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잠잠했던 신데렐라 판타지가 다시 돌아왔다. 로맨틱 코미디의 대가 김은숙·신우철 콤비가 펼쳐놓는 주말 밤의 향연, 〈시크릿 가든〉이 그것이다. 상위 1% 중 1%인 재벌남과 형편없이 가난한 스턴트우먼의 ‘밀당(밀고 당기기)’이 시작된 것이다. 두 남녀 사이의 계급적 격차는 더 현격해지고, 배경 역시 더 화려하다. 눈을 호강시켜주는 초특급 ‘럭셔리’ 공간들이 그에 걸맞은 ‘러블리’ 주인공들의 동선을 따라 시시각각 펼쳐진다.

사실 이 명콤비는 〈파리의 연인〉 등 연인 3부작으로 로맨틱 코미디에서 일가를 이룬 이후, 얼마 전 〈온에어〉와 〈시티홀〉에 이르러 치밀한 캐릭터 구축과 깊어진 현실 인식으로 한 계단 도약을 이루었다. 따라서 누가 봐도 〈파리의 연인〉식의 신데렐라 이야기임이 명백한 이번 드라마는 일종의 퇴행으로 보일 수도 있다.

두 주인공 현빈(왼쪽)과 하지원(오른쪽)의 몸이 뒤바뀌는 설정은 초현실적 마법이 아니고서는 둘 사이의 계급적 간극이 극복될 수 없음을 방증한다.
물론 이들이 방송계의 이면을 들추건, 정치 프로젝트를 설계하건 이들의 장기가 로맨스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들의 드라마가 무엇보다도 사랑이라는 행위에서 남녀의 힘 관계를 다루는 절묘한 호흡과 탄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의 줄다리기를 이들만큼 긴장감 있고 생기 있게 그려내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시크릿 가든〉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단 몇 회 만에 주인공 네 사람의 팽팽한 ‘사랑의 사각 체제’가 자리 잡았다. 온몸이 멍 자국인 가난한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은 특권 의식으로 똘똘 뭉친 오만방자한 재벌 3세 김주원(현빈)과 맞장을 뜨고, 주원의 외사촌인 바람둥이 한류 스타 오스카(윤상현)는 과거의 연인인 허영기 많고 어수룩한 귀족녀 윤슬(김사랑)의 애증 어린 접근에 휘둘린다. 성격과 포지션이 뚜렷한 네 사람은 그 계급적 격차나 역관계의 유리·불리에 관계없이 대등한 대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런 대등하고 팽팽한 대결이야말로 신데렐라 판타지의 (그 성패를 좌우하는) 필수적인 내적 구성 요소인 셈이다.

이 드라마가 흥미로운 것은 그냥 신데렐라 판타지가 아니라, 그것을 비틀면서 거리두기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신데렐라 판타지를 끌고 가는 이 드라마의 방식은 스스로가 신데렐라 판타지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이다. 자신들의 과거 작품을 비롯한 내로라하는 신데렐라 로맨스물에 대한 자기참조와 혼성 모방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이는 로맨틱 코미디 클리셰(진부함)들의 단순 반복이 아니라, 그것들을 과장되게 차용하고 비틀면서 벌이는 놀이이다.

주원은 〈내 이름은 김삼순〉의 백화점 집안 재벌 3세 진헌(현빈)을 확대·심화시켜놓은 캐릭터이고, 라임은 자주 오기와 유혹 사이에서 흔들리는 〈발리에서 생긴 일〉의 수정(하지원)의 처연한 눈빛을 보여준다. 실력 없는 한류 스타 오스카에게서 〈온에어〉의 오승아(김하늘)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크릿 가든〉을 만든 김은숙 작가와 신우철 PD의 장기는 로맨스다. 위부터 이들 콤비가 만든 〈파리의 연인〉 〈시티홀〉 〈온에어〉.
남녀의 영혼이 바뀌는 순간, 캐릭터 매력 반감

게다가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결국은 계급 갈등에 관한 이야기임을 대놓고 얘기한다. 주원이 직설적이고 노골적으로, 하지만 경박하지는 않게 되뇌는 라임과의 계급적 격차는 그 사이에(〈발리에서 생긴 일〉 이후 현재까지) 더욱 벌어졌다. 그는 라임에게 ‘계급’에 대한 개념 정의를 친절히 설명해주고 그에게 라임은 ‘데리고 놀’ 수준조차 안 된다는 잔인한 현실을 일깨워주며, 차별과 불평등이야말로 그들이 누리는 특권이라는 식의 ‘명언’을 날린다.

따라서 라임에 대한 주원의 사랑은 동정과 연민에서 사랑으로 가는 일반적 경로를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그렇지만 ‘얼떨떨하고 신기하게’, 거부할 수 없게 잡아끄는 강력한 힘이다. 그래서 그는 라임에게 ‘신데렐라’가 아닌 ‘인어공주’가 되어달라고 말한다. 때가 되면 그녀가 인어공주처럼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신데렐라 판타지 비틀기와 거리두기는 결코 탈(脫)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다.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 판타지를 가지고 신나게 놀지만,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지는 않는다. 비유컨대, 그것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자본주의를 버릴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는 자본주의자의 욕망과 같은 것이다.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 판타지가 자본주의적 욕망만큼이나 그리고 그 기저의 계급 갈등만큼이나 ‘현실적’이라는 걸 영리하게 간파하고 있다.

5회 들어 예고된 대로 진행된 두 사람의 영혼이 뒤바뀌는 설정은 정확히 그러한 계급적 간극을 뛰어넘기 위한 신데렐라 판타지 전략이다. 물론 이러한 판타지는 역설적으로 계급적 간극이 이제 초현실적 마법이 아니고는 극복될 수 없는 ‘현실’임을 방증하는 건지도 모른다. 아마도 계급을 뒤바꾼 두 주인공이 체득하게 되는 계급 격차와 문화 충격, 그리고 뒤바뀐 성별의 곤욕까지, 그 간극은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그 간극을 직접 몸으로 경험하면서 그들은 점차 서로의 세계에 대해 알아가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며, 내밀한 소통에 이를 것이다. 라임은 폐소공포증이 있는 주원의 트라우마를 엿보게 될 것이며, 주원은 가난을 넘어서는 라임의 끈기와 생명력을 호흡할 것이다. 영혼이 뒤바뀐 순간 그들은 이미 공모와 합체의 동일 운명체가 된 셈이다. 그렇게 계급적 격차는 극복되고 신데렐라 판타지는 완성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두 사람의 영혼이 뒤바뀐 순간 신데렐라 판타지 안에서 내부 균열이 발생한 것이다. 단 4회 만에 견고하게 구축된 캐릭터의 매력이 반감되었다. 그토록 환상적이고 도도하고 시크한 주원의 모습도, 털털하고 씩씩한 라임의 모습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남녀 주인공의 몸이 뒤바뀌면서 사각 러브 라인 역시 남남, 여여 커플로 꼬이기 시작했다.

〈시크릿 가든〉은 현재 기로에 서 있다. 드라마는 재빨리 캐릭터의 혼란을 수습하고 재정비해서 신데렐라 판타지를 안전하게 재구축하고자 할 것이다. 혹은 이것이 진전을 위한 일시적 산통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같은 혼란과 위기가 혹시 예기치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신데렐라 판타지를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는 복병이 되는 것은 아닐까. 단지 신데렐라 판타지의 실패가 아닌 그것의 전복이 일어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과연 신데렐라 판타지의 부활은 성공할 것인가. 다음 회가 정말 궁금하다.

기자명 신주진 (드라마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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