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가 쌓이면 영어로 된 그리스어 문법책을 읽는 남자. 최영우 (주)도움과나눔 대표가 자신이 읽고 있는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파워포인트 화면에 띄우자 청중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비영리 모금 컨설팅 회사를 시작했다. 그 전에는 저소득 가정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한국해비타트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그는 꿈이 자주 바뀌었다고 말했다. 교육학자를 꿈꾸었다가 공인회계사 준비를 했고, 한때는 선교사가 되려 했다. 그럼에도 일관된 것이 있었다. 지식에 대한 열린 태도였다. 그는 지식 기반 사회에서는 인문학적 소양과 열린 학습 태도가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12월16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열린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나는 나 자신을 나그네라고 생각한다. 나그네인데 그 어떤 정착민보다 편안하게 산다. 지금 나는 비영리 모금 컨설팅 회사의 CEO이다. 직원은 80여 명이고, 내년에는 100명이 넘을 것 같다. 대학·문화예술단체·병원 등이 우리의 고객이다. 10년가량 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내가 제일 먼저 시작했다.

나는 목공을 좋아한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나무로 무언가를 만든다. 친구들은 전업에 성공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회사가 안 좋아져도 먹고살겠다고(웃음). 또 고전어를 공부하는 게 취미다. 헬라어(그리스어) 신약성서를 거의 다 읽어 헬라어가 많이 편안해졌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서를 올해 4월부터 500쪽가량 읽었다. 영어로 된 고전언어 문법책을 50권가량 읽었다. 머리가 아프면 그리스어 문법책을 읽는다. 요즘은 현상학에도 관심이 많다. 내가 하는 일이 비영리단체 모금 컨설팅인데, 비영리단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시사IN 조남진최영우 (주)도움과나눔 대표는 “아이에게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생존력을 심어주라”라고 말한다.

인문학적 저력이 경쟁력 좌우

인문학적 저력이 비즈니스의 경쟁력을 결정한다. 영국의 로이드 보험회사는 직원 채용 시 주로 철학과 사학을 전공한 사람을 많이 뽑는다고 한다. 보험과 관련한 중요한 의사결정이 윤리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어서 인문학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대학에서 인문학을 잘 가르치지 않는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당장 직업에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겠다고 그런 교육만 하는 것은 아편을 맞히는 것과 같다.

나는 꿈이 자주 바뀌었다.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을 강하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불안해진다. 예를 들어 ‘나는 변호사를 하기 위해 태어났고, 이 직업이 천직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 어떤 특정한 직업을 상정해놓고 매진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막상 그 직업을 얻게 되고 난 뒤 실망하거나 고민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너무 어릴 때부터 장래 희망을 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아이들의 장래 희망을 적고 거기에 학부모 의견을 적으라는 가정 통신문이 왔다. 거기에 ‘지금은 장래 희망을 결정할 수 없는 순간’이라고 적어 보냈다. 그런데 그런 게 특목고 갈 때는 마이너스라고 하더라(웃음).

고등학교 2학년 때 페스탈로치의 〈은자의 황혼〉을 읽고서 교육 행정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다. “교육행정가는 홍수가 나서 학교를 못 가는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개울에 다리를 놓아주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이 좋았다. 관련 자료를 많이 찾아 읽었고,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했다. 서울대 교육학과에 보내달라고. 꼭 거기에 가야 학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입 시험 점수가 조금 모자랐다. 그때 〈달과 6펜스〉를 읽었는데, 돈이 육감과 같다는 말이 나왔다. 돈이 없으면 다섯 가지 감각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다. 꿈이 심각하게 흔들렸다. 가족과 상의하고 고려대 무역학과에 지원했다.

 학점은 좋았다. 1학년부터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했다. 그런데 2학년 때 ‘이게 내 길인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이 길을 가면 평탄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나는 머릿속이 복잡할까. 고민했다. 계속 교육학에 대한 미련이 생겼다. 경영학을 하면서 교육학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교육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고시에는 떨어졌다. 매일 교육철학만 공부했으니 떨어질밖에.

3, 4학년이 되니 교육학에 대한 갈증이 사라졌다. 길이 너무 한정적인 것 같았다. 이번에는 선교사가 되고 싶었다. 영어와 말레이시아어, 인도네시아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졸업할 때가 되니 선교사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선교사를 신데렐라로 생각했다. 동남아 가서 선교사를 하면 신분이 바뀌고, 변두리 출신이라는 내 구질구질한 배경을 떨어낼 수 있다고. 꿈을 향해 열정적으로 달려갔지만 그런 마음이 드니까 꿈에 대해 안면을 확 바꾸게 되더라.

ⓒ뉴시스최영우 대표는 ‘때때로 삶을 단순하게 볼 수 있는 감각을 키워주기 위해’ 캠핑을 시키라고 말한다.
나는 왜 이렇게 뺑뺑이 돌듯이 살았을까. 꿈은 나에게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꿈은 강력한 학습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게 만들었다. 꿈이 계속 바뀌었지만, 교육학에 투자한 시간은 나에게 밑거름이 되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에 들어갔다. 산업연구원에서 2년 정도 근무했는데,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일이 재미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통일논단〉이라는 신문을 만들고 기독교 활동을 했다. 그때 사랑의집짓기운동을 하는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니 통역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통역을 하다보니 해비타트가 재미있어 보였다. 한국해비타트의 1호 스태프로 일하게 되었다. 사업 계획을 짜고, 땅을 확보하고, 모금하고, 관청을 상대하는 일 등을 모두 해내야 했다. 그때부터 친구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월급 50만원을 받고도 일이 재미있어 행복했다.

해비타트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 나는 이희호 여사로 하여금 행사에서 최초로 바지를 입게 만든 사람이다. 그분은 치마만 입는다. 현장에 오신다고 연락이 왔고, 치마를 입고 가도 되느냐고 묻기에 ‘건축 현장이라 바지를 입고 와야 한다’고 딱 잘라 말했다. 이희호 여사가 바지를 입었다는 기사가 났다. 그분은 진심으로 해비타트를 아끼는 분이었다.

내 안의 ‘펀드 레이저’ 감각 찾기

이런 일도 있었다. 주택은행이 해비타트에 기부를 많이 했다. 김정태 당시 주택은행장은 수줍음이 많은 분이었다. 다른 메인 스폰서들은 기부 사실을 알리고 메인 스폰서들이 함께 모여 기자회견을 하기 원했다. 그런데 김정태 행장은 그 자리에 나오기를 꺼렸다. 김정태 행장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불편한 자리이겠지만 행장이 그 자리에 나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집을 지어줄 수 있다고 썼다. 팩스로 보내고 담당 간부에게 꼭 행장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그때가 30대 초반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주택은행에서 땅값으로 얼마를 주면 해비타트에서 짓는 마을은 주택은행이 상기될 이름을 붙이겠다고 약속해버렸다. 그것은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었다. 해비타트 사무국장이 마을 이름을 지을 수는 없었다. 약속은 해버렸고, 주택은행은 ‘은행마을’이나 ‘주은마을’은 어떠냐면서 계속 관심을 보였다. 어찌 보면 위기 상황이었다. 그때 아이디어를 냈다. 주택은행장배 마을이름 짓기 콘테스트를 하자고 했다. 상금은 주택은행에서 내고. 주택은행이 기부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자연스럽게 마을 이름을 정할 수 있었다. 내 안에 펀드 레이저(기금모금가)의 감각이 있다는 것을 이때 발견했다.

어느 날 해비타트를 떠나기로 했다. 조직이 커지고 안정되었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때부터 지금 회사 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설립한 회사는 아니고, 이미 설립된 회사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벤처 투자가 붐을 이루던 시기였다. 5년 동안 매우 힘들었다. 아무도 해보지 않은 비즈니스 모델이었으니까. 직원들 월급을 3개월 동안 못 준 적도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닷컴거품이 빠지면서 독립해야 할 상황이 왔다.

“지금 매력적인 직업이 5년 뒤에도 그럴까?”

회사를 접어야 하나 고심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가출 청소년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한 공동체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거기에 있는 중학생들과 모금 전략 워크숍을 했다. 아이들과 워크숍을 하면서 ‘이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회사를 접으려고 했는데, 너희들과 워크숍을 하면서 회사를 계속 경영하기로 했다고. 회사는 안정되어갔다. 5년째 흑자다. 유명한 클라이언트를 컨설팅했고 평판도 좋다. 내년에는 매출 40억원을 이룰 듯하다.

일반적인 진로 얘기를 해보자. 부모와 선생님, 아이들은 지금처럼 변화가 심한 유동적 사회에서의 경쟁력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식 기반 사회, 창의 기반 사회로 바뀌면서 비즈니스 모델의 주기가 빨라지고 판도 자체가 흔들려버린다. 아이폰이 탄생하면서 휴대전화 시장의 판도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나. 직업도 마찬가지다. 지금 매력적이라고 여겨지는 직업이 과연 5년 뒤에도 그럴까 되물어봐야 한다. 유동적 사회에서는 눈앞의 인기는 단명할 가능성이 높다. 직업의 수명이 짧아지고, 기술과 정보의 가치가 자주 변한다. 그러면 뭐가 필요할까. 끊임없이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지식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지 않게 되면 그 순간부터 처지게 된다.

직업으로서의 소명은 때로 위험한 발상이다. 우리는 굉장히 많은 직업을 가질 가능성이 높은 사회를 살고 있다. 아이에게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생존력을 심어주지 않으면 환경이 변했을 때 적응하기 어렵다. 한 미국 여성은 아이들의 캠핑에만 써달라고 지정 기부를 한다. 캠핑은 생존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한다. 물과 음식, 그리고 추위를 피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 말고 다른 것은 부수적일 뿐이다.

그러면 왜 아이들에게 캠핑을 시키는가. 때때로 삶을 단순하게 볼 수 있는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의사결정을 할 때 굉장히 단순해져야 한다. 그때 정확한 판단을 할 능력을 키워야 한다. 내가 해비타트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 운동이 무한하게 커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금 컨설팅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은 것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확장될 모델로 보았기 때문이다. 내 삶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고, 철학적·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직업이다.

한 가지 패로 인생을 사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내 꿈은 무엇이라고 성급하게 정할 필요가 없다. 단지 있어야 할 것이라면 지식을 대하는 열린 태도, 세상에 대한 책임감과 애정이다. 이것이 가장 큰 경쟁력일 것이다. 내가 고전어와 철학 공부를 하는 게 내 회사의 경쟁력이다. 회사의 CEO가 1년에 한두 가지 의사결정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그 회사는 먹고살 수 있다. CEO는 기술적 판단이 아니라 근본적 판단을 해야 한다. 문명의 미래가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게 지식에 대한 애정이다. 애정이 없으면 지식은 쌓일 수 없다.

나의 꿈은 계속 바뀌었지만 매 순간 치열하게 살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가장 치열하게 살고 있다. 미래에 어떤 길모퉁이를 지나갈지 지금은 가늠하지 못하겠다. 지금 내면의 신호는 현재 하는 일을 계속 하라는 것이다. 나그네는 행낭이 가벼워야 한다. 사회의 변화와 요청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하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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