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20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선언한 ‘한국형 복지국가’는 한국 정치 지형을 전면적으로 흔드는 결정적 계기가 될 듯하다. ‘박근혜 복지 모델’이 유달리 뛰어나서가 아니다. 민주당을 비롯한 거의 모든 야당이 정부·여당에 대항해 형성한 ‘복지 블록’에 가장 유력한 미래 권력이 불쑥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정치인 지지율로 따지면 한국인 중 절반 훨씬 넘는 인구가 복지 블록에 포함된 셈이다.

더욱이 박 전 대표의 한국형 복지국가론은 영국 신노동당의 정치·사회 노선이었던 ‘제3의 길’ 혹은 ‘사회투자국가론’을 사실상 표방하고 있다(18~19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런데 사회투자국가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옛 민주당,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2009년 뉴민주당 플랜 당시의 민주당, 현재 국민참여당을 이끌고 있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내건 노선이기도 하다. 박 전 대표가 꽤 과격한 ‘사상 전향’을 한 것이다. 그리고 복지 블록 내에는 사회투자국가론에 상당히 비판적인 ‘역동적 복지국가’ 진영과, 양대 진보 정당이 존재한다. 이는 복지 정치를 둘러싼 치열한 투쟁을 예고하는 형세이다.
 


복지의 백가쟁명(百家爭鳴), 백화제방(百花齊放) 시대가 열리고 있다. 〈시사IN〉은 이에 참여할 정치·사회 세력들을 분류해 각각의 비전과 전략을 정리해보았다(오른쪽 그림 참조).

조·중·동은 무조건 ‘복지 반대’

복지와 시장(경제)은 마치 상충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예컨대, 복지 지출이 가능하려면 시장(경제)이 잘 돌아가 정부가 많은 세금을 징수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복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야 시장이 활성화하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복지와 시장을 양대 축으로 각 정치 세력이 표방하는 노선을 분류해보았다.

우선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등 보수 일간지는 가장 일관되게 ‘복지 반대’를 표명해온 세력이다. 이들에 따르면 “여야의 무상급식 경쟁은 바로 국민 망치기 경쟁과 같”(2010년 3월16일자 〈조선일보〉 사설)고 “‘공짜 공화국’은 결코 오래 지탱할 수 없다”(12월18일자 〈동아일보〉 사설). 〈문화일보〉는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 대해 “신흥 사이비 종교의 신도 유인 문구”라는 막말까지 서슴지 않으며 적대감을 보인다. 한·미 FTA에 대한 이들 신문의 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국내든 국제든 시장 자유화를 경제 문제의 만병통치약으로 보는 시각은 신기할 정도로 동일하다.

 

 

 

ⓒ시사IN 안희태‘유력한 미래 권력’인 박근혜 의원은 ‘한국적 복지’를 선언함으로써(사진), 잠재적 대선 후보 경쟁자인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선을 그었다.

 

그러나 보수 언론의 복지 반대는 언론 집단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부·여당의 주류 세력 중에는 속내야 어떻든 노골적으로 복지를 반대하는 움직임을 찾기 힘들다. 오히려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해 10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70% 복지’를 주장했고, 6·2 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표 무상급식’ 공약이 여기저기에서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이념과 상관없이 문자 그대로 표를 얻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복지를 ‘즐기는 것’으로 표현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의 발언, “우리가 복지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호언장담, 서민 예산을 무더기로 삭감 내지 철회한 날치기 예산, 재정지출 증가율을 재정수입 증가율보다 2~3% 낮게 잡은 중기 재정계획 등에서 이들의 ‘진심’은 바로 확인된다.

반복지 세력에게 복지는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경제성장의 장애물일 뿐이다. 실업자의 경우 복지 급여가 없다면 아무리 임금이 낮고 근무 환경이 열악한 기업이라도 취업할 수밖에 없을 테고, 이것이야말로 ‘노동시장의 제대로 된 작동’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OECD 국가 대다수가 ‘망국적 포퓰리즘’에 멍들어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언급하지 않는다. 한국의 GDP 대비 복지 지출 비율은 아무리 잘 봐줘도 OECD 평균의 50% 내외이며, 순위로는 끝에서 1~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제 복지 블록으로 넘어가자. 복지 블록의 노선은 대체로 사회투자국가론, 역동적(보편적) 복지국가론, 진보 정당의 복지국가론(21쪽 상자 기사 참조)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가장 스펙트럼이 넓은 집단은 사회투자국가 진영이다. 김대중·노무현으로 대표되는 구여권의 주류는 물론 이른바 친노 세력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유시민 전 장관,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등이 이를 대표한다.

민생 불안과 바꾸었던 복지

사실 한국 사회가 사회투자국가론을 수용하게 된 계기는 1997년의 외환위기 사태였다. 1998년 집권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 구제금융을 받으려면 정리해고, 부실기업 퇴출 등 강도 높은 노동·기업 구조조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이에 따라 민생불안이 극도에 달할 것은 불문가지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복지제도를 본격 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국정지표로 삼은 ‘생산적 복지’는 클린턴·블레어가 주장한 ‘근로 연계 복지’(일을 해야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복지제도)의 한국판이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김대중 시대에는 ‘기초생활은 보편적 사회권’이라는 복지 개념이 처음 도입되었고, 4대 사회보험이 전 국민과 사업장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수동적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임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회투자국가론’을 적극적·공세적으로 전개했다. 아동발달지원계좌(저소득 어린이가 이 계좌에 일정한 금액을 적립하면 정부가 같은 금액을 넣어주고, 18세 때 인출해서 고등교육이나 창업 비용으로 사용토록 함), 희망스타트 프로젝트(저소득층 아동에게 건강·교육 등 맞춤형 서비스 제공) 등 영미 사회투자국가의 정책이 그대로 도입된다. 노 전 대통령은 ‘사회 투자는 우리 국민을 경쟁력 있는 국민으로 만들자는 것이며 사람이 경쟁력’이라는 사회투자국가론의 대표적 슬로건을 언급하곤 했다.

 

 

 

 

ⓒ뉴시스오세훈 서울시장

 


2011년 초 현재 사회투자국가론을 국가 발전 노선으로 가장 분명히 정식화하고 있는 인물로는 유시민 국민참여당 참여정책연구원장과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이 있다. 이들은 사회투자국가론자답게 복지 체계에서 시장과 ‘소비자 선택권’을 강조한다. 그리고 수혜자에게 국가가 현금을 지급하는 방식보다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예컨대 보육에 필요한 비용을 국가가 현금으로 개별 가정에 지급하는 것이 ‘현금 이전’이라면, ‘보육원 이용권’을 주는 것은 ‘사회 서비스 지급’ 방식이다. 전자는 부모가 현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지만 후자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사회 서비스 지급 방식도 ‘시장주의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유시민과 김대호, 영미 사회투자국가론의 공통점이다.

 

 

 

 

ⓒ경기도 제공김문수 경기도지사

 

이를테면 국립 보육원을 짓고 그곳의 인력(보육교사 등)을 공무원으로 고용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보육원 이용권’을 지급하는 것이 ‘국가 주도 전달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김대호 등에 따르면 이 방식은 나태하고 경직된 국가 공무원을 양성할 뿐이며, 보육 수요자가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하지도 못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보육원 시설이나 이용권 등에 재정을 투자하는 한편 ‘보육 시장’을 조성해야 한다. 이는 규제 완화를 통해 보육 부문을 돈벌 수 있는 영리 공간으로 만들자는 이야기다. 그래야 자본이 유입되어 보육원끼리 경쟁이 벌어질 것이고 보육 서비스의 질도 고급화할 것이다. 일자리도 창출된다. 참여정부 시절 의료 등 사회 서비스 부문의 상업화·영리화가 여러 차례 제기된 것도 이런 아이디어에 기반했다.

박근혜 의원의 한국형 복지 역시, 12월20일 공청회에서 배포된 자료를 참조한다면 명확히 ‘사회투자국가’ 전략에 속한다. 공청회 자료 중 ‘한국형 복지국가의 비전과 전략’을 쓴 안상훈 교수(서울대)는 몇 년 전부터 사회투자국가형 복지 개혁을 주장해온 이 진영의 대표 이론가 중 한 명이다.

박근혜의 복지 국가는 ‘줄푸세’ 폐기

예컨대 공청회 자료에 나오는 ‘사후적 복지에서 선제적·예방적 복지로의 전환’은 실업을 당한 뒤 실업급여를 주는 사후적 방식보다, 교육 투자와 직업훈련을 강화해서 노동자들이 급변하는 노동시장에 잘 적응토록 하겠다는 사회투자국가론의 기본 아이디어다. ‘생애 주기별 맞춤 복지’도 마찬가지다. 서구의 복지지출 중 지나치게 많은 부분이 노령층의 연금에 몰려 있기 때문에 젊은 층의 반발이 심하고 조세 저항까지 일어나는데, 이런 부작용을 교정하고 전 시민이 고르게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보편화’하겠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유시민·김대호와 마찬가지로 안 교수는 현금 이전과 사회 서비스 중 후자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사회 서비스 공급 방식 역시 ‘민간이 직접 공급’하는 시스템을 선호한다. 특히 안 교수는 이전 논문에서 사회 서비스를 확장하고 적극적 기제(교육 투자, 직업훈련 등)를 많이 활용하면 ‘생산 활성화’ ‘실업 축소’ ‘복지국가의 지속가능성 강화’ 등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박근혜 복지 모델은 적어도 사상적으로는 ‘복지와 경제의 상충 관계’라는 보수의 고정관념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12월20일 공청회에서 박희태 국회의장은 박근혜를 ‘유력한 미래 권력’이라 부르면서 “사회 서비스로 복지의 절반을 채워, 복지가 돈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라고 칭송했다. 만약 박 의장이 사회 서비스로의 전환에 재정 투입이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이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앞서 봤듯이 사회 서비스에도 국가의 대규모 재정 투입이 명백히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의 한국형 복지국가는 사실상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는 박 전 대표의 대표 공약)의 폐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시사IN 조남진지난해 3월 열린 ‘복지국가 제안 대회’에 참석한 야당 정치인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공개적으로 증세를 표방하는 세력은 보편적 복지국가론을 주도하고 있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다. 민주당이 ‘보편적 복지’를 당론으로 채택했다고 하지만 당내 컨센서스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증세를 표방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영미 사회투자국가의 몰락(영국 노동당과 미국 민주당의 정치적 패배)을 보면서 ‘보편적 복지’를 복지 시스템의 필요 조건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장하준 교수(케임브리지 대학)는 “기회의 균등은 결과의 균등 없이 가능하지 않다”라고 했는데 이와 같은 맥락이다.

2011년 이후 복지 정치, 2개의 전선 형성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슬로건인 ‘역동적 복지국가론’은 보편적 복지라는 베이스에 사회투자전략의 ‘인적 자본 투자’를 결합시킨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역시 ‘현금 이전’보다 ‘사회 서비스’를 강조하는 등 사회투자국가론과 비슷한 측면을 보인다. 시장도 상당히 긍정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사회투자국가론과 마찬가지로 ‘사회 서비스 시장’의 효용을 인정한다. 다만 이 시장은 공공시설과 비영리 기업이 경쟁하는 공간으로 영리기업(주식회사)은 배제된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는 “주식회사의 진입을 허용하면 가격 높이기와 차별화 전략으로 서비스 양극화가 필연적이고, 이는 복지 체계 전반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2011년 이후 한국의 복지 정치는 두 가지 전선을 형성할 것이다. 하나는 ‘복지 대 반복지’, 다른 하나는 ‘보편적(역동적) 복지 대 사회투자국가’ 전선이다. 여기에 더해 사회투자국가 진영 내에서는 ‘민주화 전통’과 ‘보수 전통’이 치열하게 격돌할 것이고, 이는 기존의 보수-진보 간 경계선을 바꾸는 사태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민노당 울산시당 제공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이 울산시청 앞에서 ‘건강보험 하나로 무상의료 운동’ 선포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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