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취임한 뒤 ‘핵무기 없는 세상’을 자신의 핵심 외교 과제로 설정해 러시아와 전략핵무기감축협정의 갱신을 추진해왔고, 그 덕에 2009년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그간의 줄기찬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번 협정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핵무기의 95%를 지닌 미국과 러시아는 전략핵무기보다 훨씬 많은 전술핵무기 문제는 아예 건드리지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비공식 핵무장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은 물론이고 핵을 개발 중인 이란, 그리고 핵실험을 두 번이나 강행한 북한처럼 핵 야욕을 버리지 않는 나라들이 존재하는 한 오바마 대통령이 꿈꾸는 ‘핵무기 없는 세상’은 요원하기만 하다.
사실 이번 핵감축 협정은 여러 방면에서 괄목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이번 협정은 조지 H. 부시 대통령 시절인 1991년 당시 소련과 체결해 이미 시효가 만료된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대체한다는 점이다. 새 협정은 잠수함 발사 미사일과 핵탄두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는 중폭격기, 그리고 전략 미사일을 통틀어 800기로 제한하되 그 가운데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 수를 700기로 한정했다. 또한 유사시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는 핵탄두 수도 양국이 각각 1550기로 제한했는데, 이는 2002년 전임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러시아와 합의한 것보다 30%가 줄어든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기존 핵감축협정에 명기되지 않았던 검증 조항을 포함시킨 것이다. 즉 협정이 발효된 뒤 양국의 핵 사찰관들이 상대국을 방문해 직접 눈으로 핵감축 이행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며, 상대국에 예고 없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기지나 잠수함 기지를 매년 10차례 사찰할 수 있게 되었다. 양국은 앞으로 10년에 걸쳐 이번 협정을 이행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이번 협정에도 취약점은 있다. 가장 핵심 대목은 재래식 병력에 맞서기 위해 배치한 전술핵탄두 수를 제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미국 연방 상원의 비준을 받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신전략핵무기감축협정을 마무리한 뒤 러시아와 다시 협상하겠다며 상원을 달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전술핵무기 분야는 러시아가 미국에 비해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어 합의가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오바마 대통령이 재임 중 매듭짓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많다. 실제 러시아는 현재 전술핵무기를 3800기 보유하고 있지만, 미국은 500기도 안 된다고 짐 리시 공화당 상원의원은 주장한다. 공화당 측에서 이번 협정의 반대를 주도한 존 카일 상원의원은 “앞으로 우리가 전략핵무기를 줄여가면서 전술핵무기 수가 갈수록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러시아와의 격차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전술핵무기 부분에 취약점이 있는데도 이번 협정은 반대론자보다는 지지론자 층이 더 두꺼운 편이다. 당초 상원의 공화당 의원 전원이 반대표를 던질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오바마 대통령과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 최고위 수뇌부는 말할 것도 없고 전직 공화당 행정부의 명망 있는 인사들까지 나서는 바람에 공화당 상원의원 13명이 찬성 쪽으로 기울었다. 헨리 키신저·조지 슐츠·제임스 베이커·콜린 파월·콘돌리자 라이스 등 공화당 지도급 인사도 포함되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끈질긴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막판까지 주저하던 공화당 상원의원들을 달래기 위해 핵감축협정이 이행되는 앞으로 10년간 850억 달러를 투입해 핵시설을 현대화하기로 공약했다. 또 유럽에 미사일 요격망 기지를 구축하겠다는 점도 확언했다.
러시아 혹은 옛 소련과 전략핵무기감축협정을 끌어내기는 민주당 행정부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사실상 처음이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경우 1979년 옛 소련과 2단계 전략무기감축협정에 합의하고도, 옛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바람에 상원에서 공화당의 반대로 비준에 실패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지하핵실험 금지조약을 옛 소련과 합의하고도 공화당이 반대해 상원 비준을 받지 못했다. 반면 옛 소련과 핵감축 협정을 발효시키는 데 성공한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부시 전 대통령이 모두 공화당 소속이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오바마 자신이 공약한 대로 이제부터는 러시아를 상대로 전술핵무기 감축을 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하지만 상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공화당 출신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신전략핵무기감축협정이 이렇게 힘들었다면 앞으로 남은 과제가 얼마나 더 힘들지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현재 러시아는 미국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는 전술핵무기 부분에 대해 미국과 언제 협상에 나설지 태도를 밝히지 않은 상태다. 미국 국무부의 로스 고트뮐러 군축검증준수 담당 차관보는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우리도 전술핵무기 부분과 관련해 먼저 연구해야겠지만, 러시아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큰 협상을 시작하려면 먼저 철저한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특히 국무부가 비록 협상의 주무 부처이기는 하지만 협상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방부와 에너지부 등 직접 이해 부처와의 사전 조율이 필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 러시아와 협상에 나서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 분명하다. 존 케리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은 이번 핵감축협정이 비준된 직후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1년 내 전술 핵무기 감축에 관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라고 오바마 행정부에 촉구했다.
러시아는 미국이 이란의 탄도미사일 공격을 빌미로 유럽에서 추진 중인 미사일 요격망 건설 계획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다. 러시아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만일 미국이 예정대로 동유럽에 미사일 요격망 건설을 완료하면 현재 러시아 내륙 깊숙이 배치해두고 있는 전술미사일을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 즉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이 있는 서유럽 쪽으로 이동시키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아 못지않게 신경 써야 할 내부의 ‘적’도 만만치 않다. 바로 조약 비준권을 쥔 상원의 판도가 공화당의 득세로 1월부터 크게 바뀐다는 점이다. 종전에는 민주당 59석, 공화당 41석이었지만 더 이상 우군인 민주당이 절대 다수당이 아니다. 비준안의 경우 재적 의원 3분의 2 찬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아를 상대로 아무리 훌륭한 전술핵무기협정을 따내도 공화당의 협조 없이는 상원 비준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공화당 내에는 리처드 루가 의원처럼 합리적인 온건파 의원이 있는가 하면, 존 카일 의원처럼 대러시아 군축협상에 관한 한 절대 양보하지 않으려는 냉전파 의원도 적지 않다. 이로 인해 공화당 내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골칫거리다. 이들은 러시아와의 핵합의를 일종의 ‘유화책’이라며 극구 반대하고 있다.
또 다른 큰 걸림돌이라면 핵 개발 야욕에 불타는 이란(오른쪽 상자 기사 참고)과 이미 핵 개발을 완료한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핵실험을 단행한 북한 등을 꼽을 수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아무리 핵감축협정을 맺더라도 제3세계에서 이처럼 핵 개발이 확산되는 걸 방지하지 못하는 한 ‘핵무기 없는 세계’는 영원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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