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안희정 전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

인터뷰는 ‘폐족(죄 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으로 시작해서 ‘폐족’으로 끝이 났다. 안희정 전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은 ‘폐족’이라는 절망적인 단어로 이번 대선 패배의 의미를 규정했고, 또한 ‘폐족’이 내포한 긍정의 에너지를 통해 민주개혁 세력의 정치적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풀어냈다.

인터뷰 내내 그는 ‘폐족’이라는 말에 갇혀 말을 많이 삼켰다. 그의 침묵은 ‘폐족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는 의미로 읽혔다. 특히 대통합민주신당 내부로 향하는 말을 깊이 삼켰다. 그는 확실한 대안이 섰을 때, 긍정적인 에너지를 응축해냈을 때 대안을 내보이겠다고 말했다.

당 안으로 향하는 말은 삼켰지만 이명박 당선자를 향해서는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지만’이라는 전제를 달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토해냈다. 그는 대통령직 인수위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이명박 신정부의 통치 구상에 대해 조목조목 꼬집었다. 그의 모습은 이미 ‘준비된 야당 정치인’의 그것이었다.

어떤 심정에서 ‘폐족’이라는 표현을 썼나?
대선 패배로 끝이 아니었다. 사분오열되고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면서, 풍비박산이 된 집안을 보는 것 같아서 이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민주화 정부 10년의 역사를 못 지켰다. 대통령 선거에 나간 후보 몫도 있겠지만 집권 세력이 함께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의미로 썼나?
다산이 스스로에 대해서 ‘폐족’이라고 표현한 것은 지극한 절망감에서였다. 그런데 나는 이 말에서 역설로 조정과 백성에 대한 그의 충심과 애정을 읽어냈다. 다산은 이대로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절절한 마음을 자식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억울하다’는 항변만으로는 미래를 맞을 수 없다.

‘폐족’ 표현이 화제가 된 이후에 반성의 주체를 ‘우리’에서 ‘나’로 고쳤다. 왜 그랬나?
‘우리’라는 단어 속에 나를 숨기거나 내가 함부로 다른 사람들을 대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우리’라고 표현할 대표성을 위임받은 적도 없고. 그냥 ‘친노’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안희정의 처지와 안희정의 생각을 말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

참여정부 수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지만, 역설적으로 참여정부 실정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처지 아닌가? 아무 자리도 차지한 적이 없지 않나.
지난 민주화 정부 10년 역사 동안 어떤 지위에 있었거나 어떤 공직에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김대중과 노무현을 찍자고 했던 사람으로서, 주인된 마음으로 책임을 통감한다. 민주개혁 혹은 진보개혁 세력의 한 구성원으로서 부채 의식을 통감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적 동업자라고 했는데, ‘자산’은 없이 ‘부채’만 승계한 것 아닌가?
감옥에 있을 때 정치인 선배들이 놀렸다. ‘아무것도 못 해먹고 들어온 놈 저기 있다. 우리는 한 자리 해먹고라도 들어왔는데 저놈은 참 불쌍한 놈이다’라고. 하지만 이득과 손실로 구분할 것은 없다고 본다. 민주화 10년이 그냥 내 인생의 역사일 뿐이다. 내가 손님이면 이해득실을 따지겠지만 주인이라고 생각했기에 따질 이유가 없다.

지난 대선을 어떤 심정으로 보았나? 선거전의 중심에 있었던 5년 전과는 전혀 다른 처지에서 보았을 텐데?
곤혹스러웠다. 열심히 뛸 수도 없고 놀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에서 지켜봤다. 나 같은 ‘친노’가 선거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안 되는 것인지 모르니까. 고작 한다는 일이 지역에 내려가 바닥을 기면서 우리 후보 찍어달라고 하는 정도였다.
 

ⓒ연합뉴스노무현 대통령(오른쪽)은 안희정씨(왼쪽)를 ‘정치적 동반자’라고 표현했다.

문국현 후보 쪽에서는 도와달라는 부탁이 없었나?
선거 과정 중에 여러 곳에서 역할을 요구받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속한 정당 후보를 돕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선거가 끝나니까 이명박 당선자의 참모 이야기를 하면서 비교를 위해서인지 ‘좌희정, 우광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어떤 기분인가?
이 조어는 참여정부를 아마추어 정권으로 공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계보 의원이 한 명도 없던 시절에는 우리 둘이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당의 후보가 된 이후로는 우리의 역할이 크지 않았다. 우리는 실무자에 불과했다. 당선된 뒤에도 비선 측근 혹은 실세라는 이름으로 의사결정 구조를 왜곡한 적이 없다. 나를 봐라. 책임만 졌지 무엇을 누렸나? 감옥 갔다 와서 집에서 애본 것이 전부다.

대선 기간에 이명박 후보 쪽 사람과 만난 친노 인사로 지목되었다. 만난 적이 있나?
이명박 당선자 측과 교감과 거래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두 번 나왔다. 2006년 말에 이 당선자의 반대 측에서 나왔고, 선거 막판에 BBK 특검과 관련해서도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쪽 사람 누구와도 만난 적이 없고 연락한 적도 없고 그쪽의 누구와도 인연이 없다.

왜 그런 소리가 나온다고 생각하는가?
검찰과 권력이 불신을 받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세상이 상식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생각해야 속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지났다.

이명박 당선자의 인수위를 지켜보면서 어떤 기분이 드는가?
공무원들을 너무 죄인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새 정부의 기조에 맞춰 잘 적응하면 될 일이다. 참여정부와 호흡을 맞췄다고 해서 그들이 죄인은 아니다.

참여정부에서 중용했던 인물, 이를테면 진대제 전 장관과 같은 사람도 이명박 정부에 협력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정치 영역에서는 권력투쟁을 담당하는 그룹이 있다. 이들에게는 소신과 신념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만으로는 안 된다. 관료사회와 테크노크라트가 결합해야 한다. 그냥 자기 일 열심히 할 사람도 함께 필요하다. 그들의 주인은 국민이다. 우리 같은 정치인은 경영권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일 뿐이다. 정치를 안 할 사람은 계속 일을 해야 한다. 그는 테크노크라트로 자리매김한 것이라고 본다. 정치인이라면 그렇게 처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써야 할 사람이 선택되는 것을 변절이라고 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어떻게 보나?
우리가 못 푼 숙제를 잘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다만 우리 사회는 이미 잘 짜인 틀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국민들은 ‘천지개벽’을 원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는 이제 데생의 단계를 지났다. 미세한 터치밖에 못한다.

지켜보면서 우려되는 점도 있는가?
사교육비가 고민이라며 유권자들이 뽑은 후보가 자립형 사립고 300개 설립과 본고사 부활을 말한다. 모순이다. 유류세 인하 문제도 그렇다. 농업과 생산용 기름은 이미 감세 혜택을 받고 있다. 기름값을 내리면 기름 사용량이 늘어난다. 포퓰리즘적인 조처일 뿐이다. 화석연료는 덜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세계 추세다.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범하기 전에 철저히 견제하겠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벌써 ‘야당 정치인’ 준비가 잘된 것 같다.
공격수를 해봐야 수비를 잘할 수 있고 수비수를 해봐야 공격을 잘할 수 있다. 집권 경험을 살려 정쟁이 아닌 국가 비전을 놓고 정책으로 다투는 야당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한나라당처럼 총리 인준도 안 해주고 반대만 하는 야당은 안 한다. 다시 대한민국이 1997년 외환위기 악몽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추 구실을 잘 하겠다.

참여정부 5년을 어떻게 평가하나.
나는 참여정부 5년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있다. 참여정부는 특권과 반칙의 시대를 끝냈다. 그 숙제를 끝냈더니 새로운 요구가 제시되었다. 모든 사람이 골고루 잘 먹고 잘사는 시대를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이 시대적 요구에 답하지 못해 우리 세력, 진보개혁 세력이 선택받지 못했다.

국민의 평가는 야박한 것 같다.
참여정부 5년에 대해서 감정이 엇갈리는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노무현이 해먹은 것도, 특별히 행패를 부린 것도 없다. 어려운 것도 제법 해냈다. 하지만 왠지 싫다’ 이런 식인 것 같다. 한 언론에서 시민이 “사실 따지고 보면 10년 동안 살림살이가 나빠진 것이 아니라 쓸 곳이 늘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정답 아닐까. 참여정부 때문에 세 끼 먹다 두 끼 먹게 된 것이 아니다. 경제를 망쳤다지만 참여정부 5년 동안 평균 성장률 5%를 기록했다. 성장률 5%는 실패한 정부고 성장률 7%는 성공한 정부일까?

당의 후보로 나섰던 정동영 후보나 친노를 대표했던 이해찬 후보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현재와 미래의 시대적 과제를 바탕으로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노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친노 세력’이라는 세력이 존재할까?
친노의 구분 기준이 무엇인가? 노 대통령에게 신세 입은 사람인가? 그러면 대통합민주신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노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그것이 정치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나. 아니면 참여정부 정책기조를 유지하는 사람인가?

당에서 ‘친노 세력에게 공천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국민은 그런 논쟁을 지켜보면서 한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무조건 껴안고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네 탓이야’라고 공을 넘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야당과 일부 언론의 정치적 공격 용어로 내부 싸움을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퇴임한 대통령은 조용히 현대 헌정사의 기록으로 남으면 된다. 참여정부와 민주화 세력의 오류를 놓고 극복하자면 동의하겠지만 그와 관계를 가지고 너와 나를 가르는 기준으로 삼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친노가 문제라면 정동영부터 안희정까지 다 접어야 한다.

논산·금산·계룡 선거구에서 출마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 지역 여론은 어떤가?
고향 출신 젊은이가 객지에 나가서 고생을 많이 하고 왔다는 우호적이고 동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당이 어려운 조건이지만 해볼 만한 승부라고 본다.

상대 후보(이인제 의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선거에서는 지명도와 인지도가 힘이다. 무시하지 못할 강자다. 그러나 실력으로 승부하면 승산이 있다고 본다.

당내에서 대표 선출 방식을 놓고 추대론과 경선론이 맞서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 민주개혁 세력의 기치를 올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싸움은 이제 시효가 끝났다. 새로움이 필요하다. 내게 자격이 있는지 고민이지만 시대는 새로운 도전 세력을 요구한다고 본다. 이제 종래의 여와 야, 민주 대 반민주 리더십만으로는 안 된다. 현재 논의되는 쇄신안도 기존 리더십에 의존한 타협안일 뿐이다. 기존 야당 개념만으로는 지지층 복원이 절대 안 될 것이다.

무엇이 새로움인가?
40여 년 전에 양 김씨가 올린 40대 기수론은 헌정 사상 진정한 야당의 출발점이었다. 40대 기수론은 토착 지주 세력과 민주 세력 등이 혼재되어 10년 이상 헤매던 야당을 일거에 정돈해주었다. 지금은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

추대론과 경선론 중 무엇이 맞는지 아직 답을 하지 않았다.
내가 폐족이라는 말을 쓴 것은 민주개혁 세력이 뿌리째 흔들렸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바닥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상황 인식이 담겨 있다. 경선론과 추대론에서는 그런 절박한 상황 인식이 안 느껴진다. 어렵다.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대목이 있지만 아직 이르다.

마지막으로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
정대철 고문의 모습이나 쇄신안의 내용이나, 그냥 이렇게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지 고민이다. 툭툭 문제를 던지는 모습보다 대안을 가지고 문제 제기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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