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도 목소리도 부드럽고 자주 웃었지만, 평화운동가 혹은 공정여행가로 불리는 임영신씨는 강한 사람이었다. 돈이 아니라 마음이 일한다는 생각으로 바닥을 헤쳐온 사람답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시민운동가로서는 최열이나 박원순, 여행가로서는 한비야가 걸었던 길과는 또 다른 길을 걷는 인물이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하는 세계를 학교로 삼고 싶은 젊은이에게 유익한 강의였다. 그녀가 순박한 이라크인과 교감하며 중동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정신없이 들으며 청중 상당수가 눈시울을 붉혔다. 12월9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연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지난번 강사이신 박원순 변호사님이 제 마지막 직장의 보스였습니다. 화면으로 보는데도 행복하진 않네요(웃음). 박원순 변호사님은 데이터에 민감해요. 아름다운재단 실무자들은 한국에 장애인이 500만명 있는데 그중에 12.8%는 사회복지 혜택을 받고 있고, 12.9%는 혜택을 못 받고 있다는 식으로 데이터 숙지 훈련을 많이 해야 합니다. 박 변호사님이 어느 날 불쑥 찾아오셔서 아름다운 가게 프로젝트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파일을 열어 그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야 해요. 변호사 출신이어서 문서로 말해야 하고 약점을 잡히면 안 돼요. 이거 후환이 두려운데(웃음). 그래도 쇠가 쇠를 날카롭게 한다고, 아름다운재단에서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시사IN 윤무영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집안이 어두웠고, 책을 읽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좋아한 것이 없었어요. 학급 문고를 다 읽고, 도서관 책을 또 다 읽었어요. 수학 시간에도 사회 시간에도 책을 읽었어요. 학교에서 3개월 동안 말을 한마디도 안 한 적이 있어요. 문제아는 아니었는데도 늘 지각했어요. 어머니가 일을 하셨기 때문에 누가 깨워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게다가 저는 매일 길을 잃었어요. 명색이 여행가라는 지금도 하루에 한 번씩은 지하철을 잘못 타요.

저는 꿈이 없었어요. 자존감도 낮았고 정체성도 흔들렸어요. 그런데 열일곱 살 때 교회에 가서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만났어요. 처음 사랑과 행복과 기쁨이 뭔지, 관계 속에서 경험한 곳이 교회였어요. 대학에서 한국 근현대사도, 교회사도 알게 되고 제가 보아온 세계와는 다른 세상, 다른 진실, 부정의한 세상에 대해 알게 되면서 제 속에 어떤 분노와 열망이 생겨났어요. 4학년 때 책을 한 권 읽었어요. 지금은 너무나 다른 길로 가셨지만 김진홍 목사님의 책이었어요. 제가 건져 올린 키워드가 ‘바닥 정신’이었어요. 마침 한국에서 시민운동이 한창 시작되었고, 우연히도 〈기독신문〉에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 간사 모집 공고를 보게 된 겁니다.

2000년 둘째 아이 낳고 첫 이라크 여행

기윤실에서 3년을 훈련하고 녹색연합으로 옮겨 일반 시민운동을 시작했어요. 총선연대를 거쳐서 참여연대에 있다가 아름다운재단 만드는 일에 참여한 거죠. 기윤실 3년, 녹색연합 3년, 총선연대·아름다운재단 3년까지 포함해 9년을 시민운동 현장에 있었어요. 늘 밤 12시를 넘겨 일했는데, 그때 처음 알았어요. 제가 얼마나 일을 좋아하고 성취를 즐기는지. 일주일이면 꼬박 3일 동안 밤을 새웠어요.

ⓒ임영신제공2007년 네팔 포카라에서 모내기를 마치고 그곳 전통대로 얼굴에 진흙을 묻혔다(위 오른쪽).
아름다운재단 초기 인맥을 형성해가던 중 기차를 타고 출장 갔다 오다가 ‘프랭클린 플래너’를 놓고 내렸어요. 그 당시 박원순 변호사님이 세븐 해빗(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 심취하셔서 참여연대 및 아름다운재단의 전 간사가 그 수첩(시간관리 수첩)을 써야 했어요. 유실물센터로 찾으러 갔더니 역무원 두 분이 제 수첩을 펴놓고 어디다 전화를 하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이거 제 수첩인데 어디다 전화를 하시느냐고 물으니까, 서울대에 전화 걸고 있었다는 겁니다. 수첩에 기자·변호사·연예인 등의 전화번호가 빼곡해 이런 수첩을 가진 사람은 서울대 관계자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그때 새삼스럽게 제 수첩을 들여다본 겁니다.

여러분, 프랭클린 플래너의 캐치프레이즈가 뭔지 아세요?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제 수첩을 보니 강남의 CEO·기자·연예인 이름은 있는데 제가 열일곱 살 때,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 나를 사랑해주고 인정해주고 격려해준 그 사람들의 이름은 없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때 친한 후배에게 물었어요. 내가 일하는 동력이 뭐라고 생각해? 이 친구가 “관성이지” 하는 거예요. 그 말이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졌죠. 너는 시민운동을 한다면서 무엇을 위해서 왜 해야 하는 거냐? 그리고 제가 아이가 둘이 있었는데 아름다운재단과 참여연대의 호흡은 너무 가빠서 아이와 함께하기 힘들었어요. 제게 맞는 보폭과 삶의 속도가 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 사표를 내고, 2000년에 등록만 하고 거의 못 다닌 대학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기윤실에 있을 때의 소중한 경험 중 하나가 정신대 할머니들을 만난 거였어요. 그런데 시민단체가 분화되고 전문화되는 속에서 아름다운재단에서 일하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를 넘나드는 삶을 살기 힘든 거예요. 내 마음과 몸이 움직이는 대로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영신제공이매진피스는 2006년 이라크 바그다드(위)에 이어 파키스탄·아체·민다나오 등에서도 평화도서관을 지었다.
2000년에 첫 여행을 갔어요. 제가 지금 여행가라고 불리지만 서른 살에 둘째를 낳은 다음이었고, 결혼하고 처음이었으니 굉장히 늦은 거였죠. 2000년 도쿄에서 열린 국제전범재판에 참여했어요. 전 세계에서 양심 있는 학자나 기자들이 몰려와서 커다란 구단회관에서 3일간 이 할머니들의 증언을 경청하고 일본의 전쟁범죄, 성범죄를 단죄하는 국제 민중재판을 연 거예요. 무대 위에는 한국 할머니뿐만 아니라 캄보디아·필리핀·타이완·중국에서 오신 할머니들도 계셨어요. 그들도 한국의 할머니들과 똑같은 증언을 하면서 그 기억의 통증 때문에 혼절해 실려 나가기도 하셨죠. 그때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저는 아시아에 대해 아는 게 없었어요. 제가 배운 것은 모두 서양 것이었죠. 망치로 얻어맞은 듯 깨달았어요. 대학원에서 박사를 마쳐도 서양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짙어질 무렵 이라크로 두 번째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분은 (화면을 가리키며) 이라크에 여행 가서 만난 제 생애 첫 가이드 스와드 아줌마예요. 저는 가이드라는 의미를 이분을 통해 배웠어요. 제가 이라크에 갈 때는 일촉즉발이었어요. 이분과 같이 다니면서 기자들이, 그리고 제가 가장 많이 물은 질문이 뭐였을까요. “전쟁이 오고 있는데 두렵지 않나요?”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통역을 하다 우리에게 묻더라고요. 너희는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왜 답에 귀 기울이지 않느냐고. 그녀는 CNN이나 BBC에서 출력한 그 데이터를 내려놓고, 지금 여기 우리가 말하는 진실에 귀 기울이라고 호통을 치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라크 사람들이 전쟁 앞에서도 담담해 보이는 것은 고통에 둔감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인 거라고 하더군요. 이라크에는 정말 도처에 도와야 할 사람이 널렸는데, 우린 거지나 장애아들을 만나면 돈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정말 얼마 벌지 못하는 스와드 아줌마는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돈을 쥐여주시더라고요. 이분을 통해 이라크 사람들과 중동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친해지고 나니, 어느 날 밤 저에게 물어요. “너는 여기 왜 왔니?” 한국에서도 기자회견 때 ‘간지 나게’ 답변을 해왔는데, 이분이 물으니까 대답을 못하겠더라고요. 이라크 전쟁을 막고 싶어서요,라고 간신히 대답했더니 아줌마가 막 웃어요. 네가 온다고 막아질 것 같으면 몇 천만 되는 이라크 사람이 이러고 있겠느냐고. 그러더니 너는 결혼은 했니, 아이는 있니, 묻는 거예요. 아이가 있다니까 등짝을 후려치면서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당장 짐 싸서 돌아가라고 하더라고요. 전쟁이 임박했을 때 제가 이라크에 남아서, 죽이는 자의 눈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의 눈으로 기록해 평화의 증인이 되고 싶다고 하자 저를 쳐다보면서 그러셨어요. “너는 이라크 사람의 눈으로 이 전쟁을 기록할 수 있다고 믿니?” 내가 대답을 못하자 나무라지는 않고 “내가 너의 눈으로 이 전쟁을 기록해주겠다”라고 하셨어요. 너의 아들이 바로 너의 평화니까 돌아가라며 제 비자 연장 서류를 찢어버렸어요.

ⓒ임영신 제공공정여행 참가자들이 온몸으로 피스 마크를 만든 모습이다.
분쟁 지역에 평화의 도서관을 짓는 이유

이라크에서 돌아온 뒤 저는 분쟁 지역에 평화의 도서관을 짓는 일을 시작했어요. 당연히 첫 도서관은 바그다드에 세웠는데, 우리 외교부가 이라크 입국을 막아 모든 일을 스와드 아줌마가 할 수밖에 없었죠. 제가 왜 도서관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느냐면 저에게는 도서관이 피난처였기 때문이에요. 제게 학급 문고가 없었다면, 학교 도서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 같아요.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라크 지역의 수많은 아이가 전쟁이 끝난 지금도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답니다. 93%가 그렇다고 해요. 팔레스타인 같은 분쟁 지역 아이들은 50% 이상이 자라는 동안 자기 앞에서 아버지나 형제나 삼촌이나 친구가 죽는 것을 목격해요. 저는 그 아이들에게 잠시라도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03년에 평화도서관 건립 계획을 스와드 아줌마와 짰고, 첫 평화도서관을 2006년에 만든 뒤 해마다 짓고 있어요.

제가 이라크에 갈 때 300만원이 필요했어요. 저한테는 그 돈조차 없었어요. 저는 아는 이들에게 편지를 썼어요. 전 세계에서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라크에 날아가서 이라크 사람들과 함께 “여기 사람이 살고 있어요”라고 외친다는데, 저도 그 여행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라크에 가보고 싶다고요. 그리고 그 편지에 생애 처음으로 제 계좌번호를 담았어요. 떠나기 전 통장을 찍어보니 그 계좌에 정확하게 300만원이 들어와 있었어요. 2주 동안 돈 보낸 사람들 이름이 죽 찍히는데, 겨우 50만원, 60만원 버는 친구들도 5만원을 보냈더라고요. 더 놀랄 일은 제가 이라크에서 돈이 없어 나오려다가 인터넷뱅킹으로 통장을 열어보니 1800만원이 있는 겁니다. 제 편지가 돌고 도는 동안 많은 분이 통장에 돈을 넣어주신 거죠. 정부가 막아 이라크에 못 가게 되자 그분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경로를 틀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분쟁 지역도 가게 됐습니다.

저는 어떤 때는 4대강 사업 같은 환경문제에 대해서, 어떤 때는 정신대 문제에 대해서, 어떤 때는 이라크 문제에 대해서 지금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얘기하죠. 저를 보고 산만하다는 사람이 혹시 있을까요? 없어요. 저는 청소년들에게 진로 문제를 얘기할 때 이 부분을 강조하거든요. 저도 굉장히 많이 혼나고 욕먹었어요. 지각하는 학생을 칭찬하는 어른이 있을까요? 제가 단 하나 놓치지 않은 게 있다면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랬고 처음부터 자기 꿈이 뭔지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열일곱 살 때 저랑 여행을 시작한 친구가 있어요. 이 친구가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대학을 안 가고 저를 찾아왔어요. “선생님, 진로 상담하고 싶어요. 외국의 학교로 공부하러 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좋은지 외국에 있는 대안적 대학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하더라고요. “넌 뭘 하고 싶은데? 뭘 공부하러 어떤 학교에 가고 싶어?” 했더니,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고 대답해요. 뭘 하고 싶은지 빨리 찾아야 어떤 학교가 좋은지 추천해줄 수 있지 않겠냐고 했더니, 또 모르겠어요, 그래요. 그래서 여행을 해봐, 그리고 네 또래 아이들에게 뭘 하고 싶은지 물어봐, 했어요.

진로 결정보다 물을 기회 주는 게 더 중요

이 친구가 아시아 15개국을 가는 여행을 계획했어요. 여행하면서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기지를 철수하게 만드는 아시아의 유엔 같은 기구를 만들고 싶다는 일본 친구, 피스보트로 세계 여행을 준비하는 또 다른 일본 친구, 히잡(이슬람식 머리 수건)을 쓰고 결혼을 준비하는 인도네시아 친구, 타이 난민촌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미얀마 친구, 방콕으로 자원봉사를 하러 왔다가 돌아가면서 국제개발을 공부해서 다시 와야겠다고 말하는 노르웨이 친구를 만났어요. 그리고 제게로 와 추천서 한 장을 내밀더군요. 단체나 대학에 있는 사람도 아니면서 제가 기꺼이 추천서를 썼어요. ‘제가 이 친구를 만난 건 열일곱 살 때였습니다. 저희는 이런 여행을 했고, 이렇게 삶의 방향을 찾고, 지금 첫 번째 걸음을 떼려고 하고, 그것을 위해 지금 이 학교를 가려고 하기 때문에 저는 기쁜 마음으로 이 학생을 추천합니다’라고 썼지요.

그 친구가 스웨덴에 있는 사회적 기업을 양성하는 1년짜리 코스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는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면요. 2주 동안 이탈리아의 우물 파는 프로젝트를 하는 친구가 와요. 그럼 집중해서 2주 동안 분쟁 지역에서 우물 파는 일을 학습하죠. 그리고 사회적 기업을 운영한 친구가 오면 한 달 동안 그걸 집중 공부해요. 저는 그 친구가 진로를 잘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 친구는 물음을 붙들었고,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를 진지하게 물었고,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의 방향을 찾았을 때 그것에 도전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삶의 결단력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과, 살아가는 형태와 걸어가는 속도를 스스로 정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제가 2002년 이후 펀드레이징(기금 모금 행사)을 하지 않았지만 한 번도 가고 싶은 곳에 못 간 적이 없고, 평화도서관을 만들고 싶은 곳에 못 만든 적이 없었어요. 삶은 돈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여행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우리가 진로를 결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물을 시간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더 많이 경험하고, 시도하고, 실패할 기회를 줄 때 그 사람이 진짜 자기가 잘하는 일과 새롭게 만들 일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꿈을 찾는 과정도 네 꿈의 일부이니 즐겨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여행을 미리 치밀하게 계획하지 않는데 오늘 강의도 처음 생각과는 많이 달라져버렸네요.

정리·문정우 기자 woo@sisain.co.kr

기자명 임영신 (공정여행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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