 감행했다. 이후에는 이 전 총재가 박 전 대표에게 구애를 펼쳤다. 특히 투표일에 임박해서는 삼고초려를 불사하며 박 전 대표를 찾아갔지만 끝내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대선이 끝난 뒤에는 또 처지가 바뀌었다. 이제 이명박 당선자 측에서는 박근혜 전 대표를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는다. 일부 언론에 박 전 대표를 총리로 기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는 공식으로 제안된 적이 없다. 박 전 대표의 측근은 “총리 제의를 전혀 받은 바 없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아 불쾌하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선택할 마땅한 카드 없어

현재 시점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것은 박 전 대표가 이 당선자와 결별하고 이 전 총재와 연대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 당선자 측이 이런 식으로 요지부동일 경우 박 전 대표가 결국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 관계자는 이 선택은 가장 가능성이 낮고, 박 전 대표가 가장 선호하지 않는 선택이라고 분석한다.

정치권에서는 박 전 대표가 직접 센 발언을 하고 나서는 것이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며 다른 묘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세게 나오는 것이 나가기 위한 절차를 밟는 게 아니라 오히려 판을 흔들어 붙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다는 것. 실제로 유승민 의원은 “의원들이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의원들 사이에서도 아직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회창 전 총재 측에서는 15대 국회의 자민련 모형을 생각하며 박근혜 전 대표의 탈당을 기대하고 있지만 박 전 대표 측 의원들은 16대 국회의 민국당 모형을 우려하며 탈당을 꺼려 한다. 15대 국회의원 선거 전 민자당에서 탈당한 김종필 총재는 충청을 지역기반으로 해서 PK(부산 경남) 정부에 대한 TK(대구 경북) 지역 주민의 소외의식을 자극해 자민련 돌풍을 이뤄냈다. 반면 16대 국회에서는 윤여준 전 장관이 주도한 개혁 공천으로 떨어져나간 한나라당 의원들이 민국당을 급조했지만 총선에서 참패했다.

박 전 대표 측 의원들이 걱정하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자민련 돌풍 상황보다 민국당 침몰 상황과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15대 대선은 1996년에 치러져서 1993년에 들어선 김영삼 정부를 심판하는 기능을 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이회창 전 총재가 대세론을 형성했던 2000년 16대 총선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이 당선자에 대한 국민 지지도가 높고 국정 안정을 위해 한나라당에 표를 몰아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회창 신당과 합당하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이명박 당선자 측과 박근혜 전 대표의 공천 시기 논쟁은 겉으로 ‘치킨 게임’으로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칼자루를 쥔 사람과 칼날을 쥔 사람이 싸우는 ‘갑과 을의 전쟁’이라는 것이 정치권의 대체적 평가다. 박 전 대표의 한 측근은 “이명박 당선자가 무엇이 자기에게 정말 이익이 되는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본다. 5년 동안 안정되게 국정을 펼치려면 누구를 파트너로 삼아야 할지 잘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이 당선자가 공천 시기를 양보하면서 박 전 대표를 끌어안을까? 현재로서 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당선자 측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선거 과정에서 이 당선자의 멘토 역할을 했던 윤여준 전 장관의 말이 답이 될 것 같다. 그는 당시 〈시사IN〉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배지를 안 달고도 (개혁 공천을) 했다. 이재오 의원은 최고위원이 아니냐(당시 최고위원).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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