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진로학교 마지막 강의는 그동안 사회를 맡았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송인수 공동대표가 맡았다. 송 대표야말로 우리 사회 누구나 체념하고 방관했던 사교육 불패 신화에 도전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그야말로 새로운 길을 가는 이다. 그는 서울대 법대 출신 판사, 일명 ‘경판(서울에서 근무하는 판사)’을 가장 좋은 직업 1순위로 꼽는 우리 사회의 천박함이 사라져야 사회가 좀 더 밝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12월21일 있었던 강좌를 지상중계한다.

진로 선택을 하는 데 제게 가장 큰 문제는 가난이었어요. 호기심이나 어떤 특정 영역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습니다. 가난으로부터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동안 저를 부지런히 달리게 만든 힘의 근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는 닭장사를 하는 어머니를 도왔어요. 여러분, 산 닭 죽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상품성이 떨어지므로 목을 비틀어도, 몽둥이로 때려도, 목을 잘라도 안 됩니다. 급소를 때려야 합니다. 6년 동안 제 손으로 죽인 닭이 15만에서 20만 마리는 될 겁니다. 나중에는 멀쩡한 닭의 털을 뽑은 뒤 요리 직전 상태로 만드는 데 채 4~5분이 안 걸리더라고요. 전문성이란 걸 저는 복잡하게 생각 안 합니다.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면 되는 거예요.


너무 가난해서 혹시 어머니가 나를 고아원에 보내 버릴까봐, 아니면 평생 닭을 죽이는 일만 하게 될까봐 저는 공부를 죽어라 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고등공민학교 들어갈 때 배치고사에서 60명 정원에 26등 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전교 1등도 했습니다. 새벽까지 닭장사를 도우면서도.

가난을 탈출할 최종 선택은 국립 사범대였어요. 교사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고, 사대 가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학 시절 저는 시위를 한 적도, 지하 서클에서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공부한 적도 없었어요.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다보니 사회문제에 대답할 출구가 별로 없었어요. 엉거주춤한 가운데 대학원을 진학했는데 1986년 문익환 목사님이 오셔서 연설을 하셨는데 그때 이동수라는 친구가 학교 아크로폴리스 옆 학생회관에서 분신자살을 했어요. 그때 교회 대학부도 이 사건을 상당히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요. 1년 선배 한 분이 일어나 그런 얘기를 했지요. 나는 이동수처럼 시국이 어렵다고 해서 내 몸을 불사를 용기는 없다, 그저 죽을 때까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다 나눠주고 죽을 때는 더 이상 나눠줄 것이 없는 바싹 마른 상태로 죽겠다고. 굉장히 뚱뚱한 분이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웃어서 그 엄숙했던 분위기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됐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 선배의 말을 가볍지 않게 들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 끝까지 낙오하지 않고, 조금씩, 겸손하지만 그 일에 천착해서 자기를 들이는 것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입니다.

1987년 대선 선거감시 운동이 시작됐을 때 보수적인 기독교 학생 2000명 정도가 참여합니다. 저도 거기에 참여해, 임원 5인방 중의 한 사람으로서 여관에서 침식을 하며 열심히 선거감시 운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참담한 실패로 끝났어요. 5인방은, 저만 운동감각이 떨어지고 나머지는 다 잘나가는 친구들이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운동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주위에서 그래요.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더니 당신이 그렇군요.’ 아, 진짜 못생긴 것은 맞는데 그렇게 얘기하니까 상처가 되더라고요(웃음).

왜 저만 남았을까요. 이동수란 친구는 자기 몸에 불을 질러 도서관에서 뛰어내려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를 풀려고 했는데,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아직 답을 찾지 못했던 겁니다. 끈기 있게 답을 찾아온 것이 오늘 저의 삶입니다. 닭장사하듯 하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 끈기 있게 애를 쓰면서 그 자리를 지키는 끈기가 오늘의 저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래에는 7~8차례 직업 바꿔야

대학원에서 지도교수와 심각한 갈등을 겪어 더 이상 학교 생활을 할 수 없었어요. 사범대는 국가에서 학비 보조를 받기 때문에 3년 정도는 의무적으로 교직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안 하면 다 뱉어내야 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학교에 갔어요. 아이들 만나기 싫으면서도 그냥 끌려간 거죠. 그런데 교사를 하면서 뜻하지 않은 기쁨을 맛봤어요. 아이들이 딴전을 안 피우고 제 수업에 완전 몰입하는 겁니다. 책상에 늘 꽃이 있고, 오렌지주스가 있고, 그 옆에 편지도 있었지요. 이 3종 세트를 받으면 너무너무 행복해요.

그렇게 행복한데도 저는 그즈음 많이 고민했습니다. 더 이상 아이들과 함께하는 삶에 흥미를 느끼지 못할 때 나는 무엇으로 나를 움직여야 하는가,라고. 40대에도 50대에도 변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어요. 그러다 그해 12월 가르치던 아이가 자기가 직접 쓴 시를 보내줬어요. 거기에는 ‘충혈돼 빨갛게 그어진 선생님의 눈 속에도 사랑이 흐르고’라는 구절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마음속의 번뇌를 내려놓았습니다. 내가 좋아하던 음악 테이프도 버리고,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교사 모임에 나가기 시작합니다.

2000년에 교사 모임을 갖게 됐어요. 교사 1500~2000명 정도가 모여서 ‘좋은교사운동’을 시작했죠. 책임을 맡은 저는 고민 끝에 퇴직을 했습니다. 교원평가를 지지했을 때는 가까운 친구들이 등을 돌리는 끔찍한 경험을 했어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직업적 이해관계를 포기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버틸 수 있었죠. 2005년에 회원이 20~30명 떠났지만 700명 정도가 새로 가입했어요. 저희 운동은 좌초하지 않았어요. 교원평가가 나쁘지는 않은데 조직 내에서 지도력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없이 반대 투쟁을 해야 한다고 말하던 어떤 교원단체의 대표는 오히려 실각했어요. 저는 사회적 가치를 위해 우리의 이해관계를 내려놓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교사운동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7~8차례 직업을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저 역시 많이 바꾸었습니다. 저는 인생에 직선은 없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부모님은 아이가 샛길로 새지 않고 직선으로 달려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 생에는 직선이 없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4대강을 다 펴면 아름답겠습니까. 곡선이니까 유장한 거지요. 유장하려면 깊이 있는 물이 돼야 합니다. 깊이 있는 생각, 통찰을 품어야 합니다.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방해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우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로를 선택하고 다음 진로를 찾을 때 지금 있는 길과 전혀 다른 쪽으로 점핑을 하는 게 아니고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다음 일의 실마리가 찾아집니다.

일곱 분 강사의 얘기를 들어보면 자기가 가진 장점이 뭔지 깨닫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제 기본기는 끈기였던 것 같아요. 그걸로 일생을 버텨왔어요. 그런데 호기심은 없었어요. 책도 필요해야 읽어요. 책 자체가 일러주는 호기심에 끌려 밤새우는 법은 없어요. 호기심과 끈기를 키워주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무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질과 심리적 특징까지 고치려 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이가 혼자 헤쳐가야 할 것을 부모가 대신 해주려고 덤벼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강의를 들으면서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 재능과 적성을 활용해 사회에 기여함으로써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 만족감을 경험하고, 가정을 떠나 독립된 생활이 가능하면서 소박하고 절제된 경제생활을 하는 것. 여기에 많은 이들이 더 살을 보태시기 바랍니다.

※ ‘행복한 진로학교’ 강좌 중계는 이번 호가 마지막입니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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