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항쟁(왼쪽)과 2004년 탄핵 반대 촛불 집회(오른쪽). 운동의 에너지만으로 버텨온 한국 민주주의 1단계는 이번 대선으로 막을 내렸다. ‘정치 밖에 아무리 강한 힘이 존재해도 그것만으로 민주주의 쇠락을 막을 수 없다’는 경고음에 귀를 기울일 때이다.

“1980년대 민주주의가 희망의 언어였다면, 19 90년대에는 실험의 언어였으며 2000년대에는 절망의 언어가 되었다.” (ID ‘전진하는 청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인터넷 서점 알라딘 리뷰 중에서).

이제 민주화와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환멸의 대상이 되었다. 이번 대선에서 범 민주파는, ‘뭉치지 않으면 반민주로의 퇴행을 막지 못한다’며 두려움을 동원했으나 유권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런 마당에 ‘민주주의’라는 해묵은 화두를 꺼내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 나아가 이번 선거의 패인으로 ‘경제 실패’가 아닌 ‘집권파가 민주주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유권자의 복수’로 정의하고 나섰으니 여간 이채롭지 않다.

최장집 교수의 일련의 저작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최장집) 〈어떤 민주주의인가〉(최장집? 박찬표? 박상훈) 시리즈는 이런 판단의 근거를 상세하게 들려준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한 독자는 “이런 책은 국민 필독서로 선정해서 무조건 읽혀야 한다. 오늘날 우리 정치판은 왜 이 모양일까 짜증나고 반감을 가진 분, 노 대통령이 좌파라고 믿고 계신 분, 그래도 옛날이 좋았다며 ‘박’ 아무개 후보를 지지하려는 분, 한때 운동 좀 하셨던 분 등등, 꼭 읽어보시길. 100%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현 상황을 이해할 수는 있을 테니까”라고 평했다.

2002년 처음 출간되고 2005년 개정판을 낸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서 최장집 교수는 일찍이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경고음을 냈다. “2002년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하면서 위기라고 진단했을 때, 사태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응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되돌아볼 때 나빠졌다고 말한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일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는 민주화 이후 정당 민주주의에 대해 야박하게 평가한다. 민주화 이전 냉전 반공주의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진, 보수 독점의 협애한 이념적·사회적 기반을 갖는 정당 체제가 민주화 이후에도 기본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는 “정당 체제를 중심에 놓고 볼 때, 한국의 민주화는 국가 기구를 관장하는 엘리트들을 순환시켰다는 것 이상의 큰 변화가 없다”라고 잘라 말한다.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 실패의 중심에 ‘정당의 실패’가 있다고 보았다. 한국 민주주의는 국지적 처방이나 뭔가 기발한 아이디어의 차원에서 해결되기 어려운 ‘매우 나쁜’ 상황에 있는데 무엇보다 잘못된 방향 설정, 즉 정당 정치의 역할과 기능을 축소하는 ‘정당 없는 민주주의’ 경로를 심화시켜온 데 기인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당이라는 존재가 거느리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감안할 때 얼핏 저자들의 주장은 곱으로 승산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저자들은 오히려 묻는다. 정당 정치가 취약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정당 약하면 하층민 체계적으로 배제돼

그들은 강한 정당의 부재가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축소하고 선거를 중간 계급 위주의 것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현대 대의제가 민주주의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파당적 경쟁의 기초 위에 있기 때문이다. 정당들이 여러 집단의 갈등과 열정을 경쟁적으로 동원해 자기들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지 않는 한, 소외된 약자들의 요구가 국가의 정책 결정에 반영되기는 어렵다.” 그 과정을 낭비로, 혹은 불필요한 갈등으로 불온시하면 남는 것은 집권자의 온정적 시혜나 도덕적 선의와 같은 권위주의 가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민주주의인가〉의 공저자 박상훈 박사에 따르면 한국 정치 현실에서도 이 과정이 확인되고 있다. 박 박사는 “저변의 욕구를 대안으로 조직할 수 있는 정당이 지속적으로 약해지고 있으며 민주 정부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발견이었다”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사조 안에서 재벌·사학재단·종교 같은 거대 사익은 더욱 강화된다. 그 결과 사회 하층의 목소리가 체계적으로 배제되는 정치 체제로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민주주의가 아닌 것은 아니다. 엘리트 민주주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 신자유주의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데 우리는 이와는 다른 경로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생산자, 하층, 소외 계층을 대변하는 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도 정당 민주주의라는, 고전적인 테마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말한다. 한나라당의 집권이 예견되는 시점에 기획된 민주주의 총서의 이름이 〈어떤 민주주의인가〉로 낙착된 이유이다.

저자들이 보기에 정당 없는 민주주의를 제도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정치 개혁의 깃발 아래 수행된 일련의 조처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지구당 폐지 등 원내 정당화이다. 정당 없는 민주주의의 완성판은 개방형 국민 경선제이다. 저자들은 이 제도가 원리상 정당 민주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비판한다. 정당의 조직적 매개 없이 유능한 개인이 선거에 출마하고 개인의 양심에 맞게 대표로서 정책을 결정하고 통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사회 명사 중심의 의회 지배 체제로의 퇴행일 뿐이라는 것이다. 
 

운동에 의한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질’에 대해 질타하는 최장집 교수의 저작들.

저자는 “한국 민주화가 가져온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시민 사회의 발전도 정당체제의 발전도 아닌 권위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강력한 국가가 더욱 공고화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럴 때 정치는 정당과 의회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언론 사이의 다툼으로 치환되고, 시민 사회는 국가 관료제와 거대 사익의 영향력이 더욱 공고화되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일련의 정치 개혁 조처는 미국의 정치 개혁 모델에서 직수입된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은 정치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하층민에 대한 조직적 동원 등 부패 문제로 보고 유권자 사전 등록제를 실시하고 지방 선거에서 정당 공천을 배제하는 등 한국과 유사한 조처를 취했다. 그 결과 투표율이 25~30% 급감했는데, 불참자 대다수가 하층의 교육받지 못한 유권자였다고 한다. 반대로 언론과 시민단체, 상공회의소나 정책 연구 기관과 같이 중산층 이상에 의해 통제되는 기관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중산층 중심의 미국 정치의 원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한국은 대통령마저 탈정치 이미지를 꾀하며 정당 없는 민주주의 노선에 앞장서왔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말기에 탈당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아예 집권 전반기부터 당정 분리를 선언했다. 그 결과 정당 정부라는 현대 민주주의 기본 원리와 매우 다르게 ‘정당을 우회하는’ 대통령 개인 위주의 정부 구조를 심화시켰다. 최고 정치 지도자 개인에 의존한 정치동원 체제는 ‘위임 민주주의’라 불리기도 한다. 이런 체제에서 대통령은 스스로를 ‘정당’ 때문에 당선된 것이 아니라 ‘국민’에 의해 당선된 것으로 해석하며 따라서 정당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민주주의 체제의 운명이 오로지 대통령 개인에 매달리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치학자 오도넬은 “대통령이 신의 섭리로 탄생한 인물처럼 추앙되다가도, 내일은 마치 무너져버린 신상처럼 저주를 받는다”라고 풍자한 바 있다(〈어떤 민주주의인가〉, 308쪽).

저자들이 보기에 이제 기존 정당 체제를 그대로 둔 채 운동의 에너지만으로 버텨온 한국 민주주의의 1단계는 종결되었다. 가난한 민중의 삶의 조건 개선이라는 민주주의가 갖는 가치를 중시한다면 다른 종류의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정치의 영역 밖에 제아무리 강한 운동의 힘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만으로 민주주의의 쇠락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자명 노순동 기자 다른기사 보기 lazys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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