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5일 오전 11시. 사회복지공동모금회(공동모금회) 신임 회장으로 추대된 이동건 전 국제로타리 회장은 서울 광화문 공동모금회 사무실을 전격 방문했다. 이 회장은 사무국 사무실뿐 아니라 지하 기계실까지 내려가 일일이 문을 열게 했다. 외부 단체에 빌려준 세미나실도 열어 둘러봤다. 통상적인 신임 회장 방문과는 다른 분위기였다고 공동모금회 직원들은 전했다. 공동모금회의 한 관계자는 “인사도 잘 받지 않은 것으로 안다. 냉기가 쫙 흘렀다”라고 말했다.

이 회장이 취임한 날 내부에서도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노사협의회 직원 쪽 대표위원들이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성명서에서 직원 대표들은 직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조직쇄신위원회나 구조조정본부를 만들고, 중앙회 간부와 16개 지회 사무처장은 일괄 사직서를 내고 재신임 절차에 따라 재신임받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회장은 이미 BH(청와대)의 지시를 받아 들어올 가능성이 높아졌고, 현재 중앙회 간부와 사무처장을 물갈이하려고 하는데, 그 이후 (공동모금회를) 실질적으로 점령하기 위해 뉴라이트계 인사들이 대기하고 있다는 후문도 있다”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뉴시스공동모금회 임직원이 11월25일 내부 비리 사건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직원들이 나서서 강도 높은 개혁을 요구한 데는 2년 전 악몽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공동모금회 비리 후폭풍을 빌미 삼아 정부가 2년 전 추진했던 ‘관치화·공동모금기관 복수화’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는 조짐이 포착된 것이다.

2년 전 악몽 현실화될까

2008년 11월 손숙미 한나라당 의원이 공동모금회법 개정안을 냈다. 이 개정안은 독점 지위를 누려온 공동모금회에 ‘경쟁’을 도입하겠다는 취지였다. ‘기부자의 선택권 강화’와 ‘민간 기부의 활성화’를 목표로 보건복지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한 심사위원회에서 모금 전문기관 지정을 심사하게 했다. 사회복지 단체와 사회복지 관련 학과 교수, 그리고 야당은 ‘관치화·복수화는 거꾸로 가는 정책’이라며 반발했다. 법 개정 이면에는 정부가 민간 성금을 ‘쌈짓돈’으로 삼을 것이라는 염려가 짙게 깔려 있었다. 특히 민간 중심의 의료안전망기금 조성으로 취약 계층을 지원하겠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과 복수화 정책이 무관치 않다고 보았다.

한나라당은 그해 12월 심재철 의원 등이 중심이 되어 관치화 색깔을 누그러뜨리고, 복수화를 유지하는 선에서 개정안을 냈다. 야당과 시민단체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 이 개정안은 현재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에 상정된 채 계류 중이다.

ⓒ시사IN 백승기공동모금회의 비위 사실이 알려진 뒤 사랑의 온도탑(위)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길이 싸늘하다. 온도탑 온도도 예년에 비해 낮아졌다.
그런데 최근 공동모금회 사태를 맞아 대안으로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이 복수화 카드를 다시 꺼냈다. 진 장관은 새 공동모금회를 만들어 경쟁 체제를 도입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나아가 보건복지부는 의료구제모금회를 내년 상반기에 출범시키겠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공동모금회법을 개정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의료 소외계층을 위한 전문 모금기관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보건복지부 방침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의료안전망기금 조성이라는 대선 공약대로 ‘MB 모금회’를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서울복지시민연대 중심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관치화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도 꾸려졌다.

사회단체가 이렇게 반발하는 것은 관치화나 복수화가 공동모금회 원칙 자체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공동모금회는 1998년 처음 시작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보건복지부 주도 아래 이웃돕기 중앙운동추진협의회를 결성해 성금을 모았는데, 1993년 감사원 감사 결과 이 돈이 엉뚱한 곳에 쓰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때부터 사회복지사업기금 조성과 배분을 민간에 넘기자는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1997년 보건복지부가 행정부 발의로 사회복지공동모금법을 냈다. 하지만 이 법안도 공동모금회 운영에 대해 정부의 허가를 받게 해 시민단체들의 반발을 샀다. 대체입법이 논의된 끝에 1999년 법안이 개정되었다. 보건복지부나 지자체 허가 승인권을 삭제해 독립기구로 만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MB 정부의 합동작전 아니냐”

공동모금회는 설립 당시 모금 규모가 200억 원이었는데 2009년에는 3300억원 규모로 커졌다. ‘사랑의열매’로 대표되는 공동모금회는 주로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연말연시 집중 캠페인을 통해 성금을 모은다. 이렇게 모은 성금은 사회복지 단체 등으로부터 신청을 받아 아동·청소년·장애인·노인 복지 등 각종 복지사업에 배분된다. 공동모금회는 민간 성금이 모였다 흩어지는  ‘정거장’인 셈이다.

이 같은 방식은 세계 42개국에서 시행되고 있다. 원래 미국에서 비롯되었다. 원조 격인 미국 ‘Community Chest United Way’는 1887년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22개 사회복지 기관이 단일화된 모금 기구를 만들면서 시작했다. 그 정신은 한 번의 성금으로 모든 이들에게 혜택을 주자는 ‘One Gift For All’이다. 이 정신에 따라서 설립된 국내 공동모금회 영문 표기도 ‘Community Chest of Korea’이다. 그런데 정권 교체 뒤 한나라당과 보건복지부가 정거장을 여러 개 만드는 복수화를 꾀한 것이다.

이태수 교수(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는 “공동모금회 인허가권을 정부에 되돌려주는 것은 10년 전으로 돌아가자는 구시대적 발상이다. 복수화 역시 설립 취지인 ‘One Gift For All’ 정신을 위배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모금 기관을 직접적으로 관할하고 싶어하는 보건복지부의 관할 욕구와 민간 자원을 통해 재원을 보충하고자 하는 정권 차원의 욕구가 맞아떨어져 10년간 쌓아온 공동모금회 위상을 흔들고 있다. 관료 집단과 천박한 복지 철학을 가진 정권의 합동작전이다”라고 평가했다. 이들 시민단체의 경우 소득세·법인세 혜택 등을 공동모금회가 독점으로 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견해이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는 다른 모금 기관에도 혜택을 적용해 풀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복수화를 추진하는 것은 딴 속셈이 있다는 지적이다.

ⓒ청와대제공지난해 5월 이동건 국제로터리 회장(왼쪽·현 공동모금회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오른쪽)에게 ‘영예의 상’을 수여했다.

물론 지난 10년간 공동모금회가 가지고 있는 근본 문제에 대한 논의는 안팎에서 줄기차게 이어져왔다. 설립 초기부터 주요 의사결정 기구인 이사회가 명망가 중심으로 꾸려지고, 성금이 3000억원대로 크게 늘어났지만 투명성은 제자리인 점이 줄기차게 제기되었다.

10년간 독점 지위 누렸으나 투명성은 제자리

내부 개혁을 할 기회는 있었다. 2005년 회관 매입 사태 등이 대표적이다. 공동모금회가 지금 쓰고 있는 빌딩을 260여 억원에 매입했다. 논란이 일자 감사원이 감사에 나섰다. 감사 결과 성금 40억원을 지정기탁으로 기부받아 매입비용으로 충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때도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당시 내부 개혁 요구가 터져나왔다. 그래도 복수화 논의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공동모금회 한 관계자는 “보건복지부는 늘 공동모금회를 산하기관처럼 운용하고 싶어하는데, 그래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가이드라인이라는 게 있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동모금회에 이상 기류가 감지되었다. 영부인이 관례적으로 맡아온 명예회장 자리를 김윤옥 여사가 고사한 것이다. 공동모금회 설립 이후 이희호씨나 권양숙씨는 영부인 시절 명예회장을 맡아왔다. 공동모금회는 김윤옥씨에게도 명예회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공동모금회 한 관계자는 “청와대가 당시 신필균 사무총장을 만나주지 않은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신 총장은 신낙균 민주당 의원의 동생으로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냈다. 그녀의 남편은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이종오 교수(명지대)이다. 신씨는 2006년 6월 공동모금회 사무총장에 올랐다. 정관에 보장된 임기는 3년, 2009년 6월까지였다.

그러나 신 총장도 정권 교체 뒤 물갈이 대상에 올랐다. 공동모금회가 법정 민간기구인데도 신 총장은 보건복지부로부터 사퇴 압박에 시달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2008년 6월 서울복지시민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인사권이 없는 복지부가 소속 정책관을 통해 직간접으로 사퇴를 종용했다”라며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그해 9월 부당한 정치적 압력이라며 복지부 장관에게 해당 인사를 경고 조치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복지부는 “업무 협의를 했을 뿐 사퇴 압박을 하지는 않았다”라며 인권위 징계 권고를 거부했다.

결국 신 총장은 자신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한나라당과 보건복지부 등이 복수화를 골자로 한 개악 법안을 냈다며 복수화 외풍이 거세게 불던 2008년 12월 전격 사퇴를 선언했다. 최근 이석현 민주당 의원이 공개한 원충연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사무관의 사찰 수첩 사본에도 신필균 총장 이름이 올랐다. 이 수첩에는 신필균 이름과 함께 ‘인권위 제소’라고 적혀 있다.

신 총장이 물러나면서 경북 포항 출신 박을종 사무총장이 임명되었다. 사무총장이 바뀌고 2009년 3월 이명박 정부 초대 여성부 장관에서 낙마한 이춘호씨가 이사로 선임되었다. 이씨는 자신과 아들 명의로 된 아파트와 오피스텔 등 부동산 총 40건과 45억원이 넘는 재산내역을 공개해 부동산 과다 보유와 투기 의혹을 받아오다 가장 먼저 낙마한 바 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공동모금회 사태를 맞아 보건복지부가 다시 복수화 카드를 꺼내면서 이번에 ‘구원 투수’로 등판한 이동건 회장 역시 공동모금회 안팎에서 복지부가 밀고 청와대와 교감한 인사라는 말이 돌고 있다. 이 회장은 2009년 한국인 최초 국제로타리 클럽 회장을 지냈다. 그가 국제로타리 회장으로 재임 중인 2009년 이명박 대통령에게 국제로타리 ‘영예의 상’을 준 인연이 있다. 이 회장 추대에는 공동모금회 부회장이었던 이경숙 전 인수위원장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건 신임 회장, 청와대와 교감설 돌아

이 신임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신뢰 회복을 위한 투명성을 강조했다. 그 일환으로 인적 쇄신과 조직 쇄신을 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앞서 공동모금회 운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윤병철 회장이 사퇴한 다음 날 이명박 대통령도 “원칙에 따라 철저하게 인적 쇄신을 단행하면 국민들로부터 신뢰 제고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인적 쇄신을 주문했다.

2년 전 논란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지만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반대 목소리가 크지 않다. 서울복지시민연대를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지만, 관련 단체나 교수 등 참여율이 높지 않다. 비대위 관계자는 “절묘한 때에 보건복지부와 한나라당이 그동안 만지작거리던 카드를 다시 꺼내 밀어붙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12월17일 공동모금회 건물에 붙은 사랑의 온도탑은 예년에 비해 낮은 11.5℃였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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