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1일. 북한은 노동신문·조선인민군·청년전위 등 3개 신문 공동사설 형태로 신년사를 발표했다. 올해 신년사에 담긴 메시지는 관계 개선을 희망하는 신호로 해석되었다. “(2010년은) 6·15 북남공동선언 발표 10돌이 되는 해이다. 남조선 당국은 북남공동선언을 존중하고 북남 대화와 관계 개선의 길로 나와야 한다.”

예년보다 누그러진 신년사를 접한 이명박 정부도 화답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연내 정상회담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년사 발표 3개월 만에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남북 관계는 파탄으로 치달았다. 급기야 11월23일 연평도 포격으로 남북 긴장 지수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제는 남북 군사 당국자 사이에 ‘전면전’이라는 금기어도 서슴없이 언급된다.
 

ⓒAP Photo조선중앙통신은 9월28일 새벽, 김정은에게 대장 칭호를 부여하며 그의 등장을 알렸다. 이후 초고속으로 권력 승계에 나선 김정은(왼쪽)이 10월10일 당 창건 65주년 열병식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나란히 사열하고 있다.

2010년 남북관계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 와중에 북한의 후계자까지 깜짝 등장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김정은’ ‘김정운’ 등으로 이름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던 김정은이었다. 사진도 희귀했다. 인터넷에 떠돌던 엉뚱한 사진이 ‘은둔의 후계자’로 둔갑했다. 심지어 그가 깜짝 등장할 때까지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낮다는 주장이 그치지를 않았다.

설왕설래에 종지부를 찍은 건 기습적인 발표였다. 9월28일 새벽 1시9분. 조선중앙통신은 44년 만에 열린 당대표자 회의를 앞두고 김정은에게 대장 칭호를 부여했다. 워싱턴 정오 시간에 맞춘 발표는 긴급 속보로 외신을 탔다. 김정은의 3대 세습이 공식화하는 순간이었다. 국내 안팎에서는 김일성 주석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강성대국 원년으로 선포한 2012년에나 후계 구도가 명확해질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김정은의 형 김정철이 유력 후계자라는 주장도 막판까지 적지 않았다.

김정은 후계설을 국내 정보기관이 공식화한 것은 지난해 6월이다. 국가정보원이 국회 정보위원들에게 “김정은 후계 내정을 북한이 해외 공관에 통보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국정원은 그의 이름이 김정은인지 김정운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언론도 지난해 10월7일 통일부가 이를 바로잡을 때까지 김정운이라고 보도했다.

김정은, 깜짝 등장 이후 ‘광폭 승계’

‘은둔의 후계자’ 김정은과 관련된 첩보가 처음 포착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요리사로 알려진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를 통해서이다. 일본어 발음에 한국어 ‘으’ ‘우’ 같은 발음 차이가 없는 관계로 후지모토가 그의 이름을 ‘김정운’이라 생각했고, 이것이 통용된 것이다. 은둔과 정보력의 부재가 빚은 해프닝이었다.

김정은은 깜짝 등장과 함께 예상을 깬 광폭 수순을 밟았다. ‘군 대장’ 칭호 부여(9월28일)→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선출(9월28일)→노동신문 사진 공개(9월29일)까지 파격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CNN 등 외신기자를 평양에 불러들여 치른 10월10일 당 창건 65주년 기념 열병식 때는 주석단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나란히 사열을 했다. 김정일·김정은 부자가 나란히 전 세계에 생중계되면서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다. 파격은 계속되었다. 한 달 뒤인 11월7일 조명록 노동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이어 김정은을 두 번째로 호명했다.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이 북한 내 권력 서열 순위를 반영한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김정은의 서열이 명실상부하게 ‘넘버 2’로 굳어졌음을 보여준 것이다. 빠른 승계는 김정은이 오래전부터 후계 수업을 받아왔음을 방증한다.

그는 1983년생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영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정철은 그의 친형이다. 10월9일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3대 세습에 반대한다”라는 폭탄 발언을 한 김정남은 김 국방위원장과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난 배다른 형이다.

김정은은 1996~2001년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2006년까지 김일성 군사종합대학 보병지휘관 3년제와 연구년 2년제를 수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후계자 수업을 마치고 후계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뇌졸중 발병 이후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한 대북 전문가는 “2008년 여름 김정일 위원장이 쓰러진 이후 장성택과 함께 김정은이 친필 제의서를 결재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사상 유례가 없는 국가 지도자 3대 세습 공식화로 북한은 봉건국가나 가족국가라는 비판에 시달린다. 스물일곱 살 ‘젊은 수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이라는 혈통 외에는 내세울 점이 거의 없다. 이로 인한 정당성 시비를 극복하기 위해 북한은 ‘후계자용 업적 만들기’에 돌입했다. 일단은 경제 실적용으로 2009년 7월1일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화폐개혁은 ‘샛별대장(김정은)’의 정책이라는 소문이 돌며 야심차게 시작되었지만, 인플레이션과 환율 급등으로 실패했다. 최근 북한에서 부쩍 등장하는 구호인 ‘CNC’가 그나마 김정은이 내세울 만한 업적이다. CNC는 컴퓨터수치제어 기술인데 지난해 8월부터 전 산업시설의 CNC화를 선전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하는 장거리 로켓도 CNC 구호로 포장되었다. CNC는 김정은이 강조한다는 첨단 기술을 상징하면서 자연스럽게 ‘CNC=김정은’으로 선전되고 있다.

11월 연평도 포격 역시 북·미 관계를 염두에 둔 전통적인 ‘벼랑 끝 전술’이자, 김정은 치적을 위한 대내용이라는 분석이 많다. 북한군 무력을 총괄하는 이영호 총참모장이 바로 김정은의 최측근이다. 당분간 김정은은 당과 군대를 담당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핵과 외교 등 외치를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승계 시기, 예상 뛰어넘어

북한에서 김정은 등장과 함께 남한의 경제 권력을 좌우할 황태자도 2010년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바로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다. 12월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은 COO(최고운영책임자)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 사장은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뒤 6년간 일본 게이오 대학과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2001년 3월 삼성전자 상무보로 부임한 뒤 2년이 채 되지 않아 2003년 1월 상무로 승진했다. 4년 만에 전무(CCO·최고고객책임자)가 되었다 지난해에는 부사장에 올랐다. 전무로 승진한 지 3년 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사장에 오른 지 1년 만에 사장이 된 것이다. 이로써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3대 경영이 본격화했다.
 

ⓒ삼성그룹 제공이건희 삼성 회장은 ‘젊은 인재론’을 꺼내 이재용 (왼쪽에서 두 번째)·이부진(맨 왼쪽)·이서현(맨 오른쪽) 남매를 모두 승진시켰다.

그의 승진 역시 깜짝 발표나 다름없었다. 승진 자체는 어느 정도 예상되었지만 그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었다. 지난해 12월31일 이건희 회장이 전무후무한 ‘원 포인트’ 단독 특별사면을 받으면서 이 회장의 경영 복귀와 함께 이재용 시대 개막이 늦춰질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지난 1월 삼성 특검 뒤 첫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이 회장은 자녀들의 경영 능력을 묻자 “아직 배워야 한다. 아직 어린애다”라고 말했다. ‘어린애 발언’에 이어 지난 3월 이건희 회장의 경영 복귀가 공식화되면서 이재용 시대 도래는 아직 먼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지난 10월 반전 카드를 꺼내들었다. 10월12일 세계국가올림픽총연합회 총회 참석을 위해 출국하며 기자들과 만난 이 회장은 “어느 시대이건 조직은 젊어져야 한다. 젊게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젊은 인재론=이재용 사장 승진’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12월3일 이재용 부사장은 사장으로 전격 승진했다. 이건희 회장은 앞서 11월19일 이병철 회장의 23주기 기일에 맞춰 ‘2인자’ 이학수 고문을 퇴진시키면서 이재용 시대로 전환하는 길닦이를 했다. 이재용 사장과 껄끄러운 관계로 알려진 이학수 고문은 최근까지도 이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영원한 실장’으로 불렸다. 그래서 이날 인사를 두고 이 회장의 친위 쿠데타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이 회장은 이학수 대신 김순택 삼성전자 부회장을 삼성그룹 컨트롤타워 ‘미래전략실’ 수장에 앉혔다. 김 부회장이 ‘이재용 시대’를 여는 징검다리 구실을 할 것이라고 재계는 받아들였다.

‘이재용의 삼성’ 넘어야 할 산 첩첩

‘이재용의 삼성’이 넘어야 할 산은 만만치 않다. 그 역시 김정은처럼 ‘혈통’ 외에는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경영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에게는 오히려 ‘e삼성 실패’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붙는다. 이건희 회장은 이재용 사장 인사를 앞두고 “(이재용) 활동 폭이 넓어질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가 부사장직을 건너뛰고 바로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이재용 시대’에 물음표가 붙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이부진 사장이 삼성의 지주회사 격인 에버랜드 경영전략담당 사장을 겸임하게 된 것을 두고, 차기 경영권 승계 구도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이재용 사장 외에도 2010년은 3세 경영인들이 전면에 나선 해이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올해 K시리즈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이재용 사장과 달리 경영권 승계가 정리되지 않았다. 현대차는 지주회사 격인 현대 모비스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는 순환출자 구조인데 정 부회장은 현대모비스 주식을 한 주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마트 피자’로 트위터 논쟁을 벌인 3세 경영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올 한 해 회사 매출을 14.7% 성장시켰다(10월 말 기준). 그러나 경쟁사 성장세도 비슷해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는 평가이다.

남과 북에서 각각 3세 통치 혹은 경영에 나선 이들이 과연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이들의 성공적인 연착륙 여부가 아마 2011년 남과 북을 관통할 뉴스가 될 것 같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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